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갖 수난의 인조가 묻힌 파주 장릉
온갖 수난의 인조가 묻힌 파주 장릉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4.02.07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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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을 사이에 두고 김포 장릉과 마주보는 형세…인열왕후와 합장릉

 

파주 장릉(長陵)은 조선 16대 인조와 첫번째 왕비 인열왕후 한씨의 합장릉이다. 때마침 전날 눈이 많이 내려 무덤 주위엔 하얗게 변해 있었다. 처음엔 왜 무덤이 하나밖에 없을까, 궁금했는데 설명문을 자세히 읽어보니 부부가 하나의 무덤에 합장했다고 한다.

인조는 왕이 될 서열이 아니었다. 아버지 정원군(定遠君)은 선조의 다섯 번째 아들이었다. 인조는 정원군의 장남으로 임진왜란 중인 1595년 황해도 해주에서 피란중에 태어나 능양군에 봉해졌다. 광해군이 왕이 되어 아버지 정원군을 견제했고, 정원군의 셋째 아들이자 능양군의 동생인 능창군이 역모로 주살되었다. 정원군은 홧병이 나 술만 마시다가 161940세에 세상을 떠났다.

능양군이 왕이 된 것은 광해군 재위 15년째인 1623, 쿠데타(반정)을 일으킨 서인 김류 이귀 이괄 등의 추대를 받았기 때문이다. 광해군은 축출되어 강화도로 유폐되었고, 능양군은 임금이 되고, 부인 한씨는 인열왕후가 되었다. 아버지 정원군은 원종으로 추존되었다.

 

파주 장릉 입구 /박차영
파주 장릉 입구 /박차영

 

인열왕후는 인조와의 사이에 61녀를 낳았으며, 소현세자, 효종, 안평대군, 용성대군 등이다. 왕후는 1635년 아이를 낳은 후 창경궁 산실청에서 42세로 세상을 떠났다.

인조는 첫 번째 부인 인열왕후가 먼저 세상을 떠나자 파주 운천리에 무덤을 만들고, 그 옆에 자신이 묻힐 자리를 미리 만들어 두었다. 1649년 인조가 세상을 떠나자 인열왕후 옆에 쌍릉의 형태로 장릉이 조성되었다. 그런데 운천리의 능이 풍수상 불길하고, 화재가 자주 일어나며 뱀과 전갈이 무리를 이루며 출몰했다. 이에 영조 7(1731)에 지금의 파주 탄현으로 자리로 옮겼다.

 

파주 장릉 능침 /박차영
파주 장릉 능침 /박차영

 

인조는 재위 26년간(1623~1649) 많은 시련을 겪었다. 재위 초기 명나라가 책봉을 미루어 곤욕을 치렀고, 반정공신 이괄이 반란을 일으켰다. 정묘·병자호란을 겪었고, 삼전도에서 청 황제 홍타이지에게 삼궤구고두의 예를 취해야 했다. 세자와 봉림대군(효종)을 청나라에 인질로 보내야 했다. 그는 164955세로 세상을 떠났다.

후세인들은 종묘에 그를 인조(仁祖)라는 묘호를 올렸다. 하지만 그는 백성에게 어진 임금은 아니었다. 그는 무능했고, 국제정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인조의 능이 청군이 남하하는 길목에 위치한 것이 특이하다. 그의 부친인 추존왕 원종(정원군)의 무덤인 김포 장릉(章陵)은 한강 건너편에 있다. 한강을 가운데 두고 부자가 서로 마주보는 형세다.

 

장릉 능침과 석물 /문화재청
장릉 능침과 석물 /문화재청

 

장릉 능침의 석물은 옛 장릉의 석물과 새로 만든 석물이 혼재되어 있다고 한다. 병풍석 일부(인석), 난간석 일부, 석상(혼유석) 2, 장명등, 망주석, 문석인, 무석인, 석양, 석양, 석호 등은 옛 석물이며, 그 외 병풍석과 난간석은 새로 만든 것이다.

능의 구조는 단조롭다. 능침 아래에는 정자각, 비각, 수복방, 수라간이 있고 홍살문부터 정자각까지 이어진 향로와 어로 양옆에는 제향 때 제관이 걷는 변로(邊路)가 있다. 장명등에도 모란무늬와 연꽃무늬가 새겨 있는데 이는 17세기 석물문양의 특징을 보여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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