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의 네덜란드 거점②…적감성
대만의 네덜란드 거점②…적감성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3.10.13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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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군 도주, 위트레흐트 탑 붕괴로 네덜란드 항복…프로빈샤 요새를 치소로 삼아

 

<에서 계속> 대만의 네덜란드 요새가 정성공이 이끄는 명나라 복원 세력의 공격을 받고 있을 때 지금의 인도네시아 자바섬에 위치했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본사는 모순된 결정을 내렸다. 바타비아(자카르타)의 이사회는 포르모사(대만)의 프레데릭 코예트 총독을 해임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앞서 의견 갈등으로 자바로 돌아간 지원군 함장 얀 판 데르 란이 코예트에 대한 반대여론을 조성했고 귀가 얇은 이사들이 그를 해임했다. 전쟁이 터졌는데 감정 섞인 거짓 보고를 받아들여 네덜란드는 장수를 해임하는 패착을 두게 된 것이다.

1661년 대만해안에 나타난 네덜란드 선박은 수세에 몰린 코예트를 지원하러 온 전함이 아니라, 코예트 해임장을 들고 온 바타비아의 연락선이었다. 신임 대만총독에 부임한 헤르만 클렌크(Herman Clenk)2척의 선박을 인솔했다. 그는 해안에 정성공의 정크선이 새카맣게 해안에 접안하고 수많은 중국병사가 두 요새를 포위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판 데르 란이 정씨 일가의 공격이 없을 것이며, 코예트가 잘못 판단하고 있다고 보고해 본사의 이사들이 그의 말을 믿었는데, 현장에 와보니 상황은 완전 딴판이었다.

클렌크는 두 척의 배와 소수 병력으로 중국군에 대항할수 없었다. 코예트는 클렌크에게 빨리 와서 자신을 해임하고 요새를 접수하길 바라고 있었다. 비겁한 클렌크는 대만총독 자리를 인수하기는커녕 자바로 돌아갈 궁리만 했다. 바람이 불고 폭풍우가 닥쳐왔다. 클렌크는 절호의 기회로 판단하고 새로운 정박지를 찾아 나섰다. 아마 일본 나가사키로 갔을 것으로 추측된다.

 

 

질란디아 요새의 정성공 동상 /박차영
질란디아 요새의 정성공 동상 /박차영

 

바타비아의 동인도회사는 뒤늦게 정확한 상황을 인식했다. 정성공이 대만을 침공했을 때 도주한 네덜란드의 마리아호가 필리핀으로 북상했다가 다시 남하해 자카르타로 돌아간 것이다. 마리아호 선원들은 적이 침략했음을 보고했다. 이사회는 잘못된 보고로 농락당했음을 깨닫고 코예트 해임장을 회수하려 했으나 클렌크가 도주해 버려 소용이 없었다. 이사회는 늦었지만 지원군을 편성했다. 보급품과 화약을 잔뜩 실은 10척의 전함과 700명의 병사도 승선했다. 다만 아무도 사령관을 맡으려 하지 않았다. 코예트를 비난하는데 앞장서다가 갑자기 그를 지원을 하러 가야하니 체면이 서지 않았을수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적의 규모가 엄청나다는 사실을 두려워한 것이다. 결국 변호사 출신으로 군사 경험이 조금도 없는 야콥 캐우(Jacob Caeuw)가 마지못해 부름에 응했다.

구조대의 출현은 질란디아 성채에 용기를 불어 넣었다. 25천의 적에 비해 소수이지만 최신 화력을 담보로 하면 싸워볼만 했다. 중국 투항자들이 정성공측에 보급이 끊어져 병사들이 곤공에 빠져 있다는 정보도 알려왔다.

 

캐우는 적극적이지 않았다. 폭풍이 불어 배를 한달 가량 뭍에 접근시키지 않다가 두척이 난파되었다. 16619월 중순에야 겨우 접안했다. 지원군이 오자 네덜란드 진영에선 강경파가 득세했다. 네덜란드 식민지는 정부가 아니라 동인도회사라는 주식회사가 통치했기 때문에 평의회의 입김이 강했다. 평의회는 네덜란드 거주지에 대한 공격 개시를 결의했다. 코예트는 신중론을 폈다. 하지만 강경파의 주장이 대세를 이루며 네덜란드 진영은 공격에 나섰지만 바람의 방향이 바뀌면서 중국측 화공을 2척을 잃고 120여명의 병사를 잃었다.

지원군 사령관 캐우는 용기를 상실했다. 전투가 장기화하며 양측 진영에 말라리아가 창궐하고 식량 부족이 심각해졌다. 이때 만주족()이 네덜란드측에 연합을 제의했다. 청의 푸젠 도독 이솔태(李率太)의 제안을