떼배 탐험과 해양문화④…제주~강진 ‘신화의 길’
떼배 탐험과 해양문화④…제주~강진 ‘신화의 길’
  • 채바다
  • 승인 2019.09.19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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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강진은 고난과 고통의 길이자 풍요와 희망의 항로…옹기 이동의 길, 유배의 길

 

10. 탐라와 탐진(강진의 옛 지명)뱃길 탐험 항해

제주도와 전라남도 도서들은 지리적으로 시인(視認)거리에 있어 앞서 이곳 남동 서해 연안을 통한 항해가 꾸준히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이들 연안에서 제주를 향해 항해를 하다가도 일본 열도, 유구, 중국 등지로 표류하였다가 간신히 목숨을 건져 돌아오는 사례들이 있었다.

강진은 탐진강과 강진만을 중심으로 선사시대부터 많은 부족집단들이 활동무대였다. 여러 읍면 지역에 고인돌이 고르게 분포되고 있어서 이들 부족 집단들이 해상 이동을 말해 주고 있다.

강진은 1998년 목포대학 박물관의 지표조사에서 고인돌이 83개군 687기로 나타나고 있다. 강진을 중심으로 한 전라도 고인돌 집단들이 제주로 이주해 와서 제주 용암동 고인돌 집단과 유관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제주가 옹관묘를 생산할 수 없는 조건인데도 용담동 옹관묘가 발견된 것은 영암의 옹관묘 집단들이 장묘문화가 이러한 뱃길을 통하여 건너온 것으로 보고 있고 제주 용담동, 삼양동에 집중적으로 고인돌 분포 되고 있는 것도 뱃길을 통하여 이루어 졌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곳은 삼한 시대에는 많은 세력 분포를 가지고 있는 마한세력들이 소국을 이루어 일정한 영역을 관할하는 세력으로 발전한 곳이기도 하다. 영산강유역의 선사문화와 가락국을 위시한 남동해안의 선사문화가 교차하면서 제주로 문화이동이 이루었음을 고고학적 사료들에서 찾아보게 된다.

이러한 배경에는 강진은 내륙 깊숙이 해안선이 발달하고 있어서 항해선박이 안전하게 출입항 할 수 있는 천혜의 항구 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강진을 비롯한 해남, 영암등지는 제주와 해상교통이 자연스럽게 이루어 질수 있는 즉 고대항해에서 맞춤형으로 구축되고 있다는 것이다.

삼한시대, 백제와 신라 그리고 고려, 조선시대와 근래에 까지 꾸준한 뱃길이 지속되어 왔다. 강진은 이 고장의 자랑처럼 대구면을 중심으로 고려의 국력과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고려청자 도요지가 2백여 개가 넘을 정도로 밀집되어 있어서 이러한 물자들이 해상로를 통하여 개성으로 일본과 중국으로 활발한 교역이 이루어 질 수밖에 없었다.

강진은 내륙 깊숙이 해안이 발달해 있다는 것이 물류 생산과 해운로를 강점으로 조선기술, 항해력, 천혜의 항포구, 물류생산기지와 물류 집산등으로 연계되는 해상 교통로 상에 위치하고 있어서 지리적으로 효율적인 물류 지역으로 각광 받을 수 있었다.

이처럼 강진은 남동서해로 통하는 중요한 해상 십자로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제주와 한반도 사이에 강진은 항해학적인 분야 이외에도 고대항해에서 안전한 연안항로 상에 있다. 이곳 강진은 진도, 해남, 영암, 완도, 고흥과 이어지는 연안항로가 발달하여 천혜의 자연적인 해상교통과 내륙교통망을 구축할 수 있는 곳이다.

이 당시 청자의 생산규모들을 추정해 볼때 강진이 해양 지리학적 위상을 충분히 추적할 수 있다. 이곳은 지리적으로 크고 작은 섬들이 발달하고 있어서 일본이나 중국으로 진출하는데 중요한 전략적인 항로상에 있는 것도 빼 놓을 수 없다.

대표적인 청자산업 생산기지로써 중요한 천혜의 교역항구는 고대국가의 경쟁력을 높여 가는데 크게 이바지 하였다.

이러한 해상항로의 발달로 탐진은 고려시대부터 어마(御馬),병마(兵馬)을 비롯한 많은 물산들이 오갔던 제주 뱃길의 중심에 있었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당쟁에 휩쓸려 제주 유배 길에 올라 보길도에 머물은 고산 윤선도를 비롯하여 청음 김상헌, 우암 송시열, 추사 김정희 등 많은 선비들이 유배의 뱃길로 한 시대의 아픔을 간직한 뱃길이기도 하다.

