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만 공습 전에 일본 도발 예언한 이승만
진주만 공습 전에 일본 도발 예언한 이승만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4.03.16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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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발간 ‘일본의 가면을 벗긴다’에서 설파, 펄 벅도 감탄…평화주의자 비판도

 

미국에 망명중이던 이승만은 일본의 진주만 공습 4개월전에 일본의 미국 침공을 예언했다. 그는 애매한 정치분석가들과 달리 반드시, 명확하게 일본이 쳐들어올 것이라고 예고했다. 19418월에 출간된 ‘Japan Inside out’은 망명객 이승만이 일본의 정세에 대해 무지한 미국 국민들을 일깨워주기 위해 영어로 쓴 책이다. 국내 번역본으로는 1954년 이기붕의 부인 박마리아가 1954일본내막기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한 것이 시초이고, 이어 일본군국주의실상’(1987, 이종익), ‘일본, 그 가면의 실체’(2007, 대한언론인회), ‘일본의 가면을 벗긴다’(2015, 류광현역)이 나왔다.

대지의 작가로 유명한 미국의 펄 벅(Pearl S. Buck)은 이 책의 서평을 이렇게 썼다.

이것은 무서운 책이다. 나는 이것이 진실이 아니라고 말할수 있었으면 좋겠으나 오직 너무 진실인 것이 두렵다. 나는 이 박사가 대부분의 미국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사실, 곧 미국이 1905년 수치스럽게 조·미수호조약을 파기하고, 그럼으로써 일본이 한국을 집어삼키도록 허용했다고 말해준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이 박사는 이것이 큰불이 시작되는 불씨였다고 말하는데, 나는 이 말에 정말로 두려움을 느낀다.” (‘일본의 가면을 벗긴다’, p22~23)

책표지 /네이버 책
책표지 /네이버 책

 

곧이어 태평양전쟁이 터지고, 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이승만은 미국에서 유명한 인물이 되었다. 이승만(1875~1965)은 이 책을 1939년부터 2년간 썼다고 한다. 하와이 망명객의 처지에 자료도 접근하기 어려웠을 터인데 그의 국제정세 분석은 대단히 명쾌했다. 그 비결은 그가 메모광이고 스크랩광이었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구한말이던 젊은 시절 1899년부터 57개월의 감옥생활을 하면서도 제국신문에 꾸준히 논설을 집필한 실력이 특유의 문장력을 구사했다.

그는 독립운동을 하면서 일본의 속셈을 명확하게 꿰뚫었고, 엄청난 선전비를 쓰며 미국 신문과 잡지에 호의적인 글을 내보냄으로써 미국인의 눈을 가린 일본의 본질을 폭로했다. 그는 1954년에 쓴 서문(박마리아 번역본)에서 전쟁이 벌어지면서 내 글을 읽고 내 말을 들은 미국인들이 그제야 비로소 깨닫게 되어 나를 선비라고까지 말하게 되었는데, 실은 동양사람들은 거반 다 일본이 미국과 전쟁을 획책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했다. (p18)

 

이승만은 나라를 빼앗긴데 한국인들의 문제도 지적했다.

만일 한국국민들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한 1592년에 일본을 상대햇던 것과 같은 자세로 1894(청일전쟁)에 일본을 상대했더라면 한국국민들은 그들이 오늘날 처해 있는 것과 같은 비참한 처지로부터 나라와 자신들을 구할수 있었을 것이다. 만약 미국인들이 1894년과 1904년에도 오늘날 일본을 보는 관점으로 일본을 보았다면 그들은 한일합병을 의심스러운 눈으로 보면서 지금 현재 태평양 건너 쪽에서 막강한 위험이 되고 있는 일본 해군력 확장 문제에 대처했을 것이다.” (p31)

이승만은 일본인들의 전쟁욕구를 명확하게 꿰뚫었다. 그는 천황 전체주의(미카도이즘)의 본질과 그 기원, 저들의 침략야욕의 실상, 그리고 저들의 침략야욕을 저지할 수 있는 유효한 방안을 제시했다. 나아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최대의 적은 바로 이러한 천황 전체주의와 더불어 공산 전체주의임을 밝혔다. 이 시기에 그는 공산주의 위험성을 인식했다.

