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는 고유문자를 사용했나
발해는 고유문자를 사용했나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3.09.18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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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문자설과 비문자설 갈려…기왓장에 남긴 독특한 글자 놓고 견해 분분

 

발해는 당나라와 교류하며 중국의 한문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한자에 능숙한 발해인들은 당나라 대학 격인 국자감에 입학하고 외국인 과거시험제도였던 빈공과에 합격했다. 당과 일본에 파견되었던 발해 사신은 멋드러진 시를 선사했고, 그 시가 지금도 전해진다. 발해인들이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불린 것은 고급스러운 문자생활을 영위한 덕분이라 할수 있다. 중국인들이 깜짝 놀랄 정도로 학문수준이 높았고 언어구사능력이 있었음을 반증한다.

 

발해 상경성임을 표시한 기와 /위키피디아
발해 상경성임을 표시한 기와 /위키피디아

 

하지만 발해인이 독특한 문자를 써서 중국이나 일본에서 해독이 되지 않은 경우가 있었다.

 

12세기초 일본 설화집인 강담초(江談抄)발해국 사신 두 명이 와서 공문서(牒狀)를 올렸는데 사신의 이름이 모르는 문자였다. ‘입 구’() 안에 돌 석’()나무 목’()이 들어간 글자였다. 일본 관리들이 전자를 키후츠리마루’(木フツづり丸), 후자를 이시노마츠리마루’(石ノマづり丸)로 풀어 읽고, 신묘했다고 적어 놓았다.

중국에서도 발해가 독자적인 한자를 사용했다는 스토리가 전해진다. 이태백 전서와 옥진총담에 발해에서 보낸 서신을 아무도 해석하지 못해 이태백이 이를 해독하고 회답했다는 기록이 있다. 명대의 고금기관(古今奇觀)에 이태백이 발해의 문자를 해독했으며, 그 문자는 마치 새의 발자국을 닮았다고 했다.

이런 설화는 발해가 중국의 한자와는 다른 독자적인 문자를 사용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발해 정혜공주 비문(복제) /위키피디아
발해 정혜공주 비문(복제) /위키피디아

 

발해는 문헌을 정리하고 관리하는 문적원(文籍院)이란 기관을 두었다. 발해는 일본에 다라니경을 전해 주었고, 그 다리니경은 지금도 전해진다.

발해가 남긴 유물에는 문자가 적혀 있다. 정혜공주와 정효공주의 묘비, 개심사에서 출토된 글쪽지, 영광탑 명문, 도기와 칠기, 불상 등의 명문이다. 가장 많이 글자를 남긴 유물은 단연 기와조각이다.

문자 기와조각은 발해 성터에서 발견된 것인데 동경용원부로 추정되는 팔련성(八連城, 지린성 훈춘), 중경현덕부에 해당하는 서고성(西古城, 지린성 화룡현)에서 기와 문자 자료가 집중적으로 발굴되었다. 특히 기와조각에 새겨진 명문은 해독불가의 문자를 담고 있다. 이상하게 생긴 글자가 발해의 독자문자설을 촉발하는 근거가 되었다.

 

문헌 기록을 살펴보자.

구당서에는 발해는 문자를 가졌고, 말갈은 문자가 없다“(渤海有文字 靺鞨無文字)고 했다.

또 구당서 발해말갈전에 발해는 그 풍속이 고구려와 거란과 더불어 같았으며, 문자와 서계를 자못 많이 가지고 있었다“(風俗與高麗及契丹同 頗有文字及書記)고 기록되었다.

금사 발해국지에는 서계를 알았고 고금제도를 배우고 알아서 해동성국이 되었다”(知書契 習識古今制度爲海東盛國)고 했다.

세 기록을 보아 발해가 문자생활을 했음은 분명하다. 하나, 이 기록은 발해가 독자적 문자를 보유했다는 사실을 설명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학자들은 기와조각의 문자를 놓고 독자문자가 있었다느니, 그렇지 않다느니, 논란을 벌였다. 경성대 김무식 교수에 따르면, 발해의 독자문자의 준재를 인정하는 학자들은 주로 한국 역사학계이며, 발해문자를 인정치 않는 쪽은 중국 학계라는 것이다. 한국 학계는 발해가 중국과 차별화된 문화를 영위했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지만, 중국 학자들은 발해가 중화권의 지방정권이었음을 애써 강조하려는 것이다.

발해가 독자문자를 가졌다는 주장을 처음 제기한 학자는 중국 학자 진위푸(金毓黻, 1887~1962)였다. 그는 만주 랴오닝성 랴오둥 출신으로 1934년 출판한 저서 발해국지장편(渤海國志長編)에서 발해가 자신의 문자를 가지고 있었다는 발해문자설을 제기했다. 그후 다수의 한국 학자들이 진위푸의 견해에 동조했다.

발해 고유문자설은 발해가 고구려를 이어받았기 때문에 중국어와 언어체계가 다른 독자적인 언어체계를 가졌다는 것이다. 이를 주장하는 학자들은 앞서 구당서, 금사 등의 기록이 발해의 고유문자를 설명하는 사료라고 판단했다. 신라는 한자를 변용한 이두를 사용했고, 이후 선조들은 한자를 변형해 새로운 글자를 만들어 쓰기도 했다. 신돌석 장군의 돌()은 우리나라에서 만들어낸 한자다. 발해도 그런 문자를 만들었을 것이란 주장이다.

이에 비해 이강(李强)을 비롯해 중국계 학자들은 발해 비문자설을 주장한다. 구당서, 금서의 기록에서 말하는 문자가 발해의 고유문자가 아닌 한자를 의미한다고 보았다. 비문자론자들은 발해의 기와조각에 등장하는 문자 중에서 한자와 일치하지 않는 예는 모두 발해의 무지한 도공이 한자를 잘못 썼거나 변형을 가한 산물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들은 기왓장에 나오는 부호 형태가 문자가 아니라고 무시해 버렸다.

 

발해의 변용된 문자 /김무식 논문 캡쳐
발해의 변용된 문자 /김무식 논문 캡쳐

 

문자가 적혀진 발해의 기와조각은 371개나 된다고 한다. 김무식은 발해의 문자기와 자료는 한자를 변용해 사용했으며 발해문자로 인정하는 것이 타당하다, “발해문자가 고구려나 백제, 신라와 같이 차자표기법의 전통을 공유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발해 문자자료에 확실히 독특한 글자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80~90%가 한자와 다르지 않다. 상당수는 한자의 간체, 약체, 이체로 볼수 있다. 동북아역사재단 권은주는 아직까지 발견된 발해의 문자자료만으로는 거란이나 여진이 자신의 문자를 만든 것과 같은 독립적인 문자를 만들어 사용했다고 보기는 힘들다고 했다.

 


<참고한 자료>

발해문자의 성립과 문자론적 특징, 김무식, 언어과학연구, 2008

발해의 문자와 문자생활, 권은주(해동성국 발해 중, 동북아역사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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