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황후릉의 파사석은 인도에서 왔을까
허황후릉의 파사석은 인도에서 왔을까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3.07.15 13: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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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돌은 아닌 것은 분명…입증 어렵지만 신화 그 자체를 즐겨야

 

저 돌덩이는 정말로 인도에서 온 것일까.

경남 김해 수로왕비릉에서 층층히 쌓여 있는 파사석탑을 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파사석은 금관가야의 시조 수로왕의 비 허황옥이 인도 아유타국에서 바다를 건너올 때 신의 노여움을 잠재우기 위해 싣고 왔다는 돌이다. 일연 스님은 삼국유사 금관성 파사석탑조에 이렇게 썼다.

파사석탑(婆娑石塔)은 금관국 시조 수로왕의 왕비 허황옥(許黃玉)이 서기 48년에 서역 아유타국(阿踰陁國)에서 싣고 온 것이다. 애초에 공주가 부모의 명을 받들어 바다를 건너 동쪽으로 향해 가려다가, 수신(水神)의 노여움을 사서 가지 못하고 되돌아왔다. 아버지인 왕에게 되돌아온 이유를 아뢰자 왕이 이 탑을 싣고 가라고 명하였다. 그러자 곧 순조롭게 바다를 건너 금관국의 남쪽 해안으로 와서 정박하였다.”

일연은 탑의 모양에 대해서도 설명해 두었다. “탑은 사각형에 5층인데, 그 조각은 매우 기이하다. 돌에는 희미한 붉은 무늬가 있고 그 질이 매우 연하여 우리나라에서 나는 돌이 아니다.” 고려 시대에 파사탑이 인도에서 왔는지 검증도 했다. 일연은 닭 벼슬의 피를 찍어서 시험했다고도 했다.

왜 닭 벼살의 피를 찍어 발라 검증했을까. 중국 의서인 본초강목에 따르면, 파사석이란 돌은 약재로 사용되며 해독작용을 하고 값이 비싸다 한다. 또 태우면 유황냄새가 나고 닭 볏의 피를 묻히면 응고되지 않고 피가 물로 변하는 특징을 가졌다고 한다. 고려시대 사람들이 파사석의 붉은 빛을 검증하려고 했던 것이다.

 

파사석 /박차영
파사석 /박차영

 

파사석이 배에 실려 있었다면 배의 무게 중심을 잡는 평형성 역할을 했을 것이다. 삼국유사의 내용을 액면 그대로 믿으면, 이 돌은 2천년 전에 인도에서 건너온 돌이다. 저 돌의 정체를 찾기 위해 많은 고고학자, 지질학자들이 동원되었다.

문화재청이 내린 결론은 이렇다. 돌은 조금 붉은 빛의 옥문무늬가 있고 질도 달라 우리나라 돌의 유형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닭 벼슬피에 가루로 만든 파사석과 일반석으로 실험한 결과 파사석 부분은 물기가 계속 남아 있는 반면 일반석은 건조해 말라버렸다고 한다.

어떤 이는 인도 남부에 파사석과 유사한 돌을 흔히 찾아볼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고 저 돌이 인도에서 왔다는 확증은 없다.

 

파사각 /박차영
파사각 /박차영

 

파사(婆娑)란 말은 고대 인도의 범어(梵語)에서 나왔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는 범어로 유()이고, ()는 의미는 체(, 진실한 도리)란 뜻이며, 파사는 유체(有諦)로서, 즉 일체의 지혜가 현증(現證)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설명이 더 어렵다.

파사석탑은 원래 호계사라는 절에 있었는데, 그 절의 위치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질 않다. 조선시대에 김해부사 정현석이 이 탑은 허황후가 아유타국에서 가져온 것이니 허황후릉에 두어야 한다고 해 지금의 자리에 옮겨놓았다. 삼국유사엔 탑이 5층이라고 했는데, 지금은 여섯 개 층으로 되어 있다. 탑을 옳기고 개수하고 복원하는 과정에서 하나가 더 올라간 게 아닐까.