그는 타나카 각서(다나카 상주문)를 아돌프 히틀러의 나의 투쟁이 비유했다. 1927년 타나카 기이치 남작이 천황 히로히토에게 바쳤다는 상주문에 대해 이승만은 이렇게 평가한다.

일본은 그 문건이 중국 선전국이 날조했거나 한국인이 위조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그 신빙성을 맹렬히 부인하지만, 일본 침략의 행태가 그 문서의 내용과 너무나도 일치하는데 놀라지 않을수 없다. 다나카 남작의 비밀각서가 일본에게 가지는 의미는 히틀러의 나의 투쟁이란 책이 독일에 갖는 의미와 같다. 이 두 책은 앞으로 닥칠 사태를 예언한 예언서라기보다는 세계의 질서를 재구축하기 위한 군사계획서로 저술되었다.”

이 책은 한국이 일제의 식민지가 된 전후를 설명하면서 미국이 조미수호조약을 방기한 점을 강조했다. 이승만은 미국이 1882년 조미 수호통상조약을 맺었다가 1905년 일본이 한국을 보호국화한 것을 방관했다고 비판했으며 이를 '미국의 역사적 책임'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일본이 한반도를 식민지로 만든 것이 제2차 세계 대전의 원인이 되었다고도 했다.

 

그는 일본이 미국과의 한판 전쟁을 준비하느라 광분하고 있는데도 미국인들은 그런 내막을 전혀 모른 채 마치 꿈속을 헤매듯이 친일 분위기에 취해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미국인들이 이렇게 일본인들의 실상에 대해 무지했던 이유에 대해 그동안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이 미국인들을 상대로 펼쳤던 거짓 선전선동의 결과라고 설파했다.

그는 미일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썼다. 그는 책의 결론 부문에서 이렇게 정리했다.

일본의 정복 행진은 두 개의 방향 중 어느 쪽으로든 개시할 것이다. 시베리아 국경에서 군대를 철수하여 병력을 통합한 후 남태평양 지역으로 진격하거나, 아니면 시베리아로 쳐들어가서 우랄산맥 동쪽의 광대한 영토를 점령할수도 있을 것이다. 이 두 가지 전략을 비교해 보면 남방 진격이 훨씬 더 구미가 당길 것인데, 그 이유는 영··화란의 식민지들이 일본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물자들을 더 많이 생산하고 있기 때문이다.”(p296)

이승만은 스스로 평화주의자라고 말한다. 하지만 반전론자에 대해선 극히 혐오했다.

나는 양심적 병력기피자들을 존경한다. 그러나 국토방위, 국가의 명예, 국가의 독립을 위한 전쟁임을 전혀 고려치 않고 전쟁이라면 무조건 반대하여 싸우는 그런 투쟁적인 평화주의자들은 5’(fifth columnist)과 마찬가지로 위험하고 파괴적인 존재라고 믿는다. 그들은 부지불식간에 자신들의 국가에 불행을 자초하는 행위를 저지르고 있다. 그들은 호전적인 국가에 대해 침략전쟁을 수행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노력하기는커녕 침략성이 전혀 없는 그들 자신의 국가가 국토방위를 위해 대비하는 것조차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다.“ (p246)

 

최근 김덕영 감독의 다큐멘터리 건국전쟁을 비롯해 건국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재평가가 활발하다. 반대진영에선 그가 반민특위를 해체하고 단독정부를 수립하고 4·19 혁명으로 하야했다는 점을 들어 여전히 격하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분명하게 반일독립운동의 중심에 서 있던 인물이다. 그가 쓴 일본의 가면을 벗긴다를 보면 그의 혜안을 느낄수 있다.

그가 남긴 저서는 다섯권이다. 한성감옥에서 작업한 번역서 청일전기’(1910), ‘독립정신’(1910), ‘한국교회 핍박’(1913), 프린스턴대 박사논문 미국의 영향을 받은 중립’(1912), 그리고 이 책이다.

 

1942년 2월 한인자유대회에 참석한 이승만과 부인 프란체스카 /위키백과
1942년 2월 한인자유대회에 참석한 이승만과 부인 프란체스카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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