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보기 드문 신라유적, 세검정 당간지주
서울에 보기 드문 신라유적, 세검정 당간지주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4.02.08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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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추 설화가 배경, 고려·조선에도 중시된 절터…한때 묻혔다가 일제 때 발견

 

서울에 남아 있는 신라시대 유적은 드물다. 따라서 서울시내에서 신라 유적을 만난다는 것은 매우 반가운 일이다. 서울 종로구 신영동 세검정초등학교에 있는 장의사지 당간지주(莊義寺址 幢竿支柱)가 바로 그것이다. 1963년에 보물 235호로 지정되었다.

서울 종로구 부암동을 지나면 그 북쪽에 홍제천이 흐른다. 조선시대에 병사들이 칼을 갈았다는 세검정에서 대로를 따라 북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세검정초등학교가 나온다. 정문에서 등록을 하면 출입증을 주는데, 수위 아저씨는 친절하게 당간지주의 위치를 가르쳐준다. 초등학교 운동장 한쪽 구석에 돌기둥 두 개가 우뚝 서 있는 것을 볼수 있다.

 

서울 종로구 신영동 장의사지 당간지주 /박차영
서울 종로구 신영동 장의사지 당간지주 /박차영

 

당간지주는 사찰 입구에 세워두는 것으로, 절에서는 행사나 의식이 있을 때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 기둥이다. 깃발을 걸어두는 길쭉한 장대를 당간(幢竿)이라 하며,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높이 3.63m. 두 돌기둥은 동서로 마주 서 있는데, 간주를 받던 간대(竿臺)나 받침돌이 남아 있지 않아 원래의 모습을 추정할 수는 없다.

안쪽면에는 아무런 조각이 없고 바깥면이나 옆면에도 다듬어 꾸민 흔적이 없다. 다만 바깥면의 각 변마다 모서리를 깎은 약간의 의장(意匠)만 보일 뿐이다. 정상 부분은 꼭대기가 대체로 평평하지만, 안쪽면 꼭대기에서 바깥면으로 16정도는 활모양을 그리며 깎였다.

당간을 단단히 고정시키기 위해 안쪽 면 윗부분 가까이에 둥근 구멍을 뚫어 놓았다. 대개의 경우 당간을 꽂기 위한 장치를 하더라도 기둥머리에 따로 홈을 내는 것이 보통인데, 여기에서는 그 유례를 따르지 않았다. 별다른 가공을 가하지 않은 매우 소박한 모습이다. 세워진 시기는 확실치 않으나, 다른 당간지주와 비교해 볼 때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추측된다.

 

이곳 당간지주는 오랫동안 땅속에 묻혀 있었다. 법보신문에 따르면, 19302월 조선총독부 촉탁 가토간카쿠(加等灌覺)와 경성부사 편찬주임 오카다미츠구(岡田貢) 두 사람이 발견했다. 당시 조선일보는 창의문 밖에서 세검정을 지나 북한산을 향하여 약 10(1km) 되는 구기리 80번지에서 비면이 없어 누구의 비인지는 알 수 없으나 신라시대의 큰 절이었던 장의사의 유적과 가깝고라고 썼다.

 

서울 종로구 신영동 장의사지 당간지주 /박차영
서울 종로구 신영동 장의사지 당간지주 /박차영

 

장의사는 신라 김춘추가 왕(무열왕)이 되어 당군이 오길 기다리는데 이를 알려준 귀신의 이야기에서 기원한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그 스토리가 동시에 등장한다.

삼국사기 본기 무열왕조임금이 당나라에 병사를 요청했으나 소식이 없어 근심하고 있었는데, 홀연히 이미 죽은 신하 장춘(長春)과 파랑(罷郞)이 나타나 말했다. ”저희는 비록 죽어 백골이 되었으나 여전히 나라에 보은할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제 당나라에 가서 황제가 대장군 소정방 등에게 명하여 병사를 거느리고 내년 5월에 백제를 정벌하도록 한 것을 알았습니다. 대왕께서 너무나도 심히 애태우며 기다리시는 까닭에 이렇게 알려드리러 왔습니다.” 임금이 매우 놀랍고도 신기하게 여겨 두 집안의 자손에게 후하게 상을 내리고 한산주(漢山州)에 장의사(莊義寺)를 세워 명복을 빌게 했다.

삼국유사 장춘랑과 파랑 조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온다.

절의 이름에 대해 삼국사기엔 莊義寺, 삼국유사엔 壯義寺로 표기되고,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엔 藏義寺라 기록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莊義寺, 壯義寺. 藏義寺 등 다양하게 표기되었다. 최근 ()수도문물연구원이 인근 주택신축부지를 발굴하던 중에 莊義寺라는 절 이름이 새겨진 기와 조각이 발견하고는 莊義寺로 통일되었다.

장의사는 고려시대에는 예종·인종·의종 등이 남경(서울)을 행차할 때 들렀던 곳이다. 조선시대에도 궁궐에서 가까웠기 때문에 중요한 절이었다. 태조가 신의왕후 기제를 이곳에서 올렸고, 태종도 이곳에서 태조 기신제를 올렸다. 성종까지 왕실의 중요한 제사를 이곳에서 올렸다 또한 세종, 문종, 세조, 성종 때 장의사는 문신관료들에게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도록 한 절이었다.

장의사가 있던 계곡은 예나 지금이나 경치가 좋은 곳으로 이름 난 곳이었다. 북한산에서 발원한 홍제천이 굽이쳐 골짜기를 이루고, 강 바닥의 바위는 넓적하고 매끈하다. 화가들은 이곳에서 그림을 그렸고, 문인들은 시를 남겼다.

연산군에게도 이곳이 놀기 좋았던 모양이다. 1506(연산군 12) 연산군이 일대를 노는(遊宴) 장소로 삼기 위해 절을 헐고 화계(花階)를 만들어 꽃을 심게 하면서 폐사되었다. 인조는 이괄의 난 이후 이곳에 총융청(總戎廳)을 세웠다. 도로변에 총융청 표지판이 서 있다.

인근 부암동의 창의문(彰義門)의 이름도 여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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