부여왕릉 매장시설과 봉분 위치가 다른 까닭
부여왕릉 매장시설과 봉분 위치가 다른 까닭
  • 이인호 기자
  • 승인 2023.10.23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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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호 고분에서 호석·깬돌 활용…장식금구·연화문수막 등 통해 조영 시기 가늠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2020년 백제왕릉원 3·4호분을 시굴조사 했을 때 매장시설과 위치가 다르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후 2021년부터 올해까지 봉분조사를 실시해 두 고분의 구조와 축조과정을 확인했다.

원인은 왕릉의 지세였다. 일제시대에 발굴조사를 한 기록과 그때 찍은 사진을 보면, 3·4호분이 위치한 중앙고분군에는 동쪽과 서쪽에 두 개의 능선이 있었다. 3·4호분은 서쪽 능선에 위치하고 동쪽의 얕은 골짜기를 향해 조성되었다.

 

일제강점기 부여 왕릉원 4호분 조사사진(호석) /문화재청
일제강점기 부여 왕릉원 4호분 조사사진(호석) /문화재청

 

이번에 고분 봉분을 시굴하면서 백제시대에 무덤 축조과정이 추정되었다. 우선 지하 돌방의 출입구를 기준점으로 직경 20m 내외의 봉분이 구획되었다. 고분 경계지점에 높이 40, 너비 25내외의 다듬은 돌(호석)을 세우고, 그 내부에 봉분을 쌓았다. 이때 호석을 따라 그 바깥으로 1.4m 가량 사이를 두고 깬돌을 열지어 놓았다.

돌방은 당시 생활면에서 4.5m 가량을 굴착해 평면 자 형의 구덩이를 조성했다. 능선 정상부 쪽이 돌방의 뒷벽이고, 경사면 아래쪽이 출입구여서 출입구 쪽으로 갈수록 얕아지는 구조다. 돌방은 잘 다듬은 판석을 이용해 만들었으며 봉분은 돌방 천장을 기준으로 3.5m 가량이 남아 있었다. 시신을 안치하고 출입구에는 판석을 막아두고 널길은 흙으로 채운 뒤 고분 외곽의 호석을 연결했다.

3호분과 4호분의 기본 축조과정은 동일하지만 세부적인 차이가 있다. 3호분은 돌방 중심을 기준으로 봉분을 동쪽과 서쪽을 번갈아 가며 쌓은데 비해 4호분은 수평으로 쌓았다. 3호분에서는 돌방의 출입구에 대형 석재를 덧대고 바닥에 널찍한 석재 2매를 겹쳐 만든 단과, 널길의 배수로(너비 60cm, 최대 깊이 100cm) 등이 확인되었지만, 4호분에서는 추가 시설이 따로 확인되지 않았다.

 

부여 왕릉원 3호분 조사 후 전경 /문화재청
부여 왕릉원 3호분 조사 후 전경 /문화재청
부여 왕릉원 4호분 조사 후 전경 /문화재청
부여 왕릉원 4호분 조사 후 전경 /문화재청

 

한편 이번 발굴에서 고분을 만들 무렵의 유물도 나왔다. 4호분에서는 동에 금을 입혀 만든 불꽃형태의 목관 장식금구(裝飾金具)가 확인되었는데, 익산 쌍릉 출토품과 동일하다. 3호분에서는 호석열의 석재 사이에서 암키와 편, 널길 채움토에서 연화문수막새 조각이 확인되었다. 이 기와들은 모두 인접한 능산리사지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것으로 고분 조영 과정에서 유입된 것으로 판단된다.

 

부여 왕릉원 4호분 널길 매납 대형 항아리(높이 48.8㎝) /문화재청
부여 왕릉원 4호분 널길 매납 대형 항아리(높이 48.8㎝) /문화재청

 

부여 왕릉원은 백제의 사비 도읍기인 538~660년까지 123년간 재위한 왕과 왕족들의 무덤이다. 그동안 능산리 고분군이라고 부르다가, 2021년에 현재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고분군은 중앙과 동·서 고분군으로 나뉜다. 1971년 정비·복원공사를 통해 중앙고분군 7, 서고분군 4기의 고분의 봉분이 복원되었고, 동고분군의 7기는 아직 복원되지 않았다.

 

부여 왕릉원 전경 /문화재청
부여 왕릉원 전경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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