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타제국②…페슈와 시대
마라타제국②…페슈와 시대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3.01.22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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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는 명목상 군주, 바트가문 출신이 재상 세습하며 통치…전성기 구가

 

무굴제국의 아우랑제브 황제는 마라타의 2대 황제 삼바지를 처형한 후 그의 아들 샤후(Shahu)를 궁궐로 데려가 인질로 삼았다. 삼바지가 죽고 이복동생 라자람(Rajaram)이 피난해 나라를 다시 세웠다. 라자람은 11년간 마라타를 지키다가 1700년 나이 서른에 사망했다. 아들 시바지 2세는 네 살에 불과했다. 마자람의 왕비 타라바이(Tarabai)가 섭정이 되어 마라타를 이끌었다.

1707년 무굴의 아우랑제브가 죽고 바하두르 샤가 제위에 올라 아버지 시대의 적대관계를 청산하는 차원에서 인질로 잡혀 있던 삼바지의 아들 샤후를 석방했다. 샤후가 마라타에 돌아와 보니, 사촌동생이 제위에 올라 있고, 숙모가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아버지 대의 권력투쟁이 아들 대로 이어졌다. 샤후와 그의 어머니는 시바지에게 황위를 내놓으라고 했고, 시바지측은 권력을 내줄 생각이 없었다. 결국 양측 사이에 내전이 벌어졌고, 마라타의 대신들은 두 파로 갈라져 대치했다. 이때 실력자였던 발라지 비슈와나트(Balaji Vishwanath)가 샤후를 황제로 옹립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발라지 비슈와나트 /위키피디아
발라지 비슈와나트 /위키피디아

 

샤후는 어려서부터 무굴 궁궐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마라타의 실정을 몰랐고, 그의 수하도 없었다. 따라서 샤후 1(재위 17081749)1713년 발라지를 재상으로 임명해 정무를 맡길수 밖에 없었다. 마라타에서 재상은 페슈와(Peshwa)라고 하는데, 샤후 이전에는 황권이 강해 페슈와는 군주의 대리인에 불과했고, 세습하지도 못했다. 하지만 바트(Bhat) 가문의 발라지는 사실상 군주에 버금가는 권력을 행사했고, 후손에 페슈와 지위를 물려 주었다. 바트 가문은 발라지 비슈와나트 7(1713~1720)에서 바지라오 20(1720~1740), 발라지 바지라오 21(1740~1761), 마다브라오 11(1761~1772)까지 459년간 페슈와를 세습하며 마라타 제국을 전성기로 이끌었다. 마라타의 페슈와는 일본 역사에서 쇼군(將軍)과 비슷하다. 황제는 명예만 유지하고 실권은 페슈와가 행사했다.

 

발라지 비슈와나트(1713~1720)

발라지 비슈와나트(Balaji Vishwanath)1714년 서부 해안에서 해군력을 보유하고 있던 해적 칸호지 앙그리아(Kanhoji Angria)와 로나발라 조약을 맺었다. 이로써 마라타는 해군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칸호지 앙그리아는 샤후 1세를 황제로 인정했다. 칸호지는 유럽세력을 미워해 포르투갈과 영국의 해적과 사략선을 공격하거나 나포하기도 했다. 또 포르투갈의 항구들을 공격했다.

1719년에는 무굴제국의 왕위계승전에 참여해 라피 웃 다르자트(Rafi ud-Darajat)를 황제로 옹립하는데 성공했다샤후가 돌아온지 12년만에 무굴을 봉신국으로 전락시킨 것이다.

바지라오 1세 /위키피디아
바지라오 1세 /위키피디아

 

바지라오 1(1720~1740)

17204월에 발라지 비슈와나트가 죽은 이후, 샤후 1세는 그의 아들 바지라오 1(Bajirao I)를 새로운 페슈와로 임명했다. 바지라오는 17404월에 죽을 때까지 20년 동안 41번의 전투를 치렀는데, 단 한번도 패배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마라타제국의 영토를 현대 인도 면적의 3%에서 30%로 확장하는 공로를 세웠다.

1728228일 팔케드 전투에서 바지라오 1세는 하이데라바드의 니잠 아사프 자흐 1세를 격파했다. 1737년에는 무굴의 수도인 델리 인근까지 진출했는데, 군대를 이끌고 출정한 무굴 제국의 제후들을 보팔 전투에서 패퇴시켰다. 이후 마라타는 무굴제국에게서 막대한 양의 조공을 받고, 말와 지역을 할양받았다. 바지라오 1세의 시대에는 뭄바이 북쪽 50km 부근에 있는 해안 마을 바사이(Vasai)에서 포르투갈 군대를 물리쳤다.