 

필자는 5060년 전 돛배를 타고 수십 년 동안 강진 칠량옹기를 싣고 제주바다를 드나들었던 20여 명이 넘는 사공 가운데 이곳 봉황리에 유일한 생존자인 신일봉(84)씨와 김우식(83)씨를 만나 이 두 노인이 겪었던 뱃길 이야기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다.

두 노인은 제주를 오고간 마지막 사공의 산 증인이다. 반세기가 넘는 옛 항해 이야기를 듣는 것은 수백 수 천 년전 항해 모습을 그대로 듣는 것 같았다. 두 노인의 이야기도 제주와 강진 사이에 수많은 섬들이 징검다리가 되어 건널 수 있었다고 한다.

예상치 않은 큰 바람을 만나면 가까운 대모도 청산도·소안도·추자도로 이어지는 섬들이 피난처로 삼을 수 있어 그나마 마음 놓고 항해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또한 이 섬들은 바람 방향이 바뀌면 며칠씩 신풍을 만나기 위한 후풍처로 쉬어갈수 있었다고 한다.

여기서 부터 한라산이 선명하게 나타나서야 한숨을 돌린다고 하였다. 이곳 강진 칠량옹기는 지금에 제주시를 비롯하여 서쪽으로는 애월, 한림지경 동쪽으로는 조천, 김녕, 행원, 세화, 성산포를 대상으로 소비처를 가지고 있어서 두 노인의 이야기로는 물량이 달려 옹기를 만들어 내기에 일손이 모자랄 지경이라는 것이다. 이 노인들의 증언을 들으면 제주가 최고의 옹기시장 소비처라는 것을 강조한다. 이처럼 뱃길은 고난과 고통도 따르지만 풍요를 가져오는 희망과 꿈의 뱃길이기도 하였다.

 

고대 탐라~벽랑국 뱃길 탐험(2006년 6월) /채바다 제공
고대 탐라~벽랑국 뱃길 탐험(2006년 6월) /채바다 제공

 

11. 신화의 뱃길 탐험

필자는 탐라와 탐진의 뱃길을 신화의 뱃길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탐라국 탄생 신화에서 그 배경을 두고 있다. 고려사지리지, 탐라지 ,영주지등 이들 고서(古書)에서는 탐라국 탄생역사들을 다음과 같이 소개 하고 있다.

이 가운데 벽랑국 찾아 갔던 목적과 배경에 대하여 간추려 기술하고자 한다.

 

원래 사람이 없던 한라산 북쪽 기슭 모흥혈에서 3신인이 솟아 나와 사냥으로 생업을 개척하고 가죽옷을 입고 고기를 먹었다. 하루는 바닷가에서 사냥을 하는데 목함이 떠 오고 있었다. 그 목함에는 붉은 띠를 두르고 자주빛 옷을 입은 사자(使者)가 타고 있었다.

이 사자가 말하기를,

나는 벽랑국 사자입니다. 우리 임금님께서 이 세 공주를 기르시고 말씀 하시기를 서해 중 산기슭에 세 신인(神人)이 계시어 장차 나라를 열고자 하는데 배필이 없으시다 하시고 신에게 명하여 세 따님을 모시라 하였습니다.

마땅히 배필로 삼으셔서 대업을 이루소서하고 사자는 홀연히 구름을 타고 날아가 버렸다.”

이 목함을 열어 보니 세 공주와 오곡과 송아지 망아지가 있었다. 이들 고, , 부 세 마을 나는 세 공주와 혼인을 하여 탐라국을 열어 갔다.

세 공주가 상륙한 곳으로 알려진 남제주군 온평리 해안도로에 연혼포는 이들 세 공주의 첫 발을 내 디딘 상륙지로써 전래되고 있다. 이곳 해안에서 서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세 공주와 탐라곡 고양부 세 청년이 만나서 혼례를 올렸다는 혼인지가 오늘에 전해오고 있다.

 

3을나와 벽랑국 세 공주와 혼인을 시작으로 탐라국을 열어 갔다는 내용을 간추려 소개하였다.

세 공주가 왔다는 벽랑국(碧浪國)은 과연 어디 일까? 당시 탐진과 탐라의 뱃길 가운데 문헌에서 나타난 벽랑도(碧浪島)를 이곳으로 추정하게 되었다. 고려사지리지(1454)碧浪島가 장흥부 속 탐진현 5개 도서 가운데 나타나고 있다.

동국여지승람(1486)에도 碧浪島가 강진현 도서 가운데 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에 동일하게 碧浪島를 비롯해서 14개 도서가 강진현 있음을 발견 하게 되었다.

이 기록에서 벽랑도의 섬 규모는 4리라고 되어 있다. 이후 김정호의 동여도(1861).대동여지도(1864)에 강진 23개 도서에도 벽랑도 기록이 나타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대동여지도표시)

이상에서 여러 고서(古書)에서 필자는 제1순위로 꼽는 벽랑도는 탐라국 신화 속에 등장하는 벽랑국으로 추정하게 되었다.

