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대전중 미국이 일본에게 당한 가장 치욕적인 사건의 하나가 “바탄 죽음의 행진”(Bataan death march)이다.
1942년 4월 일본군은 미국령 필리핀에서 벌어진 바탄 전투에서 승리해 미군과 필리핀군 7만명을 포로로 잡았다. 일본군은 포로들을 바탄 반도의 남쪽 끝 마리벨레스를 출발해 산페르난도까지 88km를 강제 행진시켰다. 이어 카파스까지는 열차를 이용한 뒤, 다시 카파스부터 오도넬 수용소까지 마지막 13km를 행군을 강제했다. 행군 과정에서 포로들은 굶주림에 시달렸고 대열에서 이탈하는 낙오자는 일본군의 총검에 찔려 죽어갔다. 행군 도중에 일본군의 만행에 7,000~1만 명의 포로들이 사망하고, 5만4,000명만이 수용소에 도착했다.
이 만행은 1944년까지 알려지지 않다가 미군이 필리핀을 다시 접수한 이후에 포로들의 증언에 의해 밝혀졌다.
당시 필리핀 작전을 수행한 총책임자는 일본군 사령관 혼마 마사하루(本間雅晴) 중장이었고, 행군 도중에 각종 악행을 지시한 인물은 쓰지 마사노부(辻政信) 중좌였다. 혼마는 1946년 4월 3일 마닐라 군사 재판에서 유죄를 선고받고 처형되었다. 하지만 고의적으로 명령을 왜곡해 참사를 초래한 쓰지는 처벌은커녕 전범으로 기소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는 일본 중의원(하원) 의원을 두차례나 역임하며 반공투사로서 이름을 날렸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수 있다.
쓰지 마사노부(1902년생)는 극우파 군인이었다. 청년 장교시절에는 우유부단한 내각을 전복하기 위해 쿠데타를 모의했으며, 1938~39년 관동군에 근무할 때 의도적으로 소련군과 국경충돌을 도발하기도 했다.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필리핀 침공에 참여했고, 이듬해 4월 바탄 전투에 참전했다. 그는 바탄반도에서 잡힌 포로들을 수송하는 임무를 맡았는데, 본부에서 내려온 명령을 멋대로 해석해 포로들을 걸어서 이송시켰다는 혐의를 받았다. 마닐라에서는 필리핀의 유력 정치인들을 체포해 사형시킬 것을 요구했다. 그가 처형시킬 것을 주장한 인물중 한 사람이 하원의장이던 마누엘 로하스(Manuel Roxas)인데, 혼마 사령관이 패장을 죽이는 것은 무사도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로하스를 처형 명단에서 제외했다. 그렇게 살아난 로하스는 1946년 필리핀 독립 후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쓰지는 싱가포르에 주둔할 때 중국인 숙청(肅清)에 가담했다. 일본군은 당시 싱가포르에서 일본의 점령정책에 동조하지 않는 중국인 2만5,000~5만명을 집단학살했다.
1945년 8월 일본이 패망할 때 그는 버마(미얀마) 전선에 있었다. 그는 그때 슬그머니 도망쳐 태국 방콕으로 도주했다. 곧이어 진주한 영국군은 쓰지를 수색했다. 그는 승려로 변장해 베트남으로 건너갔다. 베트남에선 좌파 베트민이 득세하고 있었기 때문에 안전하지 않다고 판단해 중국으로 건너갔다. 중국에서 그는 국민당 정부의 간첩질을 했다는 증언이 있다. 쓰지는 베트남과 중국을 전전하면서 미군이 주도한 전범재판에 비껴나 있었다.
1948년 그는 일본으로 돌아왔다. 이 과정에서 미국 CIA가 협조했다는 설이 있다. 귀국후 그는 그동안 숨어지내던 시절을 정리해 ‘잠행삼천리’(潜行三千里;)라는 회고록을 출간했다. 책이 베스트셀러로 팔리면서 그는 일약 유명인사가 되었다. 덕분에 1952년 중의원에 선출되었고, 재선에 성공했다.
그는 반공투사로 변신했다. 그는 스스로 ‘작전의 신’이라고 칭하며, “3차 대전을 일으킬수 있는 사람이라고 과장했다. 그는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 때에는 군국주의자였으며, 전후에 살아남아서도 극우파 정치인으로 부활했다.
1961년 4월 그는 라오스를 여행하던 중에 실종되었다. 라오스 내전에서 사망했다는 설, 북베트남 정부의 고문이 되었다는 설 등이 있지만, 어느 것도 확인되지 않았다. 그는 1968년 9월 20일 공식적으로 사망이 선고되었다. 그의 고향인 이시카와현 카가시에는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아직도 이런 군국주의자이 존경받는 곳이 일본이다.
<참고한 자료>
Wikipedia, Bataan Death March
Wikipedia, Masanobu Tsuj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