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목적 반일주의 비판한 박훈 ‘위험한 일본책’
맹목적 반일주의 비판한 박훈 ‘위험한 일본책’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4.02.19 12: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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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비판은 뼈 때리는 비판이 되어야 한다…불편한 진실도 직시해야”

 

박훈 교수는 저서 위험한 일본책’(2023, 어크로스)에서 반일주의를 강한 톤으로 비난한다.

한국의 민족주의가 일치하는 지점이 있다. 바로 반일(反日)이다. 민족의 형성기에 일제 식민지로 떨어졌으니 당연한 일이다. 식민지가 된지 110년이 넘었고 해방된지 8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반일민족주의는 약해지기는커녕 더 기세를 떨치고 있다. 내가 우려하는 것은 많은 반일 담론이 과학·학문적 근거에, 심지어는 건전한 상식에 기초하지 않는 경우가 너무 많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런 말들이 시정(市井)이나 사담의 수준을 벗어나 언론·교과서·교양서 등 공공 영역에서 태연하게 유통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른바 반일무죄.” (프롤로그 p7)

박훈은 책의 머리에서 반일주의자가 듣기에 불편한 말을 계속 쏟아낸다.

사실 한국인만큼 일본을 비판할 능력과 자격을 갖춘 사람들도 드물 것이다. 일본에 오랜 기간 고초를 겪었고 일본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판을 위한 비판이 되어서는 안된다. 피해의식에 기초한 일본 비난은 많은 사람을 장기간에 걸쳐 설득하는데 한계가 있다. 민족주의가 아니라, 자유와 민주, 법치와 인권, 평화와 복지의 세상을 여는 담론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p8)

남들이 꺼려하는 일본 유학을 다녀온 그는 그렇다고 일본을 마냥 두둔하지 않는다. 다만 한일관계를 냉정하고 객관적인 눈으로 보려고 무던히도 애쓴 흔적이 드러난다. 또다시 구한말처럼 되지 말자는 주장이기도 하다. 무조건적 반일이 어떤 오해와 오류를 낳는지, 박 교수는 날카롭게 지적한다.

 

박훈 교수는 프롤로그에서 제시한 문제의식을 3부 콤플렉스를 넘어서 미래로- 일본을 다루는 법에서 해답을 제시하려 한다. 그는 민족주의가 맹목적으로 과잉된다면 민족에 해가 될 수 있는데, 어쩌면 우리는 지금 그 단계에 와 있는지 모른다고 했다. 저자는 식민지배의 역사에 대해 비판할 것은 비판하더라도 무조건적인 일본 악마화는 지적 나태, 과장, 은폐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박훈 교수는 일본 비판이 뼈 때리는 비판이 되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단순화를 거부하고 불편한 진실도 직시해야 한다. 안중근에게 사살된 이토 히로부미만이 아니라 근대 일본을 디자인하고 실행한 이토 히로부미도 알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는 출판사 유튜브를 통해 자신의 책이 더 이상 위험책이 아니라, 한국 시민의 일반 상식이 되는 책이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책 표지 /출판사
책 표지 /출판사

 

이 책의 주요 내용을 모아둔다.

한반도는 역사상 1,000번에 가까운 외침을 받았다고 한다. 그에 비해 일본은 놀랍게도 딱 두 번이다. 한번은 13세기 북규슈를 침공했다 실패한 몽골군이고 또한번은 태펴양ㅇ전쟁 때의 미군이다. 한반도와 일본열도는 지척거리에 있지만 그 지정학적 조건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큰 자연재해가 없는 한반도는 지질학적으로는 천국, 지정학적으로는 지옥이며, 일본은 그 반대다. (p50~51)

(메이지유신의) 변혁의 폭은 혁명에 버금갔다. 변혁을 주도한 사무라이는 맹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사무라이 신분 자체를 없애버렸다. 수백년간 내려온 번()도 일거에 철폐했다. 농업국가였던 일본은 반세기 안에 세계 유수의 공업국이 되었다. 1987년 이후 한국 현대사는 혁명보다는 유신에 가깝다. 변화를 밀어붙인 혁심 세력은 반체제가 아니라 체제 내 비주류세력이었다. 586 세대는 너무 많은 것을 너무 오랫동안 누리고 있다는 것을 칼바람 맞듯, 직시해야 한다. (p74~75)

한국사람들은 1876년 강화도 조약이 매우 불평등한 것이며, 여기부터 일본의 침략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실상은 꽤 다르다. 당시 일본은 조선 정벌을 단행할 능력도 위치도 갖고 있지 않았다. 또 일본 국내의 긴박한 정세로 볼 때 빈손으로 돌아갈수도 없었다. 따라서 이들은 강샬 일변도로 나설수만 없었다. 조선 개화파는 필사적으로 자강을 달성해야 했다. 100년후 그들의 후손들은 그들 못지 않은 악조건 하에서도 자강을 달성하지 않았는가. 그들이 자강 조선을 만들었다면 일본으로 하여금 욕심 내다가도 멈칫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p104~106)

일본은 동화정책을 표방하면서도 끝내 조선인들에게 투표권과 입대를 허용하지 않았다.(태평양전쟁 때 위기에 몰리자 약간 변화) 투표권이 생기면 인구가 많은 조선에서 일본 의회의 3분의1을 차지하는 조선인 의원들이 나올 것이며, 이들이 조선당을 만들어 캐스팅보트를 행사하면 큰일이라고 거부했다. 군대 문제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인에게 총을 쥐어준다? 그 총구가 앞만 향하리라고 장담할수 없다며 꽁무니를 뺐다. (p126~127)

일본은 오랜만에 다시 한번 요술방망이를 손에 넣었다. 산업혁명과 서양식 근대다. 1870년대말부터 시작한 산업혁명은 약 15년 후 일본을 군사강국으로 만들었다. 동시에 사상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다. 늘 동아시아의 패자였던 중국이 역사상 가장 약체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아편전쟁부터 공산당 정권 성립까지 100년 동안에 중국은 역사상 가장 허약했고, 일본은 가장 강력했다. 이 사상 초유의 사태가 일본의 제국주의를 가능케 한 것이며, 그것은 불행하도 지금 우리의 바로 앞 세대에 일어난 일이다. 이 사실이 일본에 대한 과대평가, 과민반응, 허장성세 등 모순이 가득찬 대일 자세와 심정의 배경을 이루고 있다. (p253~255)

반일주의 세례를 받고 자란 586이 우리 사회의 주류를 장악하면서 격렬한 반일 의식이 숨김없이 드러나고 잇다. 하지만 이영훈 교수팀이 쓴 반일 종족주의라는 책은 거의 완벽에 가깝게 반일을 부정하고 있음에도 수출규제와 반일 보이콧이 맞물린 시기에 10만여부가 팔려나가는 기현상을 보였다. 이는 너무도 격렬하고 일도양단식인 586의 반일 역사 양식에 뭔거 미심쩍어하는 시민들이 상당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하다. (p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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