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에게 전쟁은 어떤 의미인가
여자들에게 전쟁은 어떤 의미인가
  • 박차영 기자
  • 승인 2019.03.24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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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노벨문학상 수상…스베틀라나 알레시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전쟁은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 간다. 목숨도, 건강한 신체도 빼앗아간다. 일상의 생활도, 생각도 전쟁이란 상황에서 극적으로 바뀐다. 특히 전쟁에 참가한 여성은 여성임을 포기해야 한다. 남성 중심의 전쟁에 참여한 여성들의 이야기가 스베틀라나 알레시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라는 책이다.

소설은 아니다. 다큐멘터리도 아니다. 2차 대전에 참여한 수많은 여성들을 일일이 인터뷰해서 담아낸 글이다. 영문판 제목은 ‘The Unwomanly Face of War’, 직역하면 전쟁의 비여성적 얼굴이다. 한글 번역본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가 더 자연스럽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Svetlana Alexievich)는 이 책으로 2015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2차 세계대전에 백만 명이 넘는 여성이 전쟁에 가담하여 싸웠다. 하지만 그들의 이름과 얼굴도 기억되지 않는다. 남자들은 전쟁에서 거둔 승리와 공훈과 전적을 자랑삼아 떠들고, 전선에서의 전투와 사령관이니 병사들 이야기를 하지만, 여자들은 전혀 다른 것을 이야기한다.

이 책은 여자들의 전쟁에 대해 담아 냈다. 소녀병사들이 전장에 나가 처음 사람을 죽였을 때의 공포와 절망감, 전투가 끝나고 시체가 사방에 널브러진 들판을 걸어갈 때의 끔찍함과 처절함을 말한다. 전장에서 첫 생리혈이 터져나온 경험, 전선에서 싹튼 사랑 이야기도 있다.

 

책표지 /출판사 사이트
책표지 /출판사 사이트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2차 대전에 참전한 여성 200명을 인터뷰해 쓴 책이다. 여성들은 저격수가 되거나 탱크를 몰기도 했고, 병원에서 일을 했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전쟁의 일부가 되지 못했다. 이 책은 1985년 첫 출간됐고, 2002년 저자는 검열에 걸려 내지 못했던 부분까지 추가해 다시 책을 출간했다.

전쟁을 겪은 여성들에겐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그들은 전쟁 이후 어떻게 변했으며, 사람을 죽이는 법을 배우는 건 어떤 체험이었나. 그는 참전 여성의 입으로 추하고 냉혹한 전쟁의 얼굴, 즉 배고픔과 성폭력에 분노했다. 그리고 아직까지 드리워진 죽음의 그림자를 그렸다.

전쟁이 끝나고 그 여자들은 또다른 전쟁을 벌였다. 여자들은 전쟁을 기록한 책이나 부상자들에 대한 서류를 드러내지 못햇다. 다시 예쁘게 미소짓고, 높은 구두를 신고, 결혼 준비를 해야 하는 여자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남자들은 자신들의 전우였던 여자들을 잊어버렸고 또 배신했다. 여자 전우들과 함께 거둔 승리를 빼앗고 독차지했다. 그렇게, 여자들의 전쟁은 잊혀버렸다.

작가가 인터뷰한, 전쟁에 직접 참전했거나 전쟁을 목격한 200여 명의 여인들은 우리에게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네들은 숭고한 이상이니 승리니 패배니 작전이니 영웅이니 따위를 말하지 않는다. 그저 전쟁이라는 가혹한 운명 앞에 선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를, 우리네 삶의 이야기를 들려줄 뿐이다. 여인들은 전장에서도 여전히 철없는 소녀였고, 예뻐 보이고 싶은 아가씨였고, 자식 생각에 애간장이 타들어가는 엄마였다.

