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지방제도⑨…양주(良州), 서라벌 외곽지역
신라의 지방제도⑨…양주(良州), 서라벌 외곽지역
  • 아틀라스
  • 승인 2019.03.25 16:5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신라 초기 확대한 영토에 법흥왕 때 복속시킨 금관가야 영역

 

신라 양주(良州)는 삽량주(歃良州)라고도 했다.

통일신라의 수도권 역할을 한 지역이다. 문무왕 5(665)에 하주(下州)의 동쪽을 떼내 양산(梁山)을 중심으로 하여 삽량주를 설치하였는데, 687(신문왕 7)에 성을 쌓았다. 757(경덕왕 16) 12, 구주의 이름을 고칠 때 양주(良州)로 되었으나, 그 뒤에도 삽량주의 명칭은 계속 사용되었다.

양주는 지금의 양산시를 중심으로 신라의 수도권인 경주일대와 가락국이 있던 김해,창원지역으로 나뉜다. 금관가야인 김해를 소경(小京)으로 삼고, 12개군(), 34개현()을 관장했했다. ()의 직할현은 하나였다.

치소는 지금의 양산이다. 주에는 군부대로서 삼량화정(參良火停)과 만보당(萬步幢)을 두었다.

 

그림=김현민
그림=김현민

 

 

양주는 신라가 초기에 경주 인근지역을 정벌하고, 후에 금관가야를 병합하는 과정에서 생겨났다.

 

개국 초기 영토확장

신라는 개국 초기에 부산에서 삼척에 이르기까지 동해안 영토확장에 주력한다. 경북 동부의 경주에 위치한 신라로선 수시로 침공해오는 왜병을 저지하기 위해서 동해안을 안정시킬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탈해 (57~80), 거도(居道)가 우시산국(于尸山國)과 거칠산국(居柒山國)을 멸망시킴.

파사 23(102), 음집벌국(音汁伐國)과 실직(悉直),압독(押督)의 임금이 항복.

파사 29(108) 비지국(比只國), 다벌국(多伐國), 초팔국(草八國) 병합.

신라가 가장 먼저 진출한 지역은 동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는 길이었다. 우시산국은 지금의 울산, 거칠산국은 부산 동래지역이다. 우시산국과 거칠산국은 해상세력인 석탈해의 근거지로, 가야의 영향력이 미치면서 이탈한 것을 탈해가 되찾은 것으로 파악된다.

파사왕때 음집벌국을 병합하고, 압독이 항복해오는데, 그 지역도 경북 동부 지방이다. 파사왕때 신라는 부산에서 삼척까지 동해안을 따라 길쭉하게 영토를 확보하게 된다. 비지, 다벌, 초팔국도 경주 인근에 있던 소국으로 비정된다.

 

금관가야 정벌

신라는 이사부를 앞세워 금관가야를 정벌한다. 지증왕이 죽고 법흥왕때다.

법흥왕 때, 신라와 금관가야 사이에 본격적인 전쟁이 벌어진다. 신라는 동해안과 울릉도를 복속시켜 동쪽과 북쪽으로부터 고구려와 예(말갈), 왜의 공격로를 차단한 다음, 남부지역 초략에 나선 것이다.

금관가야는 수로왕이 건국한후 10대 구해왕(삼국유사엔 구형왕) 대에서 그 명을 다한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금관국의 멸망 연도가 진흥왕23(562)로 기록돼 있다. 일연이 대가야와 금관가야를 혼동한 것 같다. 그러면서도 중국의 사서를 이용해 532년에 신라에 항복했다는 두가지 기록을 동시에 남겼다.

 

구형왕(仇衡王): 김씨다. 정광 2(521)에 왕위에 올라, 42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보정(保定) 2년 임오(562) 9월에 신라 제24대 진흥왕이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오자 왕이 친히 군사를 지휘했다. 그러나 적의 수는 많고 아군의 수는 적었기 때문에 맞서 싸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왕은 형제인 탈지이질금(脫知爾叱今)을 보내 본국에 머물러 있게 하고, 왕자와 장손 졸지공(卒支公) 등과 함께 항복해 신라로 들어갔다. 왕비는 분질수이질(分叱水爾叱)의 딸 계화(桂花)로 세 아들을 낳았는데, 첫째는 세종(世宗) 각간, 둘째는 무도(茂刀) 각간, 셋째는 무득(茂得) 각간이다. 개황록(開皇錄)에서는, “()나라 대통(大通) 4년 임자(532)에 신라에 항복했다.”라고 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

 

법흥왕은 금관국을 들어바친 구해왕에 대해 유화조치를 내린다. 구해왕을 최고관직인 상대등 자리를 주고, 통치하던 금관국을 식읍으로 삼아 세금을 걷어 쓰게 하고, 세 아들에게 신라 최고의 관직까지 오르게 배려했다. 신라(경주) 김씨와 가야(김해) 김씨의 세력이 연대를 형성한 것이다.

(경상남도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에는 금관국 마지막 임금인 구형왕의 돌무덤이 남아있다.)

 

경남 산청군의 구형왕릉 /문화재청
경남 산청군의 구형왕릉 /문화재청

 

 

금관국은 철의 나라였다. 금관가야는 일찍이 해상무역을 장악하고, 철제품을 낙랑과 왜, 신라등에 거래했다. 초기 가야연맹의 맹주 역할을 한 금관가야는 이사부에 의해 종언을 고한다.

금관국을 병탄한 이후 신라는 녹국(㖨國, 합천군 쌍책면 성상리), 탁순국(卓淳國, 창원 인근), 안라국(安羅國, 함안)으로 진출했다. 금관국에 이어 신라가 병탄해 가는 과정에도 이사부가 군대를 직접 끌고 갔을 것이다. 이제 신라는 남부지역에서 백제와 국경을 접하게 됐다.

가야 연맹은 이제 고령의 대가야만 홀로 남게 됐다. 후기 가야의 맹주 대가야도 이사부와 그의 부하 사다함에 의해 성문이 열리고 멸망의 길을 걷게 된다.

 

경남 김해시의 수로왕릉 /문화재청
경남 김해시의 수로왕릉 /문화재청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