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 독립영웅 양칠성의 사연
인도네시아 독립영웅 양칠성의 사연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3.11.11 13: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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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인으로 태어나 인도네시아 독립 위해 싸운 조선인…도로 생기고, 영화로 제작

 

인도네시아에서 독립영웅으로 인정받는 조선인 양칠성의 이름을 딴 도로가 생긴다는 보도(연합뉴스)가 나왔다. 또 양칠성을 다룬 영화가 제작된다는 보도(세계일보)도 있다. 양칠성은 어떤 인물인가.

양칠성 /KOREA.NET
양칠성 /KOREA.NET

 

양칠성(1919~1949)의 이름은 세 개다. 한국 이름은 양칠성(梁七星)이고, 일본어로 야나가와 시치세이(梁川七星), 인도네시아에선 코마루딘(Komarudin)이다.

지금의 전라북도 완주군 삼례읍 삼례리에서 태어났다. 태평양전쟁 중이던 1942년 일본은 조선인을 대상으로 인도네시아 포로수용소에서 감시원으로 일할 군속을 모집했다. 형식은 지원이었다. 그때 양칠성은 가정을 꾸리고 젖먹이 아들이 있었다고 한다. 19426월 그는 부산항을 출발해 인도네시아 자바섬을 향했다. 그곳에서 그가 감시한 대상은 주로 영국군과 네덜란드군 포로였다.

일본이 점령하기 전에 인도네시아는 300년 이상 네덜란드의 식민지배를 받고 있었다. 일본제국주의는 대동아공영권을 주창하며 아시아인들의 자주적 독립을 지원한다는 명분으로 현지 민족세력의 협조를 요청했다. 인도네시아 민족주의자들은 네덜란드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나 독립을 시켜준다는 일본의 약속을 믿었다. 독립영웅 수카르노 등은 일본과 협력했다.

3년후 일본군은 태평양전쟁에서 연합군에 밀리면서 인도네시아에서 철수해야 했다. 1945817일 수카르노는 독립을 선포했다. 물러나는 일본군은 질서정연하게 철수하라는 연합군측의 요구를 모른 척하고 무기를 방치했다. 현지 민족세력은 서양의 군대가 다시 오기 전에 일본군이 남기고 간 무기의 상당수를 접수했다.

그때 군속으로 있던 양칠성은 동료 일본인들과 함께 인도네시아에 잔류했다. 그에게는 현지에 가족이 있었다. 그는 현지에서 술라웨시의 머나도 출신의 여성과 사실혼 관계에 있었고, 둘 사이에 자식도 있었다고 한다. 양칠성은 이 아내와 자식을 사랑해 게릴라전을 펼치는 와중에도 이들을 데리고 다녔다고 한다.

먼저 영국군이 들어왔지만 자기네 식민지가 아니었으므로 철수하고, 1946년에 네덜란드가 영유권을 주장하며 군대를 파견했다. 가장 많을 땐 15만명의 군대가 본국에서 파병되었다. 민족주의자들은 옛지배자에 대항해 독립운동을 벌였다. 양칠성은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폭파전문가였다.

양칠성은 파팍 왕자 부대’(Pasukan Pangeran Papak)에 소속되에 게릴라로 활동했다. 이 부대는 반둥과 족자카르타를 잇는 철도와 도로를 공격하고, 다량의 무기를 탈취했다. 그는 폭파 기술을 활용해 네덜란드 군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해 치마눅다리를 파괴하는데 큰 공을 세우기도 했다고 한다.

네덜란드 군은 194811월 대대적인 반격작전을 벌여 파팍 왕자 부대도 퇴각을 해야했다. 그때 양칠성과 두명의 일본인이 포로로 잡혔다. 다른 조선인도 있었지만, 교전중 사망했고 시신을 찾지 못했다고 한다.

 

양칠성(왼쪽) /위키피디아
양칠성(왼쪽) /위키피디아

 

양칠성은 포로로 수용되었다가 이듬해 810일 일본인 동료 두 명과 함께 가루트시장에 끌려 나왔다. 그는 인도네시아인들이 보는 앞에서 공개 총살되었다. 그는 죽는 순간에 인도네시아어로 자유 또는 독립을 의미하는 메르데카를 외쳤다고 한다.

국내 일각에서 그가 일본을 위해 일했으니, 친일파 아니냐고 주장한다. 마지막 순간에 일본 천황 만세를 외쳤다는 속설도 있다. 하지만 인생은 유전하는 법. 하나의 잣대로 세상을 가르는 건 너무나 편협할수도 있다.

197511월 인도네시아 정부는 그와 일본인 동료 2명을 독립영웅으로서 자카르타 칼리비타 국립묘지에 안장했다. 그때 그의 이름은 일본 이름으로 기록되었다.

영웅 추도식에 참석한 일본 게이센여학원대학의 우쓰미 아이코 교수가 3명의 일본인 가운데 2명의 유족이 초대를 받았는데, 나머지 1명의 유족이 오지 않은 것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는 梁川七星이란 이름이 일본에서 흔치 않은 이름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우쓰미 교수의 추적 끝에 그의 이름은 양칠성이라는 조선인임이 밝혀졌다.

광복 50주년인 1995년에 한국 시민단체 등의 노력으로 묘비명이 ‘KOMARUDIN, YANG CHIL-SUNG, 양칠성 대한민국으로 바뀌었다. 올해는 한-인도네시아 수교 50주년이다. 식민지인으로 태어나 남의 나라 전쟁에 참여하고 다른 나라를 위해 독립운동을 하다가 끝내 서양인의 총탄에 숨진 양칠성은 한국과 인도네시아을 잇는 가교가 되었다.

 

양칠성 묘비명 /출처=detikjabar
양칠성 묘비명 /출처=detikjabar

 


<참고한 자료>

Wikipedia, Komarudin 

Korea.net, Komarudin: revered Korean fighter for Indonesian independence 

난민인민사이, 신지영, 히토츠바시 대학, 2016

[MBC 특집 다큐] 인도네시아 독립영웅 조선인 양칠성 - 2019225일 방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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