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에 왕국 세우려 한 중국해적 임봉
필리핀에 왕국 세우려 한 중국해적 임봉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08.07 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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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닐라의 스페인군 공격에 실패…팡가시난에서 스페인군 공격에 도주

 

16세기 중엽에 린펑(林鳳)이란 중국 해적이 있었다. 그는 필리핀과 유럽인들에게 림아홍(林阿鳳)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광둥(廣東푸젠(福建)성 일대에서 왜구와 손잡고 약탈을 하던 해적이었다.

때는 명조(明朝) 말기였다. 그 무렵 아시아에 가장 먼저 진출한 포르투갈은 은근히 중국 해적들을 지원했다. 그 바람에 1553~1561년 사이에 중국과 대만, 일본 해안에는 해적들의 전성기기를 이루었고, 해적 수만 2만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왜구와 중국해적에 시달리던 명나라는 해적 연합세력과의 전면전을 펼쳤다.

임봉의 묵상화 /위키피디아
임봉의 묵상화 /위키피디아

 

명나라 정규군이 대량 투입되면서, 해적들은 밀리기 시작했다. 왕직(王直)을 비롯해 중국왜구 두목들이 체포되거나 사형되고, 해적들은 필리핀 루손섬으로 거점을 옮겨갔다. 임봉도 그런 부류였다.

임봉은 1571년 광둥, 푸젠의 섬들을 공격해 거점을 만들었지만, 이듬해 명군에 쫓겨나 지금의 필리핀 남일로코스(Ilocos Sur)에 새로운 아지트를 만들었다. 그는 그곳을 본부로 삼아 중국 해안을 노략질했다.

명나라 장군 리우 야오후이(劉堯誨)는 루손섬까지 함대를 보내 그의 기지를 급습했지만, 임봉은 어느새 도망가 다시 중국해안을 약탈했다.

당시 필리핀에는 마닐라와 세부 등 일부 지역에 스페인이 식민도시를 건설했을 뿐, 대대수 지역에는 수십개의 토착왕국이 할거하고 있었다.

임봉은 필리핀 해상에서 스페인과 무역을 하던 중국 상선을 나포했다. 그 상선에는 엄청난 금은 보화가 쌓여 있었다. 옳거니, 그러면 스페인 본거지를 약탈하자. 그러면 수많은 금과 은을 얻을수 있으리라, 그는 스페인 본거지가 마닐라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착각한게 있다. 스페인은 1550년대에 멕시코의 스페인인, 또는 그 2세들을 데려다 세부(Cebu)를 시작으로 마닐라에 정착촌을 조성하고 있었다. 임봉은 스페인 정착촌의 경비가 허술할 것으로 판단했다.

그에게는 70척의 배가 있었고, 그를 따르는 중국 해적이 3,000명이나 되었다. 여기에다 일본 왜구 400명이 그와 연대하고 있었다.

157411월 임봉의 거사가 시작되었다. 그는 카톨릭의 기념일을 택했다. 1130일은 스코틀랜드 수호성인 성 안드레이를 기리는 축제의 날이다. 1129일 밤, 임봉은 수하 3천명을 싣고 남일로코스의 본거지를 출발했다.

다음날 오전 10700명의 해적 정예부대는 마닐라에서 가까운 해안에 내렸다. 대나무로 된 투구를 쓰고, 솜털을 가뜩 넣은 갑옷, 긴창, 화승총(조총), 전투용 도끼, 칼로 무장했다. 그들은 맨발로 살금살금 마닐라로 향했다.

그들이 첫 번째로 만난 것은 마틴 데 고티(Martín de Goiti) 대위가 이끄는 부대였다. 고티는 완강하게 저항했지만, 결국은 살해되었다. 하지만 그의 저항은 스페인 본대에게 전투준비를 할 시간을 주었다.

임봉의 해적들이 고티 부대에서 시간을 지체하는 사이에 스페인 본대가 공격해 왔다. 스페인 군대는 수는 적었지만 화력이 뛰어났다. 중국 해적이 80명 죽었지만, 스페인은 14명의 희생자를 냈다. 해적들이 서서히 밀렸고, 타고 왔던 배를 타고 도주했다. 그 직전에 중국 해적들은 마닐라의 산 아구스틴 성당(San Agustin Church)와 스페인 갤리선 몇척을 불태우는 전과를 냈다. 그것이 전부였고, 해적들의 마닐라 공격은 실패했다.

당시 필리핀의 스페인군은 민다나오 섬의 이슬람교도인 모로(Moro)족의 반란을 진압하는데 주력하고 있었고, 임봉 일당을 추적할 여력이 없었다.

 

임봉 일당의 필리핀 공격(그림) /위키피디아
임봉 일당의 필리핀 공격(그림) /위키피디아

 

임봉과 해적들은 스페인 동부의 팡가시난(Pangasinan)으로 퇴각했다. 당시 팡가시난은 스페인의 지배를 받지 않는 독립 왕국이었다.

