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전차 청량리 진입 후 이승만, 서울 떠날 결심
北 전차 청량리 진입 후 이승만, 서울 떠날 결심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4.03.07 16: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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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살겠다고 도망쳤다는 이미지 바로집기 위해 쓴 책…국가원수로서 최선 다한 3일

 

이승만 초대 대통령에 대한 잘못된 견해가 6·25전쟁이 터지자 나 몰라라 하고 도망쳤다는 루머다. 이를 비아냥거리며 런승만이라는 말도 있다. 심지어 국민의힘 지도부에도 이런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 주호영 의원은 당대표 시절이던 202012문재인 대통령을 겨냥해 "임진왜란 때 백성을 버리고 피난 간 선조나 서울을 사수하겠다고 하고는 혼자 남쪽으로 갔던 이승만 대통령의 사례로 남지 않기를 바랄 뿐"이라고 했다.

책표지 /출판사
책표지 /출판사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으로 재직하던 남정옥 박사는 2015북한 남침 이후 3일간, 이승만 대통령의 행적이라는 소책자를 발간하면서 이승만에 대해 잘못 알려진 것을 바로 잡고, 그가 대한민국 역사에서 제대로 된 인물로 자리잡기를 기대하는 마음에서 썼다고 말했다.

그는 가능한한 자료를 모았다. 1976년에 공개한 미 국무부 대외자료, 주미대사관에 근무하던 한표욱 참사관의 회고록, 프란체스카 부인의 회고록 등을 참고하며 전쟁 발발후 3일간의 빈 공간을 메웠다. 정확하게는 1950625일 새벽 4시부터 27일 새벽까지 48시간이다.

남정옥 박사는 북한군의 남침 이후 이승만 대통령의 3일간 행적은 그야말로 드라마틱한 것으로, 그는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그리고 국가원수이자 통수권자로서 해야 할 일을 정확히 수행했다고 밝혔다. 남 박사는 전쟁 직후 3일 동안 대통령은 75세의 노인으로는 감당하기에 너무나 버거운, 살인적인 스케줄을 보냈다고 했다.

 

전쟁 발발후 서울을 떠날때까지 3일간 이승만은 주미대사관을 통해 미국과 유엔에 도움을 요청해 유엔의 참전을 성사시켰다. 또 북한군 전차를 파괴하는데 필요한 공군 전투기를 미 극동군사령관 맥아더 원수에게 요청해 10대를 무상으로 가져와 전투에 투입시켰다. 국무회의를 열어 전시 필요한 긴급조치를 취하고, 전쟁 전에 미국에 주문한 전투함 3척을 가져오라고 미국에 가 있던 손원일 해군총장에게 지시하는 한편 긴급귀국을 명령했다.

또 육군본부 상황실과 치안국을 방문해 전황과 치안상황을 살폈고, 국회에 출석해 전시수행을 위한 국회 협조를 당부하는 등 국가지도자로서 격조 있는 국정을 수행했다. 그는 밤을 꼬박 새우며 주미대사관과 일본에 있는 맥아더 사령부에 전화를 하며 미국에 지원을 독려했다. 맥아더가 잠을 자고 있기 때문에 사령관실이 전화를 바꿔주지 대통령이 않아 화를 내는 장면도 부인의 입을 통해 전달되었다. 그리고 미국 대사 무초에게 수시로 전화를 걸거나 불러 국군에게 필요한 무기와 탄약을 제공하도록 했다.

 

그러면 왜 3일째 되던 날에 이승만은 서울을 떠났을까. 그 대답은 북한군이 너무나 빨리 서울에 진입했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포로로 잡히면 전선은 급속히 무너진다. 전세가 밀리면 국군통수권자가 피신을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후세의 비판가들은 이를 싸잡아 공격한다. 남정옥은 당시의 급박함을 상세히 전했다.

이승만은 27일 새벽 4시에 서울역에서 경부선 열차를 타고 서울을 떠났다. 당시 전선 상황은 서울 외곽 미아리와 청량리까지 북한군이 진입한 위급한 상황이었다. 서울이 곧 함락될 위기의 순간이었다. 그렇지만 대구에 도착할 무렵 대통령은 다시 기차를 돌려 수원으로 향하던 중 각료들의 만류로 대전에서 멈췄다.

