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척 죽서루, 보물에서 국보로 승격 예고
삼척 죽서루, 보물에서 국보로 승격 예고
  • 이인호 기자
  • 승인 2023.10.27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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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영남루도…지자체의 국보지정 요청 수용, 경관적·학술적 가치 높아

 

조선 정조 임금이 김홍도의 삼척 죽서루 그림을 보고 칠언시를 남겼다.

彫石鐫崖寄一樓(조석전애기일루)/ 樓邊滄海海邊鷗(누변창해해변구)/ 竹西太守誰家子(죽서태수수가자)/ 滿載紅粧卜夜遊(만재홍장복야유)

다듬고 절벽 쪼아 세운 누각 하나/ 누각 옆은 바다이고 바다에는 갈매기 노네/ 죽서루가 있는 고을의 태수는 어느집 아들인가/ 미녀들 가득 싣고 밤 세워 뱃놀이 하는구나

정조는 자신이 직접 죽서루에 가서 뱃놀이를 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시로 표현환 것이다.

조선시대 시인이며 묵객이 동해안을 지나며 반드시 들러 시 한수, 글 한 줄 쓴 곳이 강원도 삼척 죽서루(竹西樓). 죽서루는 관동팔경 가운데 유일하게 바닷가에 있지 않고 강을 끼고 있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관동팔경의 제1경임은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삼척 죽서루 /박차영
삼척 죽서루 /박차영

 

문화재청이 강원도의 대표 누각인 삼척 죽서루를 보물에서 국보로 승격하기로 예고했다. 아울러 밀양 영남루도 국보로 지정 예고했다.

문화재청은 지난해 지방자치단체 국보 지정 요청에 따라 두 누각에 대해 관계 전문가의 지정조사와 문화재위원회 검토를 거쳐 이번에 국보 지정을 예고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삼척 죽서루는 고려 명종(11711197)대에 활동했던 김극기(金克己, 11481209)가 죽서루의 풍경을 시로 썼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적어도 12세기에는 창건되었으며, 안축(安軸, 1282~1348)과 정추(鄭樞, 1333~1382) 등의 시를 통해 처음에는 서루(西樓)’로 불리다가 14세기 후반에 들어서 죽서루’(竹西樓)로 불리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수온(金守溫, 14101481)죽서루단청기’(竹西樓丹靑記)(1472), 허목(許穆, 15951682)죽서루기’(竹西樓記)(1662) 등에서 ‘1403년 부사 김효손(金孝孫, 13731429)이 옛터에 새로 창건했다는 기록을 비롯하여 고려시대에 창건되었다가 조선전기에 재건된 이후 여러 차례 보수, 증축된 기록이 잘 남아있다. 현재의 모습은 조선후기 증축된 것으로, 잘 보존되어 있다.

허목은 죽서루(竹西樓)라는 이름은 동쪽에 죽장사(竹欌寺)라는 절이 있어서 그 서편에 위치한 누각이다라는 뜻으로 붙었다고 소개했다.

1403년 정면 5(측면 2)의 규모로 중창된 누정이었으나, 1530년 남쪽 한 칸(측면 3)이 증축되었고, 1788년 북쪽 한 칸(측면 2)이 증축되면서 현재와 같은 팔작지붕 형태가 되었다. 이처럼 조선 초기의 중앙 5칸과 조선 중기 이후 확장된 좌우측 1칸은 기둥 배열, 가구의 짜임, 천장과 바닥면의 처리, 공포 및 세부 의장 등에서 각 시기별 건축적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죽서루의 절경을 표현한 정철의 관동별곡’(關東別曲), 겸재 정선(鄭敾, 16761759)관동명승첩’(關東名勝帖)을 비롯해 김홍도(金弘道, 1745?), 강세황(姜世晃, 17131791) 등 고려부터 조선시대까지 시인, 묵객 등 다양한 계층이 죽서루를 소재로 수많은 시문, 가사와 그림 등을 남겼다. 더불어 주변 하천인 오십천(五十川)과 어우러지는 빼어난 경관을 자랑한다.

 

죽서루 측면 절벽과 그 밑에 흐르는 오십천 /문화재청
죽서루 측면 절벽과 그 밑에 흐르는 오십천 /문화재청

 

밀양 영남루는 통일신라 때 세운 영남사(嶺南寺)라는 절에 있던 금벽루(金璧樓) 혹은 소루(小樓), 죽루(竹樓)라 불리는 작은 누각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고려 때 절은 폐사되고 누각만 남아 있던 것을 1365(공민왕 14)에 밀양군수 김주(金湊, 13391404)가 중창하고 영남루(嶺南樓)라고 칭한 것이 관영 누각으로서의 시작이다.

조선 초에 밀양부사 안질(安質, ?1447)이 영남루를 중창하면서 영남루 서쪽 주변에 소루(小樓)를 건축했고, 1442년 경상도사 권기(權技, ??)가 소루(召樓)로 명명했으며, 그 후 부사 이충걸(李忠傑, 14651527)이 임경당(臨鏡堂, 현 침류각)으로 개명했다. 연산군 때에는 밀양부사 김영추(金永錘)가 임경당 반대쪽인 영남루 동북쪽에 망호당(望湖堂, 현 능파각)을 지으면서 빈객숙소로 이용했다.

임진왜란 때 객사와 함께 모든 부속 시설이 소실되었으나 1844년 이인재(李寅在)가 밀양부사로 재임할 당시 대루를 확장하면서 많은 부속건물을 지었고, 관원들과 지방 빈객들을 접대하는 객사로 사용했다.

경사지를 이용하여 건물을 적절히 배치한 영남루는 건물 자체의 조형미가 뛰어날 뿐만 아니라 주변 경관과 어우러진 모습은 다른 누정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빼어난 경관을 감상하면서 명사들이 수많은 시문을 남겨 조선 선조 때 영남루에 걸린 시판이 300여 개에 이르렀다고 하나 지금은 12개의 시판이 남아 있다.

 

밀양 영남루 /문화재청
밀양 영남루 /문화재청

 

이들 대형누각은 강원과 영남지역의 대표적인 누각으로 건축적인 가치뿐만이 아니라 주변 자연과 어우러져 경관적인 아름다움도 크며, 역사적으로 저명한 인사들이 방문하여 시문(詩文)을 남기는 등 학술적 가치도 높아 국보로 지정할 충분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문화재청은 이들 대형누각 2건에 대하여 30일간의 예고 기간 동안 의견을 수렴한 후, 문화재위원회 심의 절차를 거쳐 국보로 지정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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