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시아의 마타하리, 리멍
말레이시아의 마타하리, 리멍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4.02.09 13:46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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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공산당 수뇌부 여성…말레이 정치인들의 청원으로 감형 후 중국에서 사망

 

말레이반도가 베트남보다 먼저 공산화되었을수도 있었다. 1950년대초 공산주의자로 구성된 말라야인민해방군(MPLA)의 숫자가 4,000명에 이르렀고, 그들은 열대 밀림 속에 들어가 진지를 구축했다. 영국군은 1950년대 중반에 말라야 인구의 10%에 해당하는 50만명의 농촌주민을 소개시켜 신촌(New Villages)에 이주시켰다. 이 전략은 주효했다. 주민과 게릴라가 분리됨으로써 말라야 공산세력은 소멸의 길을 걷게 되었다.

말라야 공산세력은 주로 중국계였다. 일본이 말라야를 지배했을 때 중국계 수만명을 이유 없이 죽였기 때문에 그들은 밀림으로 들어가 정착했고, 일부는 항일무장투쟁을 벌였다. 영국은 2차대전 기간 중엔 이들을 이용했지만, 전쟁이 끝나 다시 지배자로 돌아왔을 땐 이들을 탄압했다. 전후 다시 편성된 인민해방군 10개 연대 가운데 9개가 중국계 부대였고, 나머지 하나가 말레이계와 인도계의 혼성부대였을 정도로 말레이 공산당은 중국계에 의해 주도되었다.

 

리멍 /위키피디아
리멍 /위키피디아

 

말레이 공산반군 가운데 리멍(李明, 1926~2012)이라는 여성이 있다. 영어로 Lee Meng 또는 Lee Min로 표기한다. 그녀는 말레이의 마타하리로 불린다. 마타하리는 1차 대전과 2차 대전 사이에 독일과 프랑스를 오가며 스파이 화동을 한 여성으로, 자바섬의 공주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다.

리멍은 1926년 중국 광둥에서 태어나 다섯 살에 아버지를 따라 영국령 말레이 북부 페락주의 이포(Ipoh)라는 곳으로 이사를 왔다. 어려서 이름은 리텐타이(李天泰)였다. 1942년 열여섯 나이에 공산당에 가입했다. 곧바로 일본군이 말레이반도를 점령하자, 그녀는 항일운동을 펼쳤다. 그는 페락 일대 공산당의 총책임자로서 능수능란하게 전투를 수행하고 조직을 관리했다고 한다. 리멍은 페락의 공산당 테러조직이었던 케파양 갱(Kepayang Gang)의 두목이었다.

 

2차 대전이 끝나 영국군이 돌아왔으나, 이내 공산당과 갈등관계로 전환했다. 공산당은 계급투쟁을 벌이면서 지주들을 살해했고, 영국은 1948616일 비상조치를 선포했다.

리멍은 잠시 중국어 선생 일을 했으나, 곧바로 투쟁 대열에 뛰어들었다. 그녀는 잔혹한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녀와 함께 일한 사람들의 진술에 따르면 그녀는 공산당의 상위 수뇌부 멤버로서 살인 명단을 작성할 소수그룹에 포함되었고, 그녀가 찍은 인물들은 게릴라들에 살해되었다.

그녀는 말라야공산당(MCP) 당수 진펑(陳平)의 명령을 전국의 하부조직에 전달하는 역할을 부여받았다. 리멍은 연락책으로서 페락에서 셀랑고르, 파항, 페낭, 멀리 싱가포르까지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그녀의 연락망은 주로 소녀나 할머니 등의 여성으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이린 리(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와 경찰 동료들 /BiblioAsia
이린 리(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와 경찰 동료들 /BiblioAsia

 

영국 경찰은 그녀에게 살인 혐의를 두었으나 확실한 증거를 잡지 못한데다 어디에 숨어 있는지를 몰라 체포하지 못했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리멍은 영국의 끈질긴 수사망에 마침내 체포되었다.

