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때 유엔군 첫 교전 오산 죽미령 평화공원
6·25때 유엔군 첫 교전 오산 죽미령 평화공원
  • 이인호 기자
  • 승인 2024.03.23 11:3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美 스미스부대, 북한군 남하 저지했으나 6시간만에 붕괴…북한군 전력 판단 계기

 

오산 죽미령(竹美嶺)은 국도 1호선과 경부철도가 지나는 야트마한 고개다. 이 고개는 우리나라 남북 교통축이 지나는 길목이고, 인근의 독산성은 삼국시대는 물론 임진왜란 때 격전지였다.

1950625일 북한군이 전쟁을 도발한지 3일만에 수도 서울을 점령하자, 627일 유엔 안보리는 참전을 결의하고 630일 미국 정부는 지상군 투입을 승인했다. 북한군은 파죽지세로 남하했고 일본에 주둔하던 미 극동군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미 24사단에서 선발대를 차출해 병력을 파견했다. 찰스 B, 스미스 중령이 이끄는 미군은 71일 부산에 도착해 경부국도를 따라 북상했다.

스미스 부대는 74일 오산 북쪽 죽미령 일대 양쪽 고지에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병력은 540. 2개 소총중대와 75미리 무반동총 4정 및 4.2인치 박격포 4문을 보유했다. 105미리 곡사포 6문으로 이루어진 미군 52포병대대의 화력 지원을 받기로 되어 있다.

스미스 부대는 정규전투부대가 아니고, 북한군 전력을 탐지하는 정찰부대 성격이 강했다. 그들은 경부국도와 철길 주변으로 100m 남짓한 높이의 산등성이들을 끼고 포진했다. 미군은 과신했다. 미군이 참전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북한군이 스스로 물러날 것이라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75일 아침, 북한군 보병 제4사단이 전차연대를 앞세워 죽미령의 스미스특공대를 공격했다. 816분 미군은 첫 포탄을 발사했다. 그러나 미군의 포탄과 무반동총은 적 전차를 멈춰 세우지 못했다. 미군 포병은 북한군 전차 6대를 파괴하는데 성공했으나, 북한군 전차 33대는 미군의 보병진지를 스치고 내려갔다.

오전 11시쯤 북한군 제4사단의 공격이 개시되었다. 미군은 박격포 사격을 퍼부었으나 효과가 없었고, 적 전차는 미군 보병을 포위하고 조준사격했다. 스미스 부대는 6시간을 버텼으나 오후 230분 퇴각을 결정했다. 그들은 오산 방면으로 철수하려 했으나 오산도 북한군의 수중에 떨어져 모든 장비와 화포를 버리고 안성으로 철수했다.

 

오산 죽미령 평화공원 표지판 /박차영
오산 죽미령 평화공원 표지판 /박차영

 

6·25 전사에서 오산전투는 미군이 유엔군의 이름으로 참전한 첫 번째 전투로 기록된다. 이 전투에서 스미스부대는 181여명이 죽거나 실종되는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맥아더 장군은 죽미령 전투 결과를 보고 받고 비로소 북한군의 전력을 가늠하게 되었다. 그후 국군과 유엔군은 평택·천안 전투에서 패하고 낙동강에서 최후 진지를 구축하게 된다.

오산시는 죽미령 전투를 기념해 죽미령 평화공원을 조성하고, 전투 70주년이 되는 202075일에 정식 개장했다.

평화공원은 1955년 미 제24사단에 의해 세워진 구() 유엔군 초전기념비, 1982년 확장 개수된 신() 유엔군 초전기념비, 2013년에 건립된 유엔군 초전기념관, 2020년 건립된 스미스 평화관을 아우른다. 총면적 134,014.7의 공원에는 전망대, 거울연못, 잔디마당, 평화놀이터 등 방문객들이 평화로운 여가를 보낼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신 유엔군 초전기념비 /박차영
신 유엔군 초전기념비 /박차영
구 유엔군 초전기념비 /박차영
구 유엔군 초전기념비 /박차영
유엔군 초전기념관 /박차영
유엔군 초전기념관 /박차영
오산 죽미령 평화공원 상징물 /박차엉
오산 죽미령 평화공원 상징물 /박차엉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