 

​한미상호방위조약 가조인식(1953.8.8.)의 이승만 대통령(서 있는 이) /이승만건국기념사업회​
​한미상호방위조약 가조인식(1953.8.8.)의 이승만 대통령(서 있는 이) /이승만건국기념사업회​

 

3일째 되던 627일의 상황을 보자.

새벽 1, 이승만은 주미대사관에 전화를 걸었다. 이때 경무대에서 국무회의가 열렸다. 한표욱 참사관이 받았다. 대통령의 목소리는 떨렸다고 한표욱은 회고록에 썼다. “필립(한표욱), 일이 맹랑하게 되어 가고 잇다. 우리 국군이 용감하게 싸우긴 하나, 모자라는 게 너무 많다. 즉시 장면 대사를 모시고 트루먼 대통령ㅇ르 만나 군사원조의 시급성을 설명하고 협조를 요청하라.” 그날 오후(미국시간) 장면 대사는 이승만의 지시로 트루만을 만났다.

곧이어 일본에 전화를 걸어 맥아더를 바꿔달라고 했으나, 사령관이 자기 때문에 깨울수 없다는 보좌관이 대답했다.

새벽 2, 신성모 국방장관, 이기붕 서울시장, 조병옥 박사가 들어와서 각하, 사태가 여간 급박하지 않습니다. 빨리 피하셔야 하겠습니다.”고 말했다. 이승만은 안돼, 서울을 사수해! 나는 떠날 수 없어!”라며 움직이지 않았다. 이승만이 고집을 부리자, 조병옥은 프란체스카 여사와 비서들에게 각하의 고집을 꺾어야 한다. 서둘러 피난을 보내야 한다.”고 설득했다.

프란체스카는 지금 같은 형편에서는 국가원수에게 불행한 일이 생기면 더 큰 혼란이 일어날 거라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대한민국의 존속이 어렵게 됩니다. 일단 수원까지만 내려갔다가 올라오는 게 좋겠습니다.”고 남편을 설득했다. 이 말에 이승만은 누가 마미(프란체스카)에게 그런 소리를 했단 말이야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새벽 3. 북한군 전차가 청량리까지 들어왔다는 경찰보고와 서대문형무소가 무너지면 경무대가 위험하다는 김태선 치안국장의 보고가 올라왔다. 청량리와 경무대까지는 4km에 불과했는데, 적의 포병사거리(11km)에 들어와 있었다. 게다가 북한 전투기들이 서울 상공을 누비며 용산 군시설과 김포 비행장을 공습하고 있었다. 북한 전투기는 대통령이 있는 경무대에 기총소사를 하며 항복을 권유하는 전단을 살포했다. 대통령과 여사는 방공호로 피신했다.

당시 서대문형무소에는 7,000. 마포형무소에는 3,000명의 죄수가 있었다. 특히 서대문형무소에는 공산분자들이 갇혀 있었다. 영등포형무소에도 많은 재소자들이 수감되어 있었다.

대통령의 신변을 장담할수 없는 상황이었다. 마침내 이승만은 결단을 내렸다. 새벽 4시 이승만 부부는 서울역을 출발했다. 이승만은 내가 서울 시민들하고 같이 죽더라도 남아서 싸워야 할 텐데. 그러내 내가 잡힐 것 같음년 다 끝나는 거야.”라고 혼잣말을 했다고 황규면 비서가 회고했다.

그날 뉴욕에서는 유엔 안보리가 열려 소련 대표가 불참한 가운데 한국지원이 결의되었다. 대전의 충남지사 관사에 자리를 잡은 이승만은 미국 대사관의 보고를 듣고 한숨을 내쉬었다.

 

남정욱 박사는 이승만 박사의 3일간 활동은 대한민국이 향후 전쟁을 수행하게 될 국정의 지짐치 되었고, 이러한 틀 안에서 대한민국 정부와 국민은 전쟁을 수행할수 있었다고 썼다. 저자는 이승만 대통령은 긴박한 상황에서 품위를 잉ㄹㅎ지 않고 역량있는 국가지도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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