필자는 이 문제를 놓고 진도로 가서 김정호 진도문화원장을 만났다. 김정호 원장도 지금의 금일읍 소랑도를 벽랑도로 추정한다고 하였다. 김정호 원장은 전남의 옛 지명에 대한 풍부한 지식과 자료들을 분석하여 여러권의 연구 보고서와 도서들을 펴낸바 있다.

 

신라와 당나라가 연합하여 통일국가를 이루고 나서 한반도 지명들은 당의 영향력에 밀려 많은 이름이 바뀌었다. 일본의 한반도를 강점하면서부터 우리 고유의 지명들이 사라 졌다.

나라 잃고 지명조차 여지없이 겪는 수난의 한 과정이었다. 벽랑도는 이러한 시대의 아픔 속에 실종한 것이다. 이처럼 추정 되는 벽랑도는 1864년 대동여지도를 마지막으로 이 섬의 자취는 사라지고 말았다. 이곳은 오늘날 완도군 금일읍 사동리 소랑도로 추정하고 있다.

필자는 이러한 실종된 벽랑국이 탐진현과 탐라로 잇는 뱃길 가운데 있음을 추정하여 이 뱃길을 신화의 뱃길이라는 가설을 설정하게 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강진현 편에 탐진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탐라의 사자가 신라에 조공할 때에 배를 여기에 머물렀으므로 이름을 탐진이라 하였다.”고려사 지리지에는 고을나의 15세 후손인 고후 고청, 고계 3형제가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탐진에 이르렀는데 대개 신라의 성시(盛時)였다, 라고 쓰고 있다.

 

1601(선조34)7월 제주 御使로 왔던 김상헌(金尙憲)의 남사록(南槎錄)에 이렇게 써 있다.

강진 해남 두 은 모두 바다에 있는데 제주를 왕래 하는 공식적인 뱃길은 반듯이 여기에 와서 배를 탄다. 해남은 舘頭梁이고 강진은 白道島 인데 영암의 이진포가 붙어 있기 때문에 바람을 기다리는 사람은 모두 이곳에 모이고 매년 강진, 해남 양 읍에서 모여서 떠난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제주에서 출발한 화북포구는 별도포라고도 하며 바람을 기다리며 머물렀던 후풍관(候風舘이 설치되어 있던 곳이다. 이곳에는 뱃길의 안전을 기원하는 海神祠1820년에 목사 한상묵에 의해서 세워 진 곳이다.

 

다음 기록은 3대에 걸쳐 이곳 강진과 인연을 맺고 있는 이증(李增1628-1686)의 강진에서 제주로 건너갔다 돌아오는 뱃길이 순탄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다음은 그가 제주로 가기위해 바람(信風)을 기다리며 겪은 이야기를 남사일록(南槎日錄))에 소상히 남기고 있다.

이증(李增1628-1686)1679(숙종5년기미) 916일 제주 안핵 겸 순무어사로 임명되어 제주 최관의 전 목사 윤창형(尹昌亨), 정의현감 상인첨(尙仁詹)의 비행을 조사하기 위하여 1027일 한양을 떠나 강진을 거쳐 제주 화북포로 입도한 인물이다. 그는 도갑사(道甲寺)에서 이틀밤을 머물고 1125일 강진에 와서 제주의 뱃길을 건너오는 이야기를 쓴 남사일록에서 그가 쓴 한편을 만났다.

청조루(聽潮樓)에서 판 위의 운에 따라’(聽潮樓次板上韻)

강남에 이르러 바다가 여기로다. /따라온 일행 거느려 청조루에 오르니 /삼천이나 되는 파도 한라산 섬에 닿고 /구십포(九十浦)는 방장주(方丈州)와 통하네 /이는 오()나라 사람에게 왕명을 받는 곳 /어떻게 배를 탈까 근심스레 바라본다. /평생 남자 이름 내세울 큰 뜻인데 /분부를 어찌 떠들며 놀리오.”

이 시편(詩篇) 속에서 보듯이 청조루(聽潮樓)에 올라 제주로 배를 타고 건너갈 뱃길을 걱정하고 있음이 역력하게 보인다. 제주로 향하는 뱃길도 처음이지만 강진 땅을 밟은 것도 祖父와 아버지 인연으로 처음이라는 감회를 담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제주에서 상()으로 줄 격목(格木 시렁포목)과 병영(兵營)에서 받아 보낼 10통과 순영(巡營)에서 오는 10통을 합쳐 차례를 나누어 통을 만들었다. 제주 뱃사람이 서울에서 돌아와 정박하고 있는 자가 왔다. 대흥사람 안후진이 여기 와서 나를 기다린지 이미 오래 되었다.

