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이 인도차이나에 못 들어간 사연
스페인이 인도차이나에 못 들어간 사연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4.03.11 13:3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캄보디아 왕의 요청으로 필리핀 주둔 스페인군 파견…말레이 해상세력에 전멸

 

해외 식민지 건설의 선두주자였던 스페인이 16세기말에 캄보디아를 침공했다가 패배한 적이 있다.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이지만, 이때 스페인의 실패가 후발주자인 영국과 프랑스가 수세기 후에 인도차이나에 진출하는 계기를 제공했다는 해석이 있다.

발단은 태국의 캄보디아 침공이었다. 15932월 타이 아유타야 왕조의 나레수안(Naresuan)왕이 캄보디아를 침공했다. 13세기에 앙코르 제국이 멸망한 이후 캄보디아 지역에 들어선 왕조들은 태국의 침공에 늘상 패배하고 있었다.

아유타야의 침략으로 수도가 위태로워지자, 캄보디아 국왕 사타 1(Satha I)는 아시아를 여행 중이던 스페인과 포르투갈 사람들을 불렀다. 당시 캄보디아 수도 롱벡(Longvek)은 메콩강 수운을 이용한 상업도시로서, 유럽인, 중국인, 동남아 상인들의 왕래가 잦았다. 국왕은 포르투갈 사람 디오고 벨로소(Diogo Veloso)와 스페인 사람 블라스 루이스(Blas Ruiz)를 총애해 공주를 주어 결혼도 시켰다.

그 무렵 포르투갈은 말레이반도의 말라카, 순다열도의 향료 섬에 군대를 주둔시켰고, 스페인은 마닐라를 개척했다.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는 동아시아에 발을 디디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이 시기는 스페인이 포르투갈을 합병해 한 군주가 두 개의 나라를 통치하는 동군연합(同君聯合)의 시절(1580~1640)이었다.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해외 식민지를 통합관리했다. 캄보디아에서도 두 나라 사람들은 하나가 되어 사타 1세를 지원했다.

 

1540년대 동남아시아 /위키피디아
1540년대 동남아시아 /위키피디아

 

수도가 함락 위기에 처하자 사타 왕은 두 서양인에게 해외 지원세력을 찾아보라고 요청했다. 벨로소와 루이스가 어떻게 캄보디아를 빠져나갔는지에 대해서는 설이 분분하다. 태국군의 포로로 잡혀 끌려갔다가 태국왕 나레수안이 풀어주었다는 설, 태국군의 공격을 피해 탈출했다는 설 등이 있다.

어쨋든 두 특사는 먼저 말레이반도의 포르투갈 식민지 말라카를 방문했다. 말라카의 포르투갈 총독은 그들의 요청을 거절했다. 벨로소와 루이스는 필리핀으로 갔다. 그들은 캄보디아 왕의 선물이라면서 코끼리 두 마리를 주면서 태국의 공격을 막아주면 캄보디아왕이 스페인 국왕의 신하가 되어 조공을 바칠 것이라고 했다.

당시 마닐라의 스페인 총독은 고메스 페레스 다스마리나스(Gómez Pérez Dasmariñas)였다. 고메스 총독은 캄보디아에 병력을 파견하는 것을 내켜하지 않았다. 그는 차라리 태국과 캄보디아의 전쟁에 간섭해 간접적 이득을 누리는 것을 선호했다. 하지만 고메스는 1593년말 원정 도중에 산상반란으로 사망하고 그의 아들 루이스 페레스(Luis Pérez Dasmariñas)가 총독을 승계했다. 아들은 아버지와 달리 캄보디아 원정을 선선히 승인했다.

 

1596년 첫 번째 스페인 원정대가 마닐라에서 출발, 캄보디아로 향했다. 3척의 전함에 140명의 스페인 병사가 탔고, 필리핀 원주민, 일본인 카톨릭 신자, 뉴스페인(멕시코)에서 온 사람들도 동승했다. 원정대의 제독은 후안 후아레스 갈리나토(Juan Juárez Gallinato)가 맡았다.

캄보디아로 가던 중에 갈리나토 제독이 탄 함선은 바람을 잘못 만나 길을 잃었고, 벨로소와 루이스가 이끄는 2척이 캄보디아에 도착했다.

그들이 도착해 보니, 사타 왕은 라오스로 망명했고, 반역자들이 프레아람(Preah Ram)을 국왕으로 옹립하고는 태국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고 있었다.

루이스는 중재자의 역할을 자처했다. 그는 찬탈자 프레아람에게 구왕조와의 불화를 중재하고 서양과의 무역을 개선할 것을 제안하면서 아메리카산 은과 그 지역에서는 희귀한 당나귀를 선물했다. 그런데 당나귀가 왕의 코끼리 앞에 난동을 부리는 바람에 프레아람의 분노를 산데다 왕의 측근이었던 중국인들이 서양인을 오랑캐로 얕잡아 보면서 충돌이 발생했다. 중국인들이 스페인 사람 2명과 동행한 일본인 1명을 살해했다. 그러자 루이스는 스페인군을 동원해 중국인 200명을 죽이고, 배를 몰고 떠나 버렸다.

이 무렵에 벨로소와 루이스는 경로를 이탈했던 갈리나토 제독을 만나 합류했다. 스페인 함대는 현재 라오스 지역의 란쌍(Lan Xang) 왕국 비엔티안으로 가서 사타왕을 찾았으나 왕과 세자는 이미 죽었다. 스페인인들은 12살 된 둘째 왕자 바롬 레아체아(Barom Reachea)를 찾아내 국왕으로 옹립했다. 15975월 벨로소와 루이스는 어린 왕을 앞세워 캄보디아로 쳐들어왔다. 스페인군은 프레아람과 찬탈자들을 포로로 잡아 죽였다. 어린 왕은 메콩강의 동서 양안의 영토를 떼 스페인에게 주었다. 스페인군은 그곳에 요새를 건설하고 요새를 거점으로 식민지를 개척하고 카톨릭을 전파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스페인에 불행한 일이 벌어졌다. 1599년 벨로소는 마닐라로부터 네 척의 전함을 인도받았다. 스페인의 2차 원정대다. 그중 두척은 폭풍에 난파했다.

 

16세기 캄보디아의 수도 롱벡(Longvek)의 조감도 /위키피디아
16세기 캄보디아의 수도 롱벡(Longvek)의 조감도 /위키피디아

 

스페인 함대가 캄보디아에 들락거리자 인근 말레이족 해상세력이 경계심을 높였다. 말레이족의 전설적인 해상왕 락사마나(Laksamana)는 이베리아인들을 극히 혐오했는데, 스페인 함대를 선제공격했다. 이에 스페인 함대는 말레이 함대를 공격했고 ,락사마나는 참파족까지 동원해 스페인과 포르투갈 연합함대를 공격했다.

이 치열한 전투에서 스페인인 1명과 필리핀인 몇 명을 제외하고 스페인 함대에 탄 선원은 전멸했다. 락사마나는 어린 왕을 죽이고 캄보디아를 태국에 넘겨주었다. 15997월의 일이다. 스페인의 인도차이나 교두보 확보는 실패하고 말았다. 동남아시아의 여러 세력이 힘을 합쳐 서양세력을 축출한 사건이었다.

이후 캄보디아는 태국의 속국이 되었고, 캄보디아는 250년 후에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속하게 되었다.

 


<참고한 자료>

Wikipedia, CambodianSpanish War 

Wikipedia, SiameseCambodian War (15911594) 

Wikipedia, Blas Ruiz 

Wikipedia, Post-Angkor period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