처음 사람을 죽이고 엉엉 울어버린 소녀, 첫 생리가 있던 날, 적의 총탄에 다리가 불구가 돼버린 소녀, 전장에서 열아홉 살에 머리가 백발이 된 소녀, 전쟁에 나가기 위해 자원입대하는 날 천연덕스럽게 가진 돈 다 털어 사탕을 사는 소녀, 전쟁이 끝나고도 붉은색은 볼 수가 없어 꽃집 앞을 지나지 못하는 여인, 전장에서 돌아온 딸을 몰라보고 손님 대접하는 엄마, 딸의 전사통지서를 받아들고도 밤낮으로 딸이 살아 돌아오기를 기도하는 늙은 어머니……

여인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며 우리는 죽음이 맴도는 전쟁터 한가운데서 따뜻한 피가 흐르고 맥박이 뛰는 사람들을 만나고 인생들을 만난다. 평범하고 순박한 우리의 여동생과 언니 또는 누나와 엄마를. 전쟁 앞에 산산조각 나버린 그네들의 일상과 꿈과 사랑을. 그래서 더욱 전쟁이 잔혹하고 무섭다. 여인들은 요란한 구호나 거창한 웅변 하나 없이 조용히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고 누구를 위한 전쟁인지 돌아보게 한다.

전쟁이 끝나고도 여자들에겐 또다른 전쟁이 기다리고 있다. 여자들은 전쟁을 기록한 책이나 부상자들에 대한 서류를 숨겨야 했다. 왜냐하면 다시 예쁘게 미소짓고, 높은 구두를 신고, 결혼 준비를 해야 하는 여자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남자들은 자신들의 전우였던 여자들을 잊어버렸고 또 배신했다. 여자 전우들과 함께 거둔 승리를 빼앗고 독차지했다. 그렇게, 여자들의 전쟁은 잊혀버렸다.

아이를 낳고 가족을 돌보는 가정이 여자들이 있어야 할 자리이지만,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했던 전쟁 제2차세계대전은 여자들을, 심지어 어린 소녀들까지 전장으로 내몰았다. 조국과 가족의 이름으로 여자들은 총칼을 들고 전선에서 남자들과 똑같이 싸워야 했다.  /출판사 서평에서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위키피디아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위키피디아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1948년 구소련 연방이었던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군인으로 벨라루스인이고 어머니는 우크라이나인이다. 아버지는 군 동원에서 해제된 뒤 가족을 데리고 벨라루스로 돌아가 정착했다. 1967년 벨라루스 국립대에서 저널리즘을 공부하고, 졸업후 기자로 활동했다. 올해로 70살이다.

그는 언론인 출신으로 옛 소련 시절부터 반체제 성향의 작품을 써왔다. 수많은 사람을 인터뷰해 모은 이야기를 논픽션 형식으로 쓰는 '다큐멘터리 산문' 작가다. 체르노빌 원전 폭발 사고의 후유증을 다룬 다큐멘터리 산문 체르노빌의 목소리는 우리나라를 비롯해 19개국에서 번역 출간됐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장르를 개발했다. 그의 장르는 다수의 인물을 인터뷰해 소설화하는 다큐멘터리 산문이다. 그는 일반적인 소설가나 시인도 아니다. 그의 장르는 목소리 소설(Novels of Voices)’라고 한다. 그 스스로는 이 장르를 소설-코러스라고 불렀다. 수년간 수백 명의 사람들을 인터뷰해 모은 이야기를 다큐멘터리로 엮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제가 듣는 세상에 가능한한 가장 가까이 접근하게 해주는 장르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실제 사람들의 목소리와 고백의 장르를 선택했습니다. 인간도 세상도 다면화하고 다양해진 오늘날,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미스테리하고, 불가해한지 마침내 우리가 깨닫게 된 오늘날, 한 인생의 이야기 혹은 그러한 이야기의 기록은 우리를 현실 가장 가까이로 데려다 줍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소련-아프간 전쟁, 소련 붕괴, 체르노빌 사고 등 극적인 사건을 겪은 목격자들과의 인터뷰를 기술했다.

