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의 네덜란드 거점①…질란디아 요새
대만의 네덜란드 거점①…질란디아 요새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3.10.12 1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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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공, 청군이 남하하자 남명 세력 이끌고 대만 공격…타이난에서 공방전

 

대만 타이난(臺南)의 질란디아 요새(Fort Zeelandia)는 네덜란드가 1624년 동아시아 무역거래를 위해 쌓았다가 1662년 명나라 유신 정성공(鄭成功, 1624~1662)의 공격으로 중국에 넘어간 보루다. 그 이전까지 대만은 중국의 영토가 아니라 고산족이라 불리는 원주민의 나라였다. 따라서 정성공의 질란디아 요새 함락은 대만이 중국 영토가 된 시발점이 된다. 대만에서는 이 성을 안핑고성(安平古城) 또는 안핑고보(安平古堡)라고 부른다.

네덜란드는 38년간 이 성루를 유지하면서 엄청난 공을 들였다. 요새 건설에 사용된 벽돌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본사 있는 인도네시아 바타비아(자카르타)에서 운반해 왔고, 설탕, , 조개 껍데기, 찹쌀을 섞어 만든 모르타르도 사용했다. 요새는 3단의 벽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네 군데 모퉁이에는 방어효과를 높이기 위해 튀어나온 치성을 설치했다.

 

타이난 질란디아 요새의 17세기 그림 /위키피디아
타이난 질란디아 요새의 17세기 그림 /위키피디아

 

정성공의 아버지 정지룡(鄭芝龍)은 푸젠성 출신 밀무역업자였다. 정지룡이 일본에 체류할 때 하급무사의 딸 다가와 마츠(田川松)와 하룻밤 정분으로 나은 아들이 정성공이다. 바야흐로 명청교체기였다. 정지룡은 남쪽으로 쫓기는 남명(南明)을 후원하다가 푸젠성만 남았을 때 청나라에 투항해 버렸다.

이에 아들 정성공은 명나라에 대한 충성을 지키며 반청운동을 벌였다. 한때 난징을 공격하기도 했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청나라가 푸젠성을 압박하면서 해금(海禁)조치를 내렸다. 청 황제는 모든 해안에서 50km 이내 육지에는 아무도 살지 못하게 한다는 칙령을 내렸다. 바다를 근거로 하던 정성공 세력은 근거지를 잃게 되었다. 정씨의 해상세력은 팽호도(澎湖島) 등 주변의 작은 섬 몇 개로 대선단을 꾸려나가지 못할 상황이 되었다. 그들의 선택은 네덜란드를 내쫓고 대만을 접수하는 것이었다. 네덜란드와의 전투는 불가피했다.

 

질란디아 요새와 전망대 /박차영
질란디아 요새와 전망대 /박차영

 

정성공 세력이 대만을 침공할 것이란 정보를 네덜란드의 대만 총독 프레데릭 코예트(Frederick Coyett)은 입수하고 있었다. 그는 바타비아에 급전을 보내 지원을 요청했다. 1660년 동인도회사 이사회는 얀 판 데르 란(Jan van der Laan) 함장을 지휘관으로 삼아 12척의 전함과 600명의 병력으로 지원병을 파병했다. 판 데르 란은 코예트를 무시했다. 지원군 함장은 포르투갈이 점령한 마카오를 집어삼킬 궁리만 했다. 정성공은 기만전술로 대만을 침공할 의사가 없다는 신호를 보냈다. 판 데르 란은 정성공에 속아 넘어갔다. 지원군 책임자와 현지 총독 사이에 갈등이 커졌고, 16612월 마침내 판 데르 란은 함대를 돌려 바타비아로 가버렸다.

정성공은 이 기회를 노렸다. 그해 323일 정성공은 출동명령을 내렸다. 정크선 900척에 25,000명의 병력이 푸젠성 금문(金門)을 출발했다. 42일 남명의 반군세력은 타이난의 만()만에 들어와 배에서 내렸다.

딩시 대만에 거주하는 네덜란드인은 민간인을 포함해 약 2,000명에 불과했다. 군인수는 1,000명을 약간 넘었다. 전함은 대형선박 2, 소형 2척이 있었다. 사람 수로는 중국인이 네덜란드인에 비해 10배 넘어 인해전술이 가능했다.

 

교전이 시작되었다. 정성공의 작은 정크선들이 네덜란드의 큰 함대에 달라 붙었다. 처음엔 정크선들이 네덜란드의 함포사격을 두려워 하며 움추렸지만 잠시후 그것도 소용이 없게 되었다. 중국 정크선들은 네덜란드 함선을 쇠사슬로 묶어 버렸고, 화공작전을 폈다. 헥토르호는 화약고가 폭발해 침몰했고, 다른 소형함선 하나도 침몰했다. 스호라벤란데호와 반크호는 도주했다.

