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로왕릉의 두 마리 물고기
수로왕릉의 두 마리 물고기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3.07.16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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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곳의 쌍어문, 인도 문화 영향이란 종래의 해석…역사적고증으론 조선후기의 창작물

 

김해 수로왕릉을 가보고 싶었던 것은 가락국의 신화의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수로왕(首露王)은 가락국의 시조이자 김해 김씨의 시조다. 가야는 가락국이라고도 불렀고, 김해의 가야는 금관국 또는 금관가야라고 했다. 수로왕의 신화는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기록되어 있다.

나라가 없던 시절에 춘삼월 어느 날, 하늘의 명을 받아 아홉 족장(九干)이 사람들과 함께 구지봉(龜旨峰)에 올라갔다. 그 곳에서 하늘에 제사 지내고 춤추고 노래하자 하늘에서 붉은 보자기로 싼 금빛 그릇이 내려왔는데, 그 속에는 황금색 알이 6개 있었다. 이 알에서 남아가 차례로 태어났고, 그 중 제일 먼저 나온 아이를 수로라 하였다. 아홉 족장들은 수로를 가락국의 왕으로 모셨고, 다른 남아들은 각각 5가야의 왕이 되었다. 수로는 천명을 받아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온 아유타국(阿踰陀國)의 왕녀 허황옥(許黃玉)을 왕비로 맞았다.

전형적인 난생설화다. 외래의 부족이 토착부족을 누르고 지배자가 되었음을 암시한다. 북방의 수로왕이 남방의 허황후를 맞아 토착세력을 누르고 지배세력을 형성했다는 신화적 표현이다.

수로왕은 강력한 군주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파사이사금조에 가야 수로왕이 신라 왕이 골치아파하는 국경분쟁을 중재하는 내용이 나온다. 서기 102(파사 23)이다. 신라의 탈해왕도 처음에 금관국의 해변에 도착했으나 수로왕과 싸우다가 패배해 신라 아진포 해변에 내렸다고 삼국유사(탈해왕)에 적혀 있다. 여러 역사 기술로 보아 금관가야의 수로왕은 동해안과 남해안 일대에서 패자로 군림했던 것으로 보인다.

 

숭화문을 들어가면 붉은 색 칠을 한 홍살문이 나탄다. 홍살문을 지나 곧게 뻗은 대로를 따라가면 가락루가 나온다. 가락루 다음에 납릉정문(納陵正門)이 나오고, 그 안에 무덤이 수로왕의 무덤이다. 수로왕릉은 납릉(納陵)이라고도 부른다. 따라서 납릉정문은 수로왕릉의 정문이다. 왕릉은 정확히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알수가 없다.

 

납릉정문 /박차영
납릉정문 /박차영

 

납릉정문에는 위쪽 좌우에 흰색 물고기가 그려져 있다. 이 물고기는 신령스런 물고기라고 하여 신어상(神魚像)이라고도 한다. 또 두 마리 물고기가 있어 쌍어문(雙魚文)이라고도 한다. 쌍어문은 안향각 문 위의 공포에도 새겨져 있다. 쌍어문과 언향각을 합치면 쌍어는 모두 4곳이다.

자세히 보면 두 마리 물고기 사이에 남방식 불탑과 두 개의 양궁(洋弓)과 두 마리의 코끼리 및 연꽃 봉오리가 그려져 있다. 사람들은 그 물고기가 잉어라고 한다. 여기에 해석이 덧붙여진다.

한 쌍의 잉어는 허황후가 왔다는 야유타국(아요디아) 전승의 신비한 물고기를 상징하고 두 개의 양궁은 태양신의 화신이며 활의 명수인 라아마를 상징한다는 것이다. 해석은 한발 더 나아간다. 이 그림은 허왕후 일행이 쌍어문을 국가의 문장으로 삼았던 인도의 아요디아국에서 난을 피해 중국을 거쳐 김해의 금관가야로 이주해 온 것을 문양으로 남겼다는 해석이다.

 

납릉정문 위의 쌍어문양 /박차영
납릉정문 위의 쌍어문양 /박차영

 

그런데 의문이 든다. 쌍어가 인도에서 건너온 문양이라면 왜 허황후 무덤, 즉 수로왕비릉에 있어야지 수로왕릉 문 앞에 그려졌을까. 그리고 문양이 그려진 목조 건축물이 2천년을 버텼다는 것인가.

