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산된 일본의 신라정토계획
무산된 일본의 신라정토계획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3.09.17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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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신라와 오랜 외교분쟁, 안사의난 이후 발해와 협공 시도…발해는 거부

 

일본이 8세기 중엽에 신라를 정벌하겠다고 계획한 적이 있다. 역사학자들은 이를 일본의 신라정토계획(新羅征討計劃)이라 하는데, 신라의 경덕왕 재위(742~765) 시기다. 경덕왕 때 신라는 황금기로 정치, 사회, 문화적으로 안정되어 있었다. 군비도 확장되었고 당나라와는 우방관계를 유지했고 발해와도 안정적 관계로 돌아서 있었다. 결국 일본의 무모한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왜와 신라는 오랜 숙적의 관계였다. 백제 멸망 후 663년 왜는 4만여의 병력을 파견했으나 백촌강(금강)에서 나당 연합군에 전멸한 숙한(宿恨)을 품고 있었다. 이후 일본은 나당 연합군의 침공을 두려워해 규슈에 오노성(大野城)과 카네다성(金田城)을 축조하고 방어전쟁을 준비했다. 그러면서도 일본은 천황을 중심으로 한 세계관을 형성해 중국과 대등한 국가임을 과시했다.

일본은 호시탐탐탐 신라를 노렸다. 성덕왕 30(731)에 일본은 병선 300척을 보내 신라 동해안을 습격했으나, 신라군이 그들을 크게 쳐부수었다.(삼국사기 성덕왕조) 300척의 전함이면 대병력이다. 이 기록은 속일본기에 나오지 않는다. 천황의 나라라고 자부하던 일본으로선 체면을 구긴 기록을 남기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일본의 침략이 실패한지 3년 되던 734(성덕왕 33)에 신라는 급벌찬 김상정(金相貞)을 일본에 사신으로 보냈다. 일본 도읍에 입경하려는데 일본 관리가 방문 이유를 묻자 김상정은 신라에 대해 왕성국’(王城國)이란 표현을 썼다. 일본은 이 표현이 괘씸하다고 하여 김상정을 돌려보냈다. 일본은 신라에 조공국으로서의 외교양식을 취하도록 요구했는데, 신라가 이를 무시했다는 것이다. 이때 일본에서는 신라에 대한 적대감이 고조되고, 정토론이 대두되기 시작한 것으로 여겨진다.

743년에도 신라 사신 김서정(金序貞)이 일본에 건너가 공물을 調라고 표현하지 않고 土毛로 바꾸어 부르다가 규슈 태재부(太宰府)에서 되돌려(放還) 보내졌다.

신라도 그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했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 경덕왕조에 “12(753) 8, 일본국 사신이 왔는데 건방지고 무례하기에 임금이 그를 만나주지 않았더니 곧바로 돌아갔다고 했다. 일본은 신라의 강경대응 방침에 강하게 반발했을 것이다.

 

자료=뒤키피디아
자료=뒤키피디아

 

그들은 기회를 노렸다. 그러던 중에 당나라에서 안사의 난(安史之亂)이 발생했다. 안록산·사사명이 일으킨 이 반란은 755년부터 763년까지 8년간 중국을 전란으로 몰아넣었으며, 이 혼란으로 중국 인구가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고, 중국은 쑥대밭이 되었다. 섬나라 일본이 중국의 반란 소식을 들은 것은 3년 후인 758년이었다. 발해에 사절로 갔던 오노 다모리(小野田守)가 귀국해 중국 반란의 추이를 보고했다.

이 무렵 일본의 실권자는 후지와라노 나카마로(藤原仲麻呂)였다. 758년에 준닌(淳仁) 천황이 즉위하자 그를 옹립한 나카마로는 권력의 정상에 올랐다. 당의 내전 소식을 들은 일본은 큰 충격에 빠졌다. 준닌 조정은 규슈 태재부의 방비를 강화하도록 명하는 한편에서 신라와의 외교분쟁을 빌미로 이른바 신라정토계획(新羅征討計劃)을 수립하게 된다. 그 중심에 나카마로라 있었다.

일본 조정은 안사의 난을 신라정벌의 기회로 인식했다. 당시 조정이 태재부 내린 명령서에 그 속셈이 드러나 있다.

安祿山은 미친 오랑캐로 교활한 놈이다. 하늘을 거스르며 반란을 일으켰으니, 일이 반드시 이롭지 않다. 서쪽을 칠 수 없어서 되돌아와 도리어 해동(海東)을 칠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알고 미리 계획을 세우되, 설사 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후회가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속일본기)

안록산이 해동을 칠 것이니 대비하라는 것이다. 해동은 일본은 물론 신라까지도 포괄하는 개념으로 보인다. 이 기회에 머리를 숙이지 않는 신라를 치겠다는 야욕을 보인 것이다. 전략적으로 볼 때 신라를 칠 경우 우방인 당나라가 도와주지 못할 것이란 계산이 깔려 있다.

 

7596월부터 일본 조정은 나카마로의 주도 아래 신라정토를 위한 구체적 군사계획을 내놓는다. 나카마로는 내정의 갈등을 밖으로 돌리기 위해서도 신라정벌을 밀고 나갔다. 759년 후반기부터 신라를 정벌하려는 일본의 계획은 속일본기 기사에서 드러난다.

▲ 大宰府에 명하여 行軍式을 하였는데, 장차 신라를 정벌하기 위함이었다.

▲ 大宰帥 三品 船親王香椎廟에 보내어 신라정벌을 고하는 狀啓를 올리게 하였다.

500척을 만들게 했다. 北海道諸國89, 山陰道 제국에 145, 山陽道諸國161, 南海道諸國195척으로 나누어 한가한 달마다 만들게 하고, 3년 이내에 작업을 마치도록 하였다. 신라를 치기 위한 것이다.

 

일본은 발해와 연대해 신라를 협공할 것을 도모했다. 3차례 사신을 발해에 보냈다. 758년에는 오노 다모리를 발해에 보낸데 이어 759, 760년에도 사신을 보냈다. 일본 견발해사의 의도는 신라와의 앙숙관계를 이용해 발해로 하여금 신라를 공격하도록 유도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무렵 발해와 신라는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며 대결구도에서 평화구도로 전환하고 있었다. 당 조정이 발해에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지만 발해는 완곡하게 거절하며 중국 내전을 관망하는 입장에 있었다. 발해로서는 중원의 혼란을 이용해 동북아를 흔들려는 일본의 시도에 휘말리고 싶어 하지 않았다.

일본에서도 고켄(孝謙) 상황이 발해를 동맹군으로 끌어들이려던 계획에 미온적었다. 764

준닌 천황이 고켄 상황에 의해 제압되어 폐위당하자 나카마로는 교토를 탈출해 재기를 꾀했지만 관군에게 체포되어 참수당했다. 나카마로가 추진하던 신라정토계획도 함께 무산되었다.

 


<참고한 자료>

신라 경덕왕대 국내외정세에서 본일본의 신라정토계획’, 조이옥, 대구대, 2015

역사의 수레바퀴, 신라정토계획, 김진광(해동성국, 발해 중, 2019, 동북아역사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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