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동제일경 삼척 죽서루, 국보로 승격
관동제일경 삼척 죽서루, 국보로 승격
  • 이인호 기자
  • 승인 2023.12.28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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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영남루도 국보 지정…대형누각으로서 뛰어난 경관적·학술적 가치 인정

 

문화재청은 국가지정문화유산 보물인 삼척 죽서루를 국보로 승격했다. 아울러 밀양 영남루도 국보로 올렸다.

 

삼척 죽서루 /문화재청
삼척 죽서루 /문화재청

 

삼척 죽서루는 고려 명종(11711197) 대에 활동하였던 김극기(金克己, 11481209)가 죽서루의 풍경을 시로 썼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적어도 12세기에는 창건되었으며, 안축(安軸, 1282~1348)과 정추(鄭樞, 1333~1382) 등의 시를 통해 처음에는 서루(西樓)’로 불리다가 14세기 후반에 들어서 죽서루(竹西樓)’로 불렸다.

김수온(金守溫, 14101481)죽서루단청기(竹西樓丹靑記)(1472), 허목(許穆, 15951682)죽서루기(竹西樓記)(1662) 등에서 ‘1403년 부사 김효손(金孝孫, 13731429)이 옛터에 새로 창건했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시대에 창건되었다가 조선 전기에 재건된 이후 여러 차례 보수, 증축된 기록이 잘 남아있으며, 조선 후기 증축된 이후의 모습이 현재까지 잘 보존되어 있다.

1403년 정면 5(측면 2)의 규모로 중창된 누정이었으나, 1530년 남쪽 한 칸(측면 3)이 증축되었고, 1788년 북쪽 한 칸(측면 2)이 증축되면서 현재와 같은 팔작지붕 형태가 되었다. 이처럼 조선 초기의 중앙 5칸과 조선 중기 이후 확장된 좌·우측 1칸은 기둥 배열, 가구의 짜임, 천장과 바닥면의 처리, 공포 및 세부 의장 등에서 각 시기별 건축적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죽서루의 절경을 표현한 정철의 관동별곡(關東別曲), 겸재 정선(鄭敾, 16761759)관동명승첩(關東名勝帖)을 비롯해 김홍도(金弘道, 1745?), 강세황(姜世晃, 17131791) 등 고려부터 조선시대까지 시인, 묵객 등 다양한 계층이 죽서루를 소재로 수많은 시문, 가사와 그림 등을 남겼다. 주변 하천인 오십천(五十川)과 어우러지는 빼어난 경관을 자랑한다.

 

밀양 영남루 /문화재청
밀양 영남루 /문화재청

 

밀양 영남루는 통일신라 때 세운 영남사(嶺南寺)라는 절에 있던 금벽루(金璧樓) 혹은 소루(小樓), 죽루(竹樓)라 불리는 작은 누각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고려 때 절은 폐사되고 누각만 남아 있던 것을 1365(공민왕 14)에 밀양군수 김주(金湊, 13391404)가 중창하고 영남루(嶺南樓)라고 칭한 것이 관영 누각으로서의 시작이다.

조선 초에 밀양부사 안질(安質, ?1447)이 영남루를 중창하면서 영남루 서쪽 주변에 소루(小樓)를 건축했고, 1442년 경상도사 권기(權技, ??)가 소루(召樓)로 명명하였으며, 그 후 부사 이충걸(李忠傑, 14651527)이 임경당(臨鏡堂, 현 침류각)으로 개명했다.

연산군 때에는 밀양부사 김영추(金永錘)가 임경당 반대쪽인 영남루 동북쪽에 망호당(望湖堂, 현 능파각)을 지으면서 빈객숙소로 이용했다. 임진왜란 때 객사와 함께 모든 부속 시설이 소실되었으나 1844년 이인재(李寅在)가 밀양부사로 재임할 당시 대루를 확장하면서 많은 부속건물을 지었고, 관원들과 지방 빈객들을 접대하는 객사로 사용했다.

경사지를 이용하여 건물을 적절히 배치한 영남루는 건물 자체의 조형미가 뛰어날 뿐만 아니라 주변 경관과 어우러진 모습은 다른 누정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빼어난 경관을 감상하면서 명사들이 수많은 시문을 남겨 조선 선조 때 영남루에 걸린 시판이 300여 개에 이르렀다고 하나 지금은 12개의 시판만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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