 

수로왕비릉 /박차영
수로왕비릉 /박차영

 

허황옥은 수로왕의 왕비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수로왕이 배필을 만나지 못하자 신하들이 배필을 구하라고 간한다. 수로왕은 내가 이곳에 온 것은 하늘의 명이고 나의 배필도 하늘의 명이오라며 유천간이란 신하에게 망산도에 가서 기다리라고 했다. 얼마후 바다에서 붉은 돛을 달고 붉은 깃발을 휘날리는 배가 도착했는데, 그 안에 아유타국에서 온 허황후가 타고 있었다. 두 사람은 부부가 되었다.

수로왕과 허황옥은 슬하에 10명의 아들과 2명의 딸을 두었다. 이 가운데 첫째 아들이 2대 거등왕에 오르고, 둘째와 셋째는 허황옥의 성씨를 물려받아 김해 허씨의 시조가 된다.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가 결혼을 하지 않는 건 이 설화에 따른 관습이다. 나머지 7명의 아들은 경남 하동의 지리산 자락에 있는 칠불사에 들어가 성불을 했다고 한다.

 

아유디아 위치 /위키피디아
아유디아 위치 /위키피디아

 

허황옥이 왔다는 아유타국(阿踰陁國)은 어디인가.

아유타국은 기원전 3세기경에 인도 중부 갠지스강 유역에 번성한 아유디아(Ayudia)국이라는 관련시킨 견해가 있다. 아유디아는 AD 20년경에 외부의 공격으로 붕괴되었다. 허황옥이 남해 주포에 도착했다는 AD 48년과는 시차가 있다. 지금도 아유디아시가 있는데, 불교시대(BC 6~5세기)에는 100여 개의 사원이 늘어선 불교 중심지였다고 한다.

당나라 때 승려 현장이 쓴 대당서역기에 아유타국이 등장하는데, 그 시기는 7세기경이다.

 

전승기록을 지나치게 따지면 허망할 때가 있다. 신화는 신화 그 자체로 보고, 살리고 즐기는 게 옳다. 곧이 따지면 실망만 커진다. 고대에도 인도에서 말래카 해협을 지나 중국, 한반도를 오가는 해로가 있었을 것이다. 그 해로로 인도 문화가 건너왔고, 그 스토리가 김해에 윤색되어 남아 있는 것이다.

김해 지역엔 허황후 스토리가 다양하게 남아 있다. 허황옥은 오빠 허보옥(許寶玉)과 함께 도착했는데, 허보옥은 산에 들어가 장유사(長遊寺)를 세우고 수도를 했다고 한다. 허보옥의 입산수도가 사실이라면 가야에서 고구려보다 먼저 불교가 들어온 것이 된다. 이 이야기는 스님이 쓴 삼국유사에는 없고, 민가에 전설로 내려온다. 장유사, 장유계곡, 장유암 등의 지명이 여기서 유래한다.

책표지(알라딘)
책표지(알라딘)

 

수로왕비릉은 파사석찹에 비해 스토리도 없고 단조롭다. 높이 5m 정도의 원형 봉토무덤으로서, 무덤의 밑부분에 특별한 시설은 없다. 무덤 주위에는 얕은 돌담을 4각형으로 둘러 무덤을 보호하고 있으며, 앞 쪽에는 긴 돌을 사용하여 축대를 쌓았다. 중앙에는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가락국수로왕비 보주태후허씨릉’(駕洛國首露王妃 普州太后許氏陵)’이라고 새겨져 있다.

부속건물로 숭보제·외삼문·내삼문·홍살문이 있으며, 보통 평지에 있는 무덤과는 달리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 도굴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수로왕비릉은 국가지정 사적으로, 파사석탑은 경상남도 문화재자료로 등록되어 있다. 거꾸로 되어 있어야 하지 않을까. 파사석탑 신화가 설화로 전해진다고 해서 문화재 전문가들이 국가문화재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전승기록이 고려시대부터 전해온다는 점을 감안하면 국가문화재로서의 가치는 충분하지 않을까. 문화재 전문가들이 너무 옹색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인도인들이 허황옥의 스토리에 감명한다. 2005년에 한국에 부임한 주한인도대사인 나게시라오 파르타사라티는 파사석탑에 얽힌 이야기를 듣고 소설 비단왕후를 펴냈다. 허황후릉 주변엔 인도인들이 보낸 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인도인들은 머나만 동아시아 국가의 신화를 믿는데, 우리는 아직 스토리의 진실성에 연연해 하고 있는게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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