지상에는 토마스 페델 대위가 240명의 병사를 이끌고 중국 병사의 진격을 막아섰다. 하지만 그곳도 일순간, 파도처럼 밀려드는 중국 병사들을 당해내지 못했다. 절반인 118명이 전사했고, 그 중에 페델 대위도 포함되었다.

 

코예트는 주민들도 질란디아와 프로빈샤 요새(Fort Provintia)로 들어오게 해 농성작전을 펼쳤다. 프로빈샤 요새는 초소 성격의 작은 요새인데, 부관 야콥 발렌틴(Jacob Valentine)140명의 병력과 일부 주민을 이끌고 있었다.

코예트는 정성공과 협상을 희망했다. 코예트가 내건 조건은 영토를 중국에 넘기되, 두 개 요새와 주거지를 임대해 쓰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점령지를 조차(租借) 방식으로 바꾸자는 것이었다. 정성공은 코예트의 사신이 가져온 조건을 단박에 거절했다. 대만은 중국에 조공을 바치는 번국이었는데 네덜란드가 차지했으므로 원래의 주인이 되찾겠다는 논리였다.

 

 

질란디아 요새의 네덜란드 포 /박차영
질란디아 요새의 네덜란드 포 /박차영

 

협상이 깨지고 양측은 다시 전투를 벌였다. 정성공은 상대적으로 약한 프로빈샤 요새로 접근했다. 발렌틴 대위는 싸우기보다는 요새를 내주고 목숨을 구걸하는 쪽을 선택했다. 이 프로빈샤 요새가 나중에 정성공이 대만을 통치할 때 궁궐로 사용한 적감성(赤嵌城)이다.

정성공은 질란디아 요새를 사수하려는 코예트에게 항복을 권유하는 사절을 보냈다. 사절로 포로로 잡은 네덜란드 선교사 안토니우스 함브룩(Antonius Hambroek)을 이용했다. 함브룩의 아내와 두 딸은 프로빈샤에서 포로로 잡혔고, 다른 두 딸은 질란디아 요새에 피해 있었다. 그는 정성공의 사절로 질란디아에 갔지만 그곳에서 네덜란드인으로서의 애국심, 크리스쳔으로서의 가치관을 고집했다. 그는 코예트에게 항복하지 말고, 사악한 이교도들에 끝까지 대항하라고 주장했다. 그는 그곳의 두딸이 말리는데도 정성공에게로 돌아갔다. 정성공은 그의 미친 짓에 분노해 그를 포함해 네덜란드 성인남성을 모두 죽여버리고, 아내와 딸들은 자신의 장수에게 첩으로 주어버렸다.

 

코예트는 마지막까지 항전하며 자바섬에서 지원이 오기를 기다렸다. 동인도회사는 네덜란드 지휘부는 모든 화력을 동원해 질란디아 요새로 접근하는 중국군에 대해 포격을 가했다. 정성공의 인해전술도 네덜란드 포격을 이겨내지 못했다.

중국군은 장기전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사정거리 밖에서 요새를 포위하고 그 안에 있는 네덜란드인들을 굶겨 죽이자는 것이다. 굶주림보다 더 무서운 공포가 없다. 2개월동안 중국인들은 아무런 공격을 하지 않았다. 요새의 네덜란드인들은 식량을 배급제로 운영하며 구원의 손길이 오기를 기다리며 하루하루 연명해 나갔다. 바깥에서 중국인들은 자신들도 보급로가 끊긴 상태였지만 요새를 향해 잘먹고 잘산다는 것을 의도적으로 보여주었다. 정성공은 이제나저제나 요새에서 백기가 올라가기만 기다렸다.

 

질란디아 요새 앞의 내만 /박차영
질란디아 요새 앞의 내만 /박차영

 

정성공의 사정도 좋지 않았다. 해협 건너 푸젠성의 상황이 악화하면서 보급이 끊겼다. 본토에 주둔하고 있던 장수들에게 대만으로 건너와 합류하라고 명령을 내렸지만, 일부는 제 살길을 찾아 만주족에 투항해 버렸다.

대만 원주민들의 지원도 형편 없었다. 자기네 먹을 것도 부족한데 본토 군대가 몰려와 먹을 것을 달라니 내주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그럴 여유도 없었다. 부대 일부는 식량 조달에 나서 대만 북부까지 원정나가기도 했다.

그러던 중 보초 한 사람이 수평선 넘어 이상한 물체를 보았다. 네덜란드 선박이 몰려오고 있었다. 자카르타의 동인도회사 본사에서 파견한 선단이었다. <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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