 

발라지 바지라오(1740~1761)

바지라오 1세가 죽고 그의 아들인 발라지 바지라오(Balaji Bajirao)가 페슈와로 세습하는데 일부 봉신들이 반대했다. 그럼에도 샤후 황제는 그의 페슈와 승계를 승인했다. 발라지 바지라오는 이버지에 이어 수많은 군사 원정을 벌였으며, 이 과정에서 수많은 인명을 살상해 반발을 샀다.

마라타군은 라구지 본슬레(Raghuji Bhonsle)의 지휘 하에 남부와 동부로 세력을 확장했다. 라구지는 1741년부터 1748년까지 벵골 지역을 6차례나 침공해 점령했다. 이때 마라타 군대는 벵골을 무자비하게 통치했다. 마라타는 벵골 주민들에게 돈을 바치게 했고, 돈을 내지 못하거나 미납한 자가 있으면 잔인하게 고문을 하거나 죽여버렸다. 네덜란드의 기록에 의하면 최소한 40만 명의 벵골인들이 이 때 마라타에 의하여 학살되었다고 한다. 이에 벵골에서는 마라타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했다.

발라지 바지라오 재임기에 마라타는 무굴제국을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두라니 왕조가 무국제국을 약탈하고 위협하자, 마라타는 1752년에 무굴의 수도 델리를 보호해준다는 조약을 맺었다. 이에 두라니의 아흐마드 샤는 북인도를 침공하고 델리를 점령한 후, 웃드의 나바브를 델리의 총독으로 남겨두고 물러갔다. 이에 마라타는 웃드의 나바브 공격해 물리치고 델리를 다시 점령하게 된다.

마라타는 아프가니스탄의 팽창을 저지하기 위해 1750년대 후반에 펀잡과 카슈미르를 공격해 점령했다. 이 때 마라타의 영토는 최대로, 인도의 절반가량을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달이 차면 기우는 법. 마라타는 광대한 영토에 대한 통치의 어려움으로, 지방 봉신들이 독자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발라지 바지라오 재임기에 홀카르(Holkar), 본슬레 (Bhonsle) 가문은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했다. 마라타제국은 단일 대오에서 연맹체로 전환해 나가고 있었다.

마라타 제국의 한계는 1761년 두라니 왕조와 붙은 파니파트 전투에서 드러났다. 델리 북부의 파니파트(Panipat)에서는 인도대륙을 놓고 세차례의 대회전(1526, 1556, 1761)이 벌어졌는데, 이때의 전투를 역사가들은 제3차 파니파트 전투라고 부른다.

파니파트 전투에서 두라니측 약 10, 마라타측 약 5만이 뒤섞여 싸워 마라타의 대패로 끝났다. 마라타 패배의 원인은 여럿이지만, 마라타가 영토 확장 과정에서 피지배국을 혹독하게 다룬 것이 업보로 돌아갔다는 평가가 나온다. 같은 힌두교를 믿는 나라들도 마라타에 등을 돌린데 비해 두라니 왕조에는 이슬람 세력이 뭉쳐 있었다. 파니파트 전투 이후 마라타는 더 이상 영토를 확장시키지 못하고, 쇠퇴의 길로 들어섰다.

 

1760년대 마라타제국 영토 /위키피디아
1760년대 마라타제국 영토 /위키피디아

 

마다브라오 1(1761~1772)

발라지 바지라오(Madhavrao)는 파니파트 전투 패배에 대한 충격으로 얼마후 사망했다. 그의 아들 마다브라오 1세가 페슈와를 이어받았다.

그는 분열된 마라타를 다시 하나로 묶으려 노력했다. 또 인도 북부로 진출하는 대신에 남부지역 공략을 강화해 마이소르와 하이데라바드를 쳤다. 마다브라오는 북부 국경에도 장군들을 보냈으나, 확장보다는 유지에 주력했다. 이런 노력으로 1770년대초에 마라타는 다시 권위를 회복하게 되었다.

하지만 마다브라오 1세는 1772년에 27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고, 그 이후 페슈와 승계를 놓고 심각한 권력투쟁이 벌어졌다.

 


<참고한 자료>

Wikipedia, Maratha Empire

Wikipedia, Maratha Peshwa and Generals from Bhat Family

Wikipedia, Balaji Vishwanath

Wikipedia, Bajirao I

Wikipedia, Balaji Baji Ra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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