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 ‘건국전쟁’이 알려준 새로운 사실
다큐 ‘건국전쟁’이 알려준 새로운 사실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4.02.18 11: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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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일깨우고, 김구의 오류 소개

 

영화가 끝나고 관객들이 박수를 치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다큐멘터리 건국전쟁이 끝나고 가벼운 박수가 나왔다. 내가 보았을 때만 그랬나 의아해 했으나, 이 다큐에 박수를 치더라는 후기가 인터넷에서 있었다. 왜 박수를 쳤을까. 다큐멘터리는 그다지 수작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관객들로 하여금 뭔가를 느끼게 했다. 그 박수는 그동안 몰랐던 내용을 많이 알게 되었고, 잘못 인식하고 있었던 대한민국 초대 이승만 대통령을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다는 감탄의 표현이 아니었을까.

상영이 끝나고 불이 켜졌을 때 의외로 젊은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이 주제가 나이 든 사람들, 보수층만의 이슈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했다.

 

다큐 포스터 /네이버영화
다큐 포스터 /네이버영화

 

이승만은 공과가 뚜렷한 인물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를 독재자, 친일파, 살인마, 미국의 꼭두각시 등등으로 표현한다. 19603·15 부정선거로 4·19혁명이 일어나고, 그는 그 모든 책임을 떠안고 대통령직에서 하야했다. 분명 그의 과오였다. 100가지 공이 있어도 하나의 잘못이 있으면, 사람들은 그 잘못으로 인해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덧씌우기 마련이다. 이승만이 그런 인물이었다. 그가 1890년대말 독립협회 활동을 하다가 투옥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며, 고종의 밀사 자격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펼쳤고, 상해 임시정부의 수반으로 활동한 사실은 오랫동안 잊혀졌다.

해방이 되어 귀국하고 1948년 건국하기까지의 과정에 그는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했다. 이 대목에서도 여지껏 많은 사람들이 오해를 쏟아냈다. 통일할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전쟁을 막을수 있었는데 이승만이 단독정부를 강행하는 바람에 비극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다큐는 이 대목에서 왜 이승만이 그런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는지를 객관적 자료를 제시하며 설득했다.

 

‘김구·유어만 대화 비망록’(캡쳐) /이승만학당
‘김구·유어만 대화 비망록’(캡쳐) /이승만학당

 

다큐에 소개된 내용 중 놀라운 사실이 김구-유어만의 비망록이다. 유어만(劉馭萬)은 당시 주한중국공사였는데, 국민당 장제스 총통의 대리인이었다. 1948711일 유어만이 경교장에서 김구를 만나 나눈 대화가 극비문서에서 풀렸다. 당시 김구는 평양을 방문, 김일성이 주도하는 2차 남북지도자협의회에 참석하고 돌아온 후였고, 유어만은 김구에게 이승만과 협조하라는 장제스의 권유를 전했다.

다큐는 비망록에 나오는 김구의 발언을 소개했다. “내가 남북지도자회의에 갔던 동기의 하나는 북한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알아보기 위해서였습니다. 비록 공산주의자들이 앞으로 3년 동안 북한군의 확장을 중지하고, 그동안 남한에서 모든 노력을 기울이더라도 공산군의 현재 수준에 대응할만한 병력을 건설하기란 불가능합니다. 소련인들은 비난받지 않고 아주 손쉽게 그 병력을 남한으로 투입시켜 한순간에 여기에서 정부를 수립되고 인민공화국을 선포할 것입니다.”

김구는 북한군이 소련의 지원을 받아 남한을 무너뜨릴 것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와 김규식 등은 평양회담에 참석한후 공동성명(430)에서 남북지도자는 우리 강토에서 외국 군대가 철거한 이후에 내전이 발생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발표했다. (자유일보)

유어만 비망록은 김구에 대한 만들어진 환상을 깨어 버렸다. 남북협상파는 위선적이었다. 이 환상은 이승만을 분단의 원흉으로 만들었고, 상대적으로 김구를 그 반대편에 세웠다.

 

6·25 발발 직후 한강다리 폭파와 관련한 저간의 루머를 불식시킨 내용도 새로웠다. 그동안 아무도 그 루머를 바로 잡으려 하지 않았다. 대통령은 혼자 도망가고 피난 행렬이 지나가는데도 다리를 폭파하라고 명령했다는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는데 70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4·19 이후 이승만은 부정적 인물로 그려졌다. 그후 어느 정권도 이승만에 대한 인식을 바로 잡으려 하지 않았다. 우파 정권도 이승만의 인식을 바로 잡길 꺼렸고, 좌파 정권은 이승만을 부정하고 김구를 추앙했다. 김구도 뜨겁게 민족운동을 한 지도자다. 하지만 김구를 이승만 지우기의 대타로 부상시킨 것은 오히려 그에게 욕이 될 것이다.

 

다큐를 제작한 김덕영 감독은 연합뉴스 인터뷰에서 "그동안 이승만 대통령의 어두운 면, 잘못된 면만 부각하고, 심지어는 '살인자''독재자'의 이미지로 덧칠하지 않았나"라며 "그걸 조금이라도 바꾸는 게 내 소망"이라고 했다. 84학번으로, 전형적인 586세대라는 김 감독은 "나 역시 대학을 나오고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면서도 그렇게 오랫동안 이승만이 누군지 몰랐던 데 대한 철저한 자기반성이 영화에 담겨 있다"고 말했다.

이승만(李承晚)1875326일 황해도 평산군 마산면 대경리 능내동에서 아버지 이경선과 어머니 김말란 사이에 32녀 중 막내로 출생했다. 이승만은 하와이에 망명한 후 1965719일 하와이 마우날라니 요양원에서 심장병으로 서거했다. 향년 90세였다.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 이승만의 공식 사진 /위키백과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 이승만의 공식 사진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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