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7년 스위스에서 벌어진 종교내전
1847년 스위스에서 벌어진 종교내전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3.11.19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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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사이에 존더분트 전쟁…카톨릭주 패배, 연방 이탈을 억제

 

알프스의 나라 스위스는 평화롭고 자유로운 나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나라에도 내전이 있었다. 1847113일부터 29일까지 짧게 일어난 이른바 존더분트 전쟁(Sonderbund War)인데, 국내에선 스위스 통일전쟁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스위스 내전은 미국의 남북전쟁(1861~1865)보다 14년 전에 일어났다.

원인은 종교분쟁이었다. 스위스는 당시에 20여개의 작은 주(canton)들이 느슨한 형태의 연방을 구성하고 있었다. 주별로 언어와 종교, 정치제도가 달랐고, 서로가 경쟁했다. 부르주아들이 밀집한 도시에는 프로테스탄트가, 농촌엔 카톨릭이 각각 지배했다. 부르주아들은 연방의회를 장악하며 프로테스탄트에 유리한 헌법 개정을 추진했다.

갈등은 1841년 프로테스탄트가 압도적인 북부 아르가우주에서 시작되었다. 아르가우 주정부는 키톨릭 수도원의 해체를 명령하는 포고령을 내렸다. 1815년에 체결된 연방협정에는 수도원 재산권이 보장되어 있었다. 이에 7개 카톨릭 저들은 연방협정을 따르지 않는 모든 주와의 관계를 끊기로 합의했다. 카톨릭 주는 루체른주, 프리부르주, 발레주, 슈비츠주, 우리주, 운터발덴주, 추크주 등이다.

1844년 카톨릭 주인 루체른주는 제주이트회(예수회)에게 종교교육을 담당하게 했다. 프로테스탄트들은 예수회를 혐오했고, 개신교도의 분노를 촉발했다. 1845년 베른의 한 프로테스탄트 장교는 의용군을 모집해 카톨릭의 본거지 루체른주를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이에 가톨릭 성향의 7개주가 존더분트(Sonderbund, 분리파)를 결성했다. 이어 1847년 여름에 스위스 의회의 다수파인 개혁주의 세력은 존더분트의 해체와 새 연방협정의 제정, 예수회의 추방을 지지했다.

카톨릭주와 프로테스탄트 주는 내전이 불가피함을 예견하고 서로 병력을 동원했다. 프로테스탄트 주는 10만의 병력을 모집했으며, 앙리 뒤푸르(Guillaume Henri Dufour)를 사령관으로 임영했다. 카톨릭 주는 8만명을 동원했다.

 

1847년 존더분트 전쟁 /위키피디아
1847년 존더분트 전쟁 /위키피디아

 

전투는 카톨릭 주의 병사들이 알프스 산악의 주요 도로를 점령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프로테스탄트 군이 1114일 프리부르를 점령하고 1123일 기슬리콘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1124일 존더분트의 본거지인 루체른에 진입하고 18471128일 발레를 진압했다. 1129일 존더분트의 마지막 병사가 항복했다. 이로써 양측 모두에서 100명 정도의 사망자를 낸채 전투는 끝났다.

존더분트 정부는 해체되었다. 이듬해 체결된 평화협정에서 존더분트에 가맹했던 7개 주가 전쟁 비용으로 600만 프랑을 배상하고, 중립을 지킨 아펜첼이너로덴 주와 뇌샤텔 주는 15,000프랑과 30만 프랑의 벌금을 물도록 했다. 1848년 스위스는 개별주의 독립을 억제하는 내용의 연방헌법을 채택했다. 아울러 예수회는 스위스에서 추방되고 선교활동도 금지되었다. 스위스는 헌법으로 특정종파를 금지하는 나라가 되었다. 예수회의 선교활동은 19735월에 헌법 개정을 통해 허용되었다.

 

1847년 스위스 내전의 한 장면(그림) /위키피디아
1847년 스위스 내전의 한 장면(그림)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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