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타제국③…각개격파
마라타제국③…각개격파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3.01.23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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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슈와 놓고 바트 가문의 싸움, 5대 군벌 형성…영국, 마라타 분열 이용

 

강대함은 자만을 부르고, 자만은 분열을 초래한다. 분열은 다시 멸망의 길을 이끈다. 마라타제국도 이 길을 갔다.

페슈와를 세습한 바트 가문은 5대에 이르러 집안 싸움이 벌어졌다. 1772년 바트가의 4대 페슈와 마다브라오 1세가 사망하고 바지라오의 막내아들 나라얀라오(Narayan Rao)17살의 나이에 페슈와로 추대되었다. 나라얀라오는 1년도 되지 않아 이듬해 삼촌 라구나트라오의 부하에 의해 살해되었다. 나라얀라오의 죽음의 배후에 삼촌이 개입했을 것이란 강한 의심이 제기되었으나, 라구나트라오(Raghunath Rao)는 자신과의 관련성을 강하게 부인하고 조카가 비운 자리를 차지했다.

그런데 나라얀라오가 죽은후 임신중이던 그의 아내가 아기를 낳았다. 라구나트라오의 살인 의혹이 풀리지 않던 차에 정통 후계자가 태어난 것이다. 12명의 마라타 대신들이 회의를 열어 갖난 아기를 페슈와로 옹립하고, 섭정체제를 구축하기로 결의했다. 이 아기가 마다브라오 2(Madhava Rao II)이고, 섭정은 마라타의 마키야벨리로 불리는 나나 파드나비스(Nana Phadnavis)가 맡았다.

 

마라타 기병 /위키피디아
마라타 기병 /위키피디아

 

1년도 되지 않아 쫓겨난 라구나트라오는 봄베이(지금의 뭄바이)에 있는 영국 동인도회사 지사를 찾아갔다. 봄베이에 주재하던 영국인들은 호박이 넝쿨째 들어온줄 착각했다. 동인도회사 봄베이 지사는 17753월 라구나트라오와 수라트 조약을 체결했다. 조약에 의하면 살세트, 바사이를 영국에 양도하고, 서부 무역항 수라트와 바루치의 세수를 영국에 넘겨주는 것이다. 동인도회사는 그 댓가로 2,500명의 병력을 라구나트라오에게 지원하는 조건이었다.

이 조약은 명백히 사기행위였다. 라구나트라오는 쫓겨난 인물이고, 조약을 체결할 지위에 있지 않았다. 영국은 마라타의 내분에 한쪽편을 들어 이득을 얻으려는 비열한 작태였다. 동인도회사 군대는 라구나트라오를 앞세워 마라타의 수도 푸나로 진격했다. 마라타군은 방어에 나섰지만 우세한 동인도회사군에 밀려 150명의 전사자를 냈다.

이런 가운데 캘커타에 있는 동인도회사 현지 본부는 수라트 조약의 문제점을 인식했다. 캘커타 본부는 봄베이에 협정이 무효라고 주장했으나, 봄베이 지사는 본부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 1777년부터 양측의 무력 충돌이 격화되었다. 마라타군 8만명과 영국군 35천명이 와드가온 전투에서 맞붙었는데, 영국이 패배했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17821월 살바이 조약을 체결해 1775년 이후 할양받은 영토를 돌려줄 것을 약속했다. 이 전쟁이 앵글로-마라타 1차전쟁이다. 전쟁에서 마라타가 승리했고, 영국은 그후 20년 동안 마라타와 평화적으로 관계를 유지했다.

 

1차 앵글로-마라타 전쟁에서 영국의 항복을 받은 모습을 그린 마라타의 벽화 /위키피디아
1차 앵글로-마라타 전쟁에서 영국의 항복을 받은 모습을 그린 마라타의 벽화 /위키피디아

 

갓난아이 페슈와를 요람에 놀게 하고 마라타의 수도는 섭정을 맡은 나나 파드나비스에 의해 장악되었다. 페슈와의 명령은 먹히지 않았다. 지방의 군벌들은 독립 왕국처럼 행세했다. 마라타는 여러 지방세력의 연맹 형태로 유지되었다. 그중 다섯 가문이 부각되었다. 다섯은 수도 푸나의 페슈와 세력, 바로다의 가에크와드(Gaekwad), 그왈리오르의 신데(Shinde), 인도르의 홀카르(Holkar), 나그푸르의 본살레(Bhonsale) 가문이었다.

각 가문은 군대를 별도로 보유, 운영했고, 무굴제국의 행정제도를 갖추었다. 특히 신데 가문은 군대를 유럽식으로 조직하고 무기공장도 가동했다. 한때 인도반도의 절반을 차지했던 마라타 제국은 다섯 제후에 의한 전국시대(戰國時代)로 전환되었다.

