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차이나타운에 중국인이 안 보인다
인천 차이나타운에 중국인이 안 보인다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4.03.28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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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조성 140년 역사…중화요리집·제과점 등 먹거리, 삼국지벽화 등 볼거리 가득

 

미국이나 동남아를 여행하면서 거대한 차이나타운을 볼수 있다. 그에 비해 중국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우리나라에 차이나타운을 구경하기 힘들다. 근현대사의 거친 역사 굴곡을 거치면서 중국인들이 이 땅에 뿌리내리지 못한 탓이다. 그나마 볼수 있는 곳이 인천 차이나타운이다.

서울지하철 1호선은 구로역에서 갈라져 한 갈래는 인천으로, 다른 갈래는 수원으로 내려간다. 수원 방향 종점은 끊임없이 남하해 천안까지 내려갔지만, 인천 방향의 종점은 철도가 생긴 이래 지금껏 인천역이다. 바다로 막혀 있기 때문이다.

바다 건너 중국에서 배가 도착하는 곳, 서울로 가는 철도가 시작되는 곳, 그 곳에 차이나타운이 있다. 인천역에 내리면 바로 건너편에 차이나타운이다. 대로를 건너면 중화가”(中華街)라고 쓰인 패루가 나온다. 패루(牌樓)는 붉은 기둥 위에 지붕을 얹는 전통적인 중국식 대문으로, 이곳부터 차이나타운이 시작된다.

중국인들이 동남아시아와 미국으로 대대적으로 이주한 것은 17세기 명청교체기 무렵부터다. 만주족이 밀려내려오면서 푸젠성, 광둥성의 한족들이 가난에서 벗어나고 이민족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 바다를 건넜고, 멀리 미국 땅으로 건너가 노동일을 했다. 쿨리(coolie)라는 중국인 노동자들이 근현대 세계의 발전에 아프리카 흑인만큼이나 많은 노동력을 제공했다.

그에 비해 한국에는 늦게 중국인들이 왔다. 인천에 중국인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후반이다. 동남아 화교의 주류는 중국 남부 출신인데 비해 우리나라 화교는 산둥반도 출신이 90%를 넘는다. 또다른 점은 동남아나 미국으로 간 중국인들은 노동력을 파는 하류층이었지만 조선 땅에 온 최초의 중국인 이민자들은 이 땅을 지배하러 온 조력자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차이나타운의 시작은 1882년 임오군란에서 시작된다.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민씨일파가 청군의 파견을 호소하고 청나라 군대가 조선에 들어와 반란군을 진압했다. 임진왜란 때 그러했듯이 청나라 군대를 따라 중국 상인들이 왔다.

중국의 입장이 변해 있었다. 양무운동이 벌어지고 서양처럼 상업을 활성화하면서 청은 조선을 경제적 관점으로 바라보게 된다. 청은 고종에게 정권수호 청구서를 내밀었으니, 18828월에 체결된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이었다. 중국은 이어 1884년에 인천구화상지계장정(仁川口華商地界章程)을 체결해 치외법권 지역으로 청관(淸館)을 설치했다. 이때 구획된 중국인 조계(租界)가 지금의 차이나타운 자리다.

 

인천 차이나타운 입구 중화가 패루/박차영
인천 차이나타운 입구 중화가 패루/박차영

 

중국인촌은 자유공원의 서쪽 구릉에 자리잡고 있다. 입구부터 붉다. 중국인들은 붉은 색을 좋아한다. 공중에 걸린 둥근 등도 붉고, 가게 입구도 붉게 칠해져 있다. 찬찬히 걸으면 볼거리가 많다. 삼국지 내용을 벽화로 그린 거리에서 대하드라마와 같은 고대중국을 이해하고, 중국요리집과 중국제과점을 들러본다. 대만가게라는 곳에서 공갈빵을 하나 샀다. 엄청나게 큰 빵인데 가방에 넣고 다니다 꺼내니 터져 있었다. 예전에 거짓말을 공갈이라고 하던 시대가 있었다. 부풀려 만든 빵이란 뜻일 거다.