내가 금년에 탐라순안(耽羅巡按)의 명을 입고 여기에서 바람을 기다리며 오래 머물고 있으면서 60년만에 3대에 걸쳐 이곳 강진과의 인연을 맺는구나. 그가 제주로 떠나기 앞서서 강진 땅을 밟은 감회를 다음 시편(詩篇)에서 알 수 있다.

선조께서 꽃 피운 강진 땅 /이 몸이 흰 머리되어 왔구나 /흐르는 세월 60년 되었어도 /聽潮樓 옛 자취 그대로 남아 /그 은혜로움 지금에 젖고 있네 /구름은 예되로 떠 있어 흐르고 /임금님 은영 三世에 이르니 /다시는 찾아 볼수 없으리라

 

이런 시편(詩片)들은 옛 강진과 제주사이 뱃길을 찾는데 소중하다.

-1125, 병진(丙辰) 강진에 들어 왔다. 그는 객사에 묵었다 열흘 가까이 눈비가 내려 제주 뱃길은 막혀 있었다.

- 124, 오랜만에 날씨가 개어서 금릉 객사를 나와 20리에 있는 만덕사에 도착하였다.

만덕산 백련사에서 묵었다.

백련사에 묵게 된 것은 부친께서 과시(科試)를 보기 위해 이절에서 공부를 한 인연이다.

- 126일 맑음 뱃사람이 와서 바람이 순풍이니 배를 띄우겠다는 전갈을 해 왔다.5리를 가서 부소문(扶蘇門) 배 정박처에 도착했다. 이곳 고을 수령이하 여러 사람들이 거문고와 노래로 작별을 하였다. 뱃사공이 썰물을 알리자 일행은 배에 올랐다.

軍官2,別破陣1,畵工,郭毫,書吏2,伴倘1,奴子1,湖南營吏1,康津工房1,監上1,通引2,吹手2,砲手1,刀尺2,軍官奴2,別破陣奴1,문서직1,作直1,旌義吏2(한양에서 옮),濟州 房子1,格軍18挾船格軍8명 제주인 어른 2, 남자아이2명 포함 모두 50명을 태웠다.

배가 떠나서 10리에 駕玗島 지나 5리가서 飛老島를 지나고 또 10리를 가서 伏島를 지나고 또 10리를 가서 伺侯島를 지나고 5리를 가서 莞島加里浦진을 지나 40리를 가서 밤에 白島 동쪽 기슭에 정박하였다.

오늘은 80리에서 100여리를 간 셈이다. 이날 밤 달이 밝아 산 아래 외딴 촌에 연기가 피어나고 개짖는 소리가 나는데 경치가 너무 좋았다고 적고 있다. 이 지경은 흰모래와 푸른 소나무로 가득하다.

- 127일 오후에 눈이 내리고 큰 바람일고 아침에 동쪽으로는 청산도, 서쪽으로는 소안도, 진도, 추자도가 까마득히 보인다. 두개의 돛을 달고 있다. 낮에 사서도를 지났는데 제주의 큰 바다로 느껴진다. 파도가 거칠었다. 동쪽으로 동여서도 서쪽으로 대소화탈도가 있다. 오후 7시 화북 방호소 포구에 정박하였다. 이상에서 이증(李增)이 제주 바다를 건너온 뱃길을 살 펴 보았다.

여기서 말하고 있듯이 제주 바다는 맑게 개어 있어도 풍랑이 일고 있어서 건너는데 어려움을 겪은 일들을 소상히 쓰고 있다.

 

그는 해를 넘기고 1680326일부터 한양으로 돌아가기 위해 하북 포구에서 묵었다. 날씨로 인하여 발이 묶여 강진에서 겪엇었던 것처럼 제주에서 다시 강진으로 가는 뱃길 또한 순탄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화북 포구에서 바람을 기다린 것이 꼬박 8일을 걸렸다.

44일에 출항하게 된 것이다. 이때에도 지난해 함께 온 18명과 사공과 격군 22명 별선에 사공 격군 14명 급수선 사공과 격군 10명이다. 대소화탈섬을 12시에 지나는데 물결이 높고 배가 흔들려 멀미를 했다. 뱃사람들은 합장을 하여 관세음보살을 외우며 이 때 상황을 말해주고 있다. 저물어 갈 때 추자도를 지났다.

뱃사람들이 말하기를 이 화탈을 지나면 걱정이 없다고 하였다. 저물어서 어란진을 지나 밤이 깊자 노를 저었지만 조수에 밀려 닻을 내리고 증도(甑島)에서 5리쯤 되는 곳에 정박하였다. 바람이 불지 않아 증도에 하선하여 바람을 기다리다. 어렵게 강진으로 들어와 객사에 묵은 후에 한양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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