첫작품은 1983년 완성한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이다. 완성은 했지만 출판까지는 2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소련 여성들의 고통과 슬픔을 담은 작품이 반전론에 동조하고 참전 여성들의 영웅적 이미지를 훼손했다는 이유로 신랄한 비판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소련 공산당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개혁·개방) 정책으로 사회 분위기가 바뀌면서 1985년 마침내 빛을 보게됐다. 책은 여러 출판사에서 동시 출판되면서 200만부 이상이 발간됐다.

같은 해에 역시 1년을 출판사에서 썩고 있던 마지막 증인들이 출간됐다. 편견이 없는 아이들의 시선으로 공포스러운 전쟁(2차대전)의 실상을 소개한 작품이다.

4년 뒤에는 러시아가 벌였던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범죄적 실상을 다룬 아연(亞鉛) 소년들이 출간됐다. 소련 국민들조차 먼 타국 땅에서 아연으로 된 관에 실려오는 전사자들을 통해서만 아련히 짐작할 수 있었던 전쟁의 실상을 다룬 작품이다. 책을 쓰기위해 작가는 4년 동안 전국을 돌아다니며 살아있는 참전 용사와 숨진 군인 가족 등을 인터뷰했다. 아프가니스탄을 직접 찾아가 취재하기도 했다. 작품은 숨겨진 전쟁의 진실을 파헤친 걸작이란 찬사와 함께 영웅적 전쟁을 깎아내렸다는 비판을 함께 받으며 폭발적 반향을 일으켰다.

이 작품 때문에 알렉시예비치는 재판까지 받게됐으나 민주 진영과 해외 저명 지식인들의 구명운동으로 간신히 유죄 판결을 면할 수 있었다.

이후 알렉시예비치는 사회주의 체제 붕괴와 자본주의 이행기의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하거나 자살을 시도한 사람들의 얘기를 다룬 죽음의 매력에 빠진 사람들(1993)과 체르노빌 원전 폭발 사고의 휴유증을 다룬 체르노빌의 목소리(1997) 등을 잇따라 출간했다. 체르노빌의 목소리10년간 집필 끝에 1997년 처음 출간됐고, 2005년 미국 비평가협회상을 받았다. 2008년 개정판에는 검열 때문에 초판에서 제외됐었던 인터뷰와 새로운 인터뷰가 더해졌다.

그의 책은 미국, 영국, 독일, 베트남, 인도, 일본 등 20여개국에서 번역 출판됐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등 일부 작품은 영화나 연극으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는 진실에 대한 줄기찬 탐구 정신과 독창성 등을 인정받아 자국은 물론 스웨덴, 독일 등에서 여러차례 상을 받았다. 프리드리히 에버트 재단의 최고 정치 서적 상(1998), 국제 헤르더 상(1999),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평화상(2001) 등을 수상했다. 2005년엔 전미 비평가협회상을 받았다.

알렉시예비치는 전쟁 관련 소재를 많이 다룬 데 대해 "우리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였다"면서 "우리는 항상 싸우거나 전쟁을 준비하면서 살아왔고 다른 삶은 없었다"고 말한다.

소련 시절부터 반()체제 성향의 작품을 써온 그는 소련 붕괴 이후 독립한 조국 벨라루스에서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대통령의 독재 통치에 대한 비판적 태도로 탄압을 받아 2000년대 초반부터 10여 년 동안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등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 2012년 벨라루스로 귀국해 작품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그는 2015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직후 벨라루스 수도 민스크 시내에서 연합뉴스와 한 단독 인터뷰를 가졌다. 그 인터뷰에서 그는 "남북한 분단 상황에 대해 알고 있으며 (북한과 같은) 독재 체제는 결국 붕괴할 것"이라면서 "한반도에 언젠가는 통일이 찾아올 것이지만 피를 흘리지 않고 통일을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 작가들에게 조언으로 "한국의 역사와 삶이 주는 영감을 토대로 자기 방식의 글을 쓰다 보면 노벨상 수상도 가능할 것이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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