 

인천 차이나타운 거리 /박차영
인천 차이나타운 거리 /박차영

 

인천 차이나타운은 조중, 한중 관계의 변화를 탔다. 중국이 청일전쟁에서 패한 직후 차이나타운에서 중국인 위세가 한동안 꺾였으나, 의화단사건이 일어나자 신변의 위협을 느낀 산둥인들이 건너와 수를 불렸다. 하지만 과거처럼 지배자로서의 위치는 사라지고 조선인들의 조롱과 질시의 대상이 되었다.

한일합방 이후 1913년 중국인 조계가 철폐됨으로써 중국 정부의 보호는 30년만에 끝나게 되었다.

 

황제의 계단 /박차영
황제의 계단 /박차영

 

조금 더 올라가면 자유공원이다. 자유공원은 응봉산의 얕은 언덕(해발 69m)의 정상 부위에 조성한 공원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공원이란다.

공원의 이름에서 이 땅 지배자들의 각축이 드러난다. 인천항 개항 직후인 1888년에 외국인 거류민단에서 관리·운영하면서 특정국가의 이름을 넣지 못하고 각국공원이라 불렀다. 청일전쟁 이후 일본 세력이 커지면서 서공원이라고 부르다가, 1945년 해방 후에는 만국공원으로 불렸다.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한 맥아더 장군의 동상이 세워진 1957103일부터 자유공원으로 개칭되었다.

맥아더 장군 동상과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탑을 비롯해 자연보호헌장탑, 충혼탑을 둘러보고, 석정루에 오르면 인천항과 월미산 북성포구 등이 한 눈에 들어온다.

 

자유공원내 한미수료 100주년기념탑 /박차영
자유공원내 한미수료 100주년기념탑 /박차영
자유공원내 맥아더 동상 /박차영
자유공원내 맥아더 동상 /박차영

 

차이나타운에는 짜장면박물관이 있다. 우리가 중국집에서 흔히 먹는 짜장면은 산둥음식이다. 산둥성의 작장면(炸醬麵)이 한국으로 넘어와 짜장면이 되었다. 긴 설명이 필요없다. 우리가 즐겨먹는 음식이 이곳에서 왔다는 점이 인천차이나타운의 자랑이다.

2007년 부산에 차이나타운특구를 지정하고, 서울에도 영등포·구로구 일대에 중국동포들이 유입되면서 차이나타운이 형성되는 추세에 있다. 대구에도 작은 규모이지만 차이나타운이 있다고 한다.

 

북성동 원조자장면거리 /박차영
북성동 원조자장면거리 /박차영
짜장면박물관 /박차영
짜장면박물관 /박차영

 

인천 차이나타운에서 장사하는 가게 주인의 대부분은 한국사람이고 한다. 중국에서 온 학자가 인천 차이나타운을 소개한 글을 보자. (八桂侨刊, 尔东 韩国仁川中华街)

가장 큰 공화춘(共和春), 청관(靑館), 연원(燕園) 세 식당 중 겨우 하나만 화교의 소유다. 한국 미디어의 통계에 따르면 인천 차이나타운에 몰려있는 40~50개의 중국식당과 중국상품을 파는 상점들이 있지만 경영하는 사람의 다수는 한국인이며 화상(華商)1/3만 차지할 뿐이다. 인천 화교의 호적관리를 책임지고 있는 한국인천화교협회 회장 필명안(畢明安)의 소개에 의하면 현재 등록된 인천화교는 868가구 3,330명에 불과하고 실제 인구수는 이보다 적고 차이나타운에 상주하는 인구는 500명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조봉래 논문 참조)

인천 차이나타운에 중국인은 줄어들고, 한국사람들이 중국 관광객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형국이 되었다.

이처럼 우리나라에 차이나타운이 맥을 쓰지 못하는 것은 일본 지배기간에 중국인 이주가 기피되었고, 이승만 정부가 중국인에 대한 혐오가 커 짜장면 가격을 올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속설이 있다. 한국에 살던 중국인들 가운데 상당수가 미국이나 캐나다로 가버렸다고 한다.

 

삼국지벽화거리 /박차영
삼국지벽화거리 /박차영
자유공원에서 바라본 인천항 /박차영
자유공원에서 바라본 인천항 /박차영

 


<참고한 자료>

한국 화교사회의 정치적 조직과 역동성-인천 차이나타운을 중심으로, 이창호, 2011, 중앙사론

중국의 근대화 과정과 인천 차이나타운의 형성과 변화, 조봉래, 2019, 인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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