국사편찬위원회가 운영하는 우리역사넷에 따르면, 쌍어문이 새겨진 건물은 1792(정조 16)까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쌍어문은 금관가야 때부터 지속적으로 이어져 왔을 가능성은 없다. 쌍어문은 문양이 새겨진 납릉정문과 안향각 건물의 건립과 나타났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게 국사편찬위원회의 해석이다. 안향각의 쌍어문은 순조대에 새겨진 것이고, 납릉정문의 쌍어문은 정조 대의 신축 때나 헌종대에 새겨진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수로왕릉의 쌍어문은 조선 후기 어느 시점에 만들어졌다고 보아야 한다.

하지만 쌍어문에 대한 역사적 고증은 먹혀들지 않는다. 오히려 인도에서 왔다는 신비적 해석이 널리 퍼져 있고, 김해시는 기존의 해석을 강화한다. 최근 고속도로 IC에 대형 쌍어 조형물이 설치된 것이 이런 분위기를 대변한다.

 

수로왕릉 /박차영
수로왕릉 /박차영

 

수로왕릉은 1963121일 사적 제73호로 지정되었다. 무덤 높이는 약 5m의 원형 봉토이며 주위 18,000여 평이 왕릉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수로왕릉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와 조선왕조실록, 읍지 등에서 찾을수 있다. 삼국유사에 김수로왕은 허왕후가 죽은 지 25년이 지난 서기 199년에 158세의 나이로 죽었다고 한다. 이에 나라 안의 사람들이 대궐의 동북쪽에 빈궁(殯宮)을 세우고 여기서 장사를 지내고 수로왕묘라고 이름지었다.

고려 문종대까지는 비교적 능의 보존상태가 좋았다. 조선 초기에는 많이 황폐해졌는데, 세종실록에 수로왕릉과 수로왕비릉에 대해 무덤을 중심으로 보호구역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무덤이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선조 13(1580) 수로왕의 후손인 허수가 수로왕비릉과 더불어 크게 정비작업을 마친 후다.

이수광은 지봉유설(1614)에서 임진왜란 때 수로왕릉이 도굴되었고, 당시에 왕이 죽으면 주위에서 함께 생활하던 사람들을 같이 묻는 순장이 있었다고 적었다.

왕릉 구역에는 신위를 모신 숭선전과 안향각·전사청·제기고·납릉정문·숭재·동재·서재·신도비각·홍살문·숭화문 등의 건물들과 신도비·문무인석·마양호석·공적비 등의 석조물들이 있다.

수로왕릉 능침 좌측에 1988년에 조성된 숭신각 신도비 세 개가 서 있다. 신도비에는 가락국과 숭선전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연화대석(蓮花臺石)은 가락국 중엽에 조각되었다는 설명이 붙어 있다. 연꽃문양은 불교의 상징인데, 가락국에 불교가 들어왔다는 얘기다. 믿거나 말거나.

 

능소화 담장 /박차영
능소화 담장 /박차영

 

쌍어문이든, 연화대석이든, 부풀려진 해석을 떠나면 현실의 아름다움이 보인다. 바로 능소화다. 우리가 방문했을 땐 능소화가 절정이었다. 장미처럼 화려하진 않아도 수로왕릉 건축물 돌담에는 여름 능소화가 관람객들을 끌었다.

능소화(凌霄花)에는 애잔한 전설이 내려온다. 조선 광해군 시절에 궁궐에 소화(霄花)라는 궁녀가 임금의 눈에 띠어 하룻밤 사이에 빈의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다른 비빈들의 시샘으로 다시는 임금을 보지 못하고 담장 주변을 서성이다 죽었다. 소화가 죽은 후 왕궁 담장에는 꽃잎을 활짝 벌린 꽃이 피었는데, 그 꽃이 능소화라고 한다.

 

홍살문 /박차영
홍살문 /박차영
가락루 /박차영
가락루 /박차영
신도비 /박차영
신도비 /박차영
연화대석 /문화재청
연화대석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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