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포 장릉에 얽힌 사연들
김포 장릉에 얽힌 사연들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4.02.04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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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의 감시에 홧병이 들어 죽은 원종, 추존왕 승격의 정통성 시비 등…

 

김포골드라인 사우역 3번 출구를 빠져 나와 김포시청을 지나면 장릉(章陵)이 니온다. ‘파주 장릉’(長陵)과의 혼선을 피하기 위해 흔히 김포 장릉이라고 부른다. 주소는 경기도 김포시 장릉로 79번지다.

김포 장릉은 추존왕 원종과 비 인헌왕후 구씨의 능이다. 추존왕은 살아서 왕이 아니었지만 아들이 임금이 되어 사후에 왕으로 승격된 사람을 말하며, 부인도 왕후로 승격된다.

원종(元宗)은 선조와 후궁 인빈김씨 사이에 태어났으며, 정원군(定遠君)으로 봉해졌다. 선조에게는 다섯째 아들이고, 인빈 김씨에게는 셋째아들이었다.

어머니 인빈 김씨는 선조가 가장 총애했던 후궁이었다. 선조의 정비 의인왕후 박씨가 아이를 낳지 못하자 후궁들의 경쟁심리가 발동했다. 공빈 김씨가 임해군과 광해군을 낳았고, 인빈 김씨는 선조의 사랑을 독점하며 왕자 넷과 옹주 다섯을 두며 위세가 당당했다. 인빈 김씨는 자신의 노비들이 행패를 부리다가 서헌부 서리에게 체포되자 오히려 선조에게 일러 서헌부 서리들을 의금부에 가두도록 할 정도였다.

 

홍살문에서 바라본 장릉 /박차영
홍살문에서 바라본 장릉 /박차영

 

그런데 선조 다음 왕위는 공빈김씨의 아들 광해군에게 돌아갔다. 광해군은 암금이 되고 나서 역모사건이 일어나자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폐모한 후 서궁에 유폐했다. 광해군은 인빈 김씨의 자식들도 견제했다. 정원군은 숨을 죽이며 근신했지만 그의 셋째 아들 능창군이 역모에 연루되어 죽었다.

정원군은 그후 홧병을 얻었고, 그후 연일 술을 마셨다. 그는 1619년에 나이 40살에 세상을 떠났다. 광해군일기 11(1619) 1229일조에 정원군에 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광해군)이 왕위에 올라 골육을 해치고는 더욱 대왕을 꺼렸다. 능창대군(綾昌大君)을 죽이고는 그 집을 빼앗아 궁으로 만들고, 인빈(仁嬪, 정원군의 모친)의 장지(葬地)가 매우 길하다는 말을 듣고는 늘 사람을 시켜 엿보게 해서 죄에 얽어 해하고자 하였다. 이에 대왕(정원군)은 걱정과 답답한 심정으로 지내느라 술을 많이 마셔서 병까지 들었다. 그는 늘 말하기를 "나는 해가 뜨면 간밤에 무사하게 지낸 것을 알겠고 날이 저물면 오늘이 다행히 지나간 것을 알겠다. 오직 바라는 것은 일찍 집의 창문 아래에서 죽어 지하의 선왕을 따라가는 것일 뿐이다." 하였는데, 훙할 때의 나이가 40세였다. (광해군)이 그 장기(葬期)를 재촉하고 사람을 시켜 조객을 기찰하게 하였다.”

정원군은 하루하루 살얼음판처럼 지내다가 술에 쩔어 숨졌다. 정원군이 죽자 광해군은 누가 조문을 왔는지를 감시케 하고 장례일정을 단축시키라고 지시했다고 조선왕조실록은 적었다.

 

장릉 정자각 /박차영
장릉 정자각 /박차영

 

광해군 집권 15년차 되던 1623년 김류·이귀 등 서인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원군의 맏아들인 능양군을 임금으로 모시니, 그가 인조다. 세상이 바뀌자 죽은 정원군은 아들 덕분에 바로 대원군으로 승격되었다.

아들은 아버지를 추존왕으로 모시고 싶었다. 하지만 인조는 할아버지 선조의 아들로 왕위에 올랐는데, 생부를 왕으로 하는 것은 인조 자신의 정통성에 문제가 되었다. 인조는 임금이 되고 나서부터 아버지를 왕으로 추존하려고 했으나, 대신들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하다가 재위 10년 만에 아버지를 왕으로 추존했다. 이 과정에서 정통성을 바꾸었다. 자신을 선조의 손자로 돌리고, 아버지를 제자리에 옮긴 것이다. 즉 선조(祖父)-원종()-인조로 정통성의 문제를 정리했다.

 

장릉 비각 /박차영
장릉 비각 /박차영

 

정원군(원종)의 첫 무덤은 양주 곡촌리(현 남양주시 금곡동)였다. 어머니 연주군부인은 인조가 왕위에 오른 후인 1626(인조 4)에 세상을 떠나 김포 성산에 묻혔다. 아들이 임금이었기 때문에 격식에 따라 어머니 무덤은 육경원(毓慶園), 아버지 무덤은 흥경원(興慶園)이라 올려 불렀다. 조선시대에 왕의 부모의 무덤을 으로 정한 최초의 사례다. 이후 1627(인조 5) 흥경원과 육경원을 현재의 김포로 옮겼다. 1632(인조 10) 정원대원군이 원종으로, 어머니가 인헌왕후(仁獻王后)로 추존되면서 능의 이름을 장릉이라 했고, 왕릉 제도에 맞게 무석인, 석마, 석양과 석호 등을 추가로 세웠다.

 

쌍릉 형태의 장릉(왼쪽이 원종) /박차영
쌍릉 형태의 장릉(왼쪽이 원종) /박차영

 

왕릉과 왕비릉이 나란히 있는 쌍릉으로, 병풍석이나 난간석은 설치하지 않고 보호석만 둘렀다. 무덤 아래에는 영조 29(1753)에 세운 조선국원종대왕장릉 인헌왕후부좌(朝鮮國元宗大王章陵 仁獻王后)’라고 새긴 비각이 있다.

재실 옆 연지(蓮池)는 현재 조선왕릉에 남아있는 연지 중 그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장릉의 작은 저수지 원지 /박차영
장릉의 작은 저수지 원지 /박차영

 

최근 장릉 건너편 인천 검단신도시에 아파트를 짓는 건설회사들이 문화재청의 공사중지 명령에 불복해 낸 소송에서 연이어 승소하면서 조만간 아파트단지가 지어질 전망이다. 이른바 왕릉뷰 아파트.

 

장릉 아래의 큰 저수지 /박차영
장릉 아래의 큰 저수지 /박차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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