 

17951027, 21살의 페슈와 마다브라오 2세는 궁궐 성루에서 투신해 자살했다. 자살의 원인은 규명되지 않았으나, 섭정의 간섭에 시달리다 죽음을 선택한 것으로 해석되었다. 마다브라오에게는 후손이 없었다. 나나 파드나비스 등 마라타의 중신들은 폐족이 된 라구나트라오의 아들 바지라오 2세를 페슈와로 옹립했다. 그는 역적의 자식이어서 페슈와가 되기 전까지 거의 감금되어 살았고, 교육을 전혀 받지도 못했다. 그는 본능적으로 죽음의 위협에 민감했다.

1800년 마라타의 권신 나나 파드나비스가 사망했다. 그 공백을 신데 가문이 낚아 챘다. 다울랏라오 신데는 반대파를 숙청했다. 신데 가문이 수도를 장악하고 페슈와의 이름으로 명령을 내리자, 바지라오는 위협을 느껴 영국인 장군 아더 웰슬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1802년 신데의 라이벌인 콜카르 가문이 수도로 군대를 이끌고 왔다. 바지라오는 콜카르 가문의 수장 야슈완트의 형제를 죽인 적이 있어 그 보복이 두려웠다. 홀카르 군대는 신데 군대를 격파하고 수도 푸나로 진입했다. 바지라오는 봄베이로 탈출했다. 야슈완트 홀카르는 바지라오의 이복형제 암룻라오(Amrut Rao)를 새 페슈와로 앉혀 놓고 지방의 군벌들에게 이를 통보했다.

28년전 페슈와에서 쫓겨난 라구나트라오의 행태와 유사한 상황이 벌어졌다. 이번엔 영국 동인도회사가 마라타 군벌들의 분열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봄베이로 도주한 바지라오는 자신을 페슈와로 인정해 주고 군대도 달라고 요구했다. 대신에 스스로 영국의 보호국이 되겠다고 했다. 이 조건으로 180212월 바지라오와 동인도회사는 바세인 조약을 체결했다.

 

1802년 마라타의 페슈와 바지라오 2세가 영국과 바세인 조약을 체결하는 그림 /위키피디아
1802년 마라타의 페슈와 바지라오 2세가 영국과 바세인 조약을 체결하는 그림 /위키피디아

 

페슈와가 영국과 조약을 체결했다는 소식에 가에크와드 가문을 제외하고 군벌들이 일제히 반벌했다. 영국은 바지라오를 앞세워 전쟁을 벌였고, 이렇게 해서 제2차 앵글로-마라타 전쟁이 벌어졌다.

1803년의 아사예 전투와 라스와리 전투 등에서 신데-본슬레 연합군이 영국에 패배하고, 그해 12월 본슬레와 신데는 차례로 영국과 강화를 맺고 전선을 이탈했다. 1803년 델리 전투에서 신데 가문의 세력권에 있던 무굴제국의 델리가 영국에 점령당해 무굴 제국은 1803년부터 영국의 보호국이 되었다.

야슈완트 홀카르는 1804년초 영국과 협상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전쟁에 들어갔다. 홀카르군은 한 때 무굴 황제를 보위하기 위해 델리를 포위공격하기도 했지만 영국군의 공격에 패배하게 된다. 1805년 영국은 오리사와 구자라트 서쪽지역 등을 할양받고, 전쟁을 중단했다. 유럽에서 벌어진 나폴레옹 전쟁에 집중해야 했기 때문이다.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고, 영국은 마라타를 접수하기 위해 18173차 앵글로-마라타 전쟁을 도발했다.

페슈와 바지라오 2세는 장군 바푸 고칼레와 함께 저항했으나, 1818년 영국군에 항복했다. 바지라오 2세가 항복 문서에 조인함으로써 마라타제국은 공식적으로 소멸했다. 바지라오 2세는 페슈와 직할령을 몰수당하고 비투르(지금의 칸푸르)에서 연금 수급자로 생활하게 되었다.

신데-홀카르의 지배 하에 있던 라지푸트 왕국은 영국의 보호국이 되어 제후국(princely state)의 지위를 유지했다. 제후국은 명목상의 주권을 갖고 내정 권한을 가졌다. 1947년 영국이 인도통치를 종식시킬 때 제후국은 500여개나 되었다

마라타 제국의 명목상 황제(차트라파티)였던 프라타프 싱(Pratap Singh)은 마하라슈트라에 사라타(Sarata) 제후국의 수장으로 예우했으나, 1848년 사망한 후 아들이 없어 사타라 영토는 영국 직할령으로 흡수되었다.

이로써 무슬림 국가인 무굴제국을 지배하고 인도 중북부 광대한 영토를 차지했던 힌두교 국가는 영국의 지배하에 넘어가게 되었다.

 


<참고한 자료>

Wikipedia, Narayan Rao

Wikipedia, Raghunath Rao

Wikipedia, Madhavrao II

Wikipedia, Baji Rao II

Wikipedia, First Anglo-Maratha War

Wikipedia, Second Anglo-Maratha War

Wikipedia, Third Anglo-Maratha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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