팡가시난의 위치 /위키피디아
팡가시난의 위치 /위키피디아

 

임봉의 무리들은 아예 팡가시난에서 눌러 살 생각이었다. 중국으로 돌아가자니, 명조가 대규모 병력을 보내 해안을 샅샅이 뒤져 해적을 소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그곳에서 자신의 왕국을 건설하려 했다는 견해도 있다. 그들은 나무로 목책을 만들고 성채를 지었다. 그리고 마을을 약탈하고, 추장을 잡아다 주민을 이끌고 오게 해 노역을 시켰다.

이때 전원 남성이었던 중국 해적들은 필리핀 여인들과 결혼해 많은 아이를 낳았다고 한다. 팡가시난에는 아직도 중국인과 비슷한 후손들이 많이 있다고 하는데, 필리핀의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Ferdinand Marcos) 전 대통령이 그 후손이라는 주장이 있다. 믿거나 말거나.

 

어쨌든 스페인 식민당국은 필리핀 해안에 중국 해적의 근거지가 존재하는 것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당시 스페인의 필리핀 총독은 후안데 살세도(Juan de Salcedo)였다.

모로족의 반란이 진압되자, 살세도 총독은 이듬해인 1575323일 스페인군 256명에다 스페인에 복속한 필리핀 부족들에서 차출한 병력 2,500명을 59척의 배에 태우고, 출항했다. 그들은 팡가시난의 중국 해적 근거지를 기습했다. 임봉을 비롯해 해적들은 당황했다. 그들은 요새로 도망쳤다.

중국 해적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해적들은 요새에 웅크리고 방어에 집중했다. 전투는 쉽게 끝나지 않았다. 스페인군은 해적 근거지를 포위하며 장기전으로 들어갔다. 스페인군은 우선 해적들의 퇴로를 끊기 위해 해적선을 모두 불태웠다.

요새전은 4개월이나 걸렸다. 그 사이에 임봉은 일부 해적을 빼돌려 탈주할 배를 건조했다. 30척의 배가 건조될 무렵에 임봉 일당은 탈출에 성공한다. 157584일 스페인군이 요새를 점거했을 때엔 해적들이 탈출한 후였다.

 

필리핀 최초의 애니메이션 영화 ‘우르두자’(2008년) /네이버영화
필리핀 최초의 애니메이션 영화 ‘우르두자’(2008년) /네이버영화

 

여기에서 많은 스토리가 전해진다. 임봉 일당은 어떻게 스페인의 포위망을 뚫고 배를 건조했으며, 탈출루트가 어디인지가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전해지는 얘기로는 임봉이 팡가시난 왕국의 여왕과 결혼했는데, 그녀가 도왔다는 것이다. 그녀의 이름은 나타라시(Nataracy) 또는 카본타탈라(Kabontatala)로 알려져 있다. 팡가시난의 여왕은 요새에서 터널을 파고, 탈출할 배를 건조하는데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팡가시난 왕국은 아랍의 여행자 이븐 바투타(Ibn Battuta)의 여행기에 소개되었는데, 그가 여행하던 14세기에 우르두자(Urduja)라는 여왕이 지배하고 있었다. 팡가시난은 전설적인 여인국 아마존(Amazon)과 같이 여성이 지배하는 나라였다고 바투타는 설명했다. 우르두자 여왕은 젊고 아름답고 교육을 잘 받았으며, 몸소 군대를 지휘했다고 한다. 그녀는 자신과 싸워서 이길 사람을 남편으로 삼겠다고 했는데, 아무도 그에게 도전하지 않아 미혼으로 살았다고 한다. 이 전설을 토대로 필리핀에서는 애니메이션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아마도 임봉 일당의 탈출을 지원한 여인은 우르두자의 후손이 아니었을까, 많은 추측들이 나온다.

임봉 일당은 대만으로 탈출했다고 한다. 당시 대만은 또다른 중국 해적 정성공(鄭成功)이 지배하기 이전이었고, 네덜란드가 진출하기도 이전에 원주민인 고산족(高山族)의 나라이던 시절이었다. 임봉은 대만 탈출후 또다른 중국 해적들과 손잡고 1589년 중국 해변을 노략질했다고 하며, 그후 기록은 없다.

 

임봉 일당이 필리핀을 탈출하기 직전에 명나라 스파이가 필리핀에 와서 임봉이 스페인군의 공격을 받아 괴멸직전이라는 사실을 파악하고 돌아갔다. 그 소식을 들은 중국 수군제독은 감격했다고 한다.

스페인은 이 기회에 중국과 무역로를 여는 방안을 추진했다. 중국 무역은 이미 포르투갈이 마카오를 임대받아 사실상 요새를 구축하고 있었기 때문에 스페인으로선 뒤늦은 일이었다.

15752명의 성아우구스트 수도회 선교사로 구성된 스페인 사절단이 중국 수군의 안내를 받아 푸젠성으로 갔다. 이것이 양국간 첫 공식접촉이었다.

중국 당국은 스페인 사절단을 융숭하게 대접하고, 푸젠과 저장성 해안에 상거래를 허가했다. 스페인은 포르투갈의 마카오처럼 거주지를 원했지만, 중국은 더 이상 유럽인들에게 땅을 내주지 않았다. 다만 스페인은 푸저우(福州), 샤먼(厦門), 취안저우(泉州)에서 무역을 할수 있게 되었고, 이를 통해 마닐라, 멕시코, 스페인을 연결하는 삼각무역의 길을 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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