리멍의 반대 편엔 또다른 중국계 여성 이린 리(Irene Lee)가 있었다. 그녀의 남편 지미 로크는 경찰이었는데 19514월 페낭에서 공산주의자가 쏜 총탄에 희생당했다. 남편이 사망한 후 그녀는 경찰에 들어가 쿠알라룸푸르의 특수부본부에 근무했다.

꼬리는 우연히 발견되었다. 19522월 경찰이 셀랑고르의 한 게릴라 아지트를 급습했다. 그곳에서 수집된 증거품에서 아슈(Ah Shu)라는 여성의 이름이 포착되었다. 이 여자는 싱가포르 공산당 핵심인사의 부인이었는데 싱가포르와 조호르 사이를 연결하는 조직책이라는 감이 왔다.

특수부는 이린 리를 싱가포르에 파견했다. 이린 리는 아슈를 급습해 체포하고 거래를 시도했다. 아슈가 거래에 응했고, 조호르의 연락책을 불었다. 조호르의 연락책을 맡은 여성도 아슈와 마찬가지로 그 다음 접선 상대를 불었다. 이렇게 점조직을 하나씩 역추적하며 마지막 리멍에게로 접근했다. 1952724일 저녁 8, 이린 리가 이끄는 요원들은 리멍이 살고 있는 페락의 이포의 집을 노크했고, 무방비 상태에 있던 리멍을 체포했다. 그녀의 집에서 수류탄이 나왔다.

 

법정에서 그녀는 리멍이 아니고, 리텐타이이며, 수류탄은 모르는 일이고, 밀림에서 활동한 적도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몇몇 공산게릴라 수감자들이 그녀가 리멍이며, 수류탄을 가진 것을 보았으며, 말라야공산당 지도자라는 사실을 증언했다. 1심에선 무죄 판결이 났으나, 2심에서 유죄가 인정되어 사형이 언도되었다.

리멍은 감옥에서 남자 간수를 유혹해 임신을 시도했다. 영국 법은 임신한 여성을 사형시키지 못하도록 규정했다. 당국이 이를 알고 여성 간수로 교체해 버렸다. 그녀는 영국령 말레이 대법원에 상고했으나 사형이 유지되었다.

 

2007년 80세에 말레이시아를 방문하는 리멍 /BiblioAsia
2007년 80세에 말레이시아를 방문하는 리멍 /BiblioAsia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에 리멍 사건은 국제적인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냉전이 격화되던 시절이었다. 공산국가인 헝가리가 간첩 혐의로 체포되어 13년형을 받은 영국인 에드가 샌더스와 리멍을 교환하자고 영국 정부에 제의했다. 윈스턴 처칠 총리는 거부했다. 하지만 말라야 의회 의원 50명이 그녀의 구명을 청원하고, 페락의 술탄이 그녀를 용서해 줄 것을 영국 정부에 요청했다. 공산주의에 강경했던 처칠도 현지 정치인들의 청원을 무시할수 없었다. 영국 정부는 리멍에 대한 형량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했다.

말레이시아 정부는 독립한 후 1964년에 리멍을 중국으로 송환했다. 페락주 타이핑 감옥에서 11년째 수감되었던 리멍은 중국 광둥에서 자유로운 삶을 살았다. 광둥에는 어머니가 살아 있었다. 그녀는 어머니를 돌보았으며, 1965년엔 또다른 말레이 공산주의자로 중국에 송환된 첸티엔(陳田)과 결혼했다. 남편은 1990년에 먼저 사망했다.

리멍은 20078월에 말레시아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그녀를 도와준 변호사에게 생전에 감사를 표시하기 위해서였다. 201262일 리멍은 광저우에서 8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참고한 자료>

BiblioAsia, Hunting Down the Malayan Mata Hari 

Wikipedia, Lee Me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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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우빈 2024-02-10 00:44:48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