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채탕감…도덕적 해이인가, 건강한 회복인가
부채탕감…도덕적 해이인가, 건강한 회복인가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4.01.12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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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론의 개혁, 성경 희년제 등 부채탕감의 역사… 사회건전성, 도덕성 회복에 도움

 

채권자와 채무자의 관계는 인류 문명의 역사와 함께 해왔다. 돈은 인간을 노예로 만들었다. 채권자는 채무자에 대해 유·무형의 권력을 행사했고 채권자가 빚을 갚지 못할 경우 노예로 전락했다. 노예가 되는 것을 피하려 하면 감옥에 가거나, 농토를 버리고 유민이 되어야 했다.

부채 탕감은 그 해법의 하나로 제시되었다. 현대사회에서 부채 탕감은 모럴해저드(moral hazard)라고 비판받지만 이는 금융인들의 논리이고, 인류의 오랜 역사나 종교의 교리를 들여다보면 부채 탕감은 위기 수습 또는 도덕의 회복을 위해 정당회되었다.

 

채무 탕감의 대표적인 예가 고대 그리스 민주주의의 초석을 다진 솔론(Solon)이었다.

BC 594년 아테네 집정관 솔론은 광장에 나와 목판을 펼쳐들고 읽었다. 그 목판에는 부채탕감 법령이 새겨져 있었다. 솔론은 빚을 갚지 못해 노예가 된 사람을 자유의 몸으로 해방시켰다. 아울러 채무계약서는 모조리 폐지하고 저당 잡힌 토지는 본래 주인에게 되돌려 주었다. 빚 때문에 이웃 도시국가에 노예로 팔려간 시민들에게는 국가가 몸값을 지불하고 귀향을 도왔다.

솔론이 개혁을 단행한 이유는 하나였다. 헥테모로이(hektemoroi)라는 특수계급을 구제해 주어야 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헥테모로이는 신분은 자유민이지만, 귀족이나 부자에게서 땅을 빌려 경작하고 거둬들인 작물의 6분의5를 이자로 갚아야 하는 사실상 예속민이었다. 이들은 아무리 열심히 농사를 지어도 셍산물의 6분의1로 이자를 갚기는커녕 입에 풀칠도 하기 어려웠다. 결국 본인은 물론 가족까지 돈을 빌려준 귀족과 부자들의 노예가 되어야 했다.

고대 아테네는 서양문명의 발상지다. 화려한 문명의 이면에는 이런 어두움이 있었다. 자유민이 노예로 전락하면 병력을 충당하기 어려워지고 세금을 걷을 대상도 줄어들게 된다. 그렇다고 전쟁이 나면 귀족들이 군에 가거나 전비를 낼 턱이 없다. 솔론은 집정관이 된 후 헥테모로이의 채무탕감을 선언한 것이다.

역사가들은 이를 솧론의 개혁이라고 했다. 솔론의 개혁을 통해 아테네는 빠른 속도로 안정됐으며, 그리스에서 다른 도시국가에 대한 주도권을 행사하게 된다. 아테네의 민주주의가 정착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솔론은 가난한 자에게만 특별조치를 한 것이 아니다. 아테네 시민들을 소유한 재산에 따라 4개의 계급으로 나눠 계급에 따라 참정권의 정도를 나눠 줬다. 부자들은 부채탕감법으로 재산상 손해를 입었지만, 정치적 권리를 얻게 되었다. 솔론은 가난한 자들의 혁명을 막고, 타협을 통해 평화적으로 계층간의 타협과 화해를 유도한 것이다.

 

이슬람 삽화에 그려진 솔론과 제자들 /위키피디아
이슬람 삽화에 그려진 솔론과 제자들 /위키피디아

 

성경에도 일정기간이 지나면 부채 탕감을 해주어야 한다는 기록이 있다. ‘희년’(禧年, year of Jubilee) 제도다. 50년마다 돌아오는 희년에는 부채를 탕감해주어야 한다.

구약성서 레위기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너는 일곱 안식년을 계수할지니, 이는 칠년이 일곱 번인즉 안식년 일곱번 동안 곧 사십구년이라 칠월십일은 속죄일이니, 너는 나팔 소리를 내되 전국에서 크게 불지며 제 오십년을 거룩하게 하여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그 기업으로 돌아가며 각각 그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레위기 25:8-10)”

이 제도에 따르면 50년마다 돌아오는 희년을 맞으면 노예로 팔렸던 사람들은 노예에서 풀려나고, 조상의 재산을 저당 잡혔던 사람들은 재산을 돌려받았다.

 

가장 오래된 기록은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인들이다. 수메르인들이 유태인 전통을 받아들인 것 같다. 유대인 선조 아브라함은 지금 이라크 남부인 수메르 땅 우르에서 왔다.

BC 2400, 지금으로부터 4천년 전에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부채탕감 법령이 있었다. 수메르인들의 부채탕감법에는 많은 경우 그 전까지 있었던 모든 빚 관계를 무효화하고 차압한 토지를 원소유자에게 돌려주며, 노예의 신분으로 떨어진 가족들을 독립자영농민의 신분으로 복귀시켜주도록 했다.

중동에서는 유대인에 앞서 부채탕감 풍속이 시행되었다. 이슬람에서도 채무자들에게 유리한 전통이 있다. 이슬람에서는 고리대금업에 대해 엄격한 제한을 가하고, 채무자 보호를 위해 고리대금업뿐만 아니라 모든 돈 거래에 있어 이자 받는 것 자체를 근원적으로 금지하고 있다. 이는 채권자와 채무자의 갈등 구조에 채무자의 손을 영구적으로 들어주는 선언이라 할 수 있다.

 

레위인이 희년을 알리는 그림(1873년 삽회) /위키피디아
레위인이 희년을 알리는 그림(1873년 삽회) /위키피디아

 

현대에 들어와 부유한 서구 국가들이 가난한 나라의 부채를 탕감해주자는 주빌리(Jubilee 2000) 프로젝트가 있다. 1990년대 초반 영국의 마틴 덴트 교수와 윌리엄 피터스 전 외교관이 성공회와 연대하고, 록그룹 U2의 보노 등이 힘을 보태 대중적인 캠페인으로 번져가면서 세계 곳곳에서 다양한 외채 탕감 운동으로 확대되었다.

롤링 주빌리’(Rolling Jubilee) 프로젝트도 그 일환인데, 금융기관의 부실채권을 사서 소각해버리는 운동이다. 국내에도 롤링주빌리 운동을 전개하는 사회단체가 있다.

 

정부와 여당이 111일 당정협의회를 열어 자영업자·소상공인의 대출 연체 기록을 삭제하는 조치를 추진하기로 했다. 코로나 펜데믹으로 영업이 어려워 빌린 돈을 제때 못 갚아 신용도가 떨어진 자영업자들이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한다는 취지다. 이를 놓고 도덕적 해이를 조장한다는 일부 언론의 지적이 있다.

문재인 정부 초기인 2017년엔 장기연체자 123만명에 대해 부채를 완전 탕감해 준 적이 있다. 당시 정리한 부실채권의 규모는 약 22조원에 달했다. 관련보도에 찾아보면, 당시 최종구 금융위원장은 이 조치를 시행한지 1년후에 도덕적 해이가 심화될 것이라는 우려와 달리 장기소액채무 탕감 이후에도 건전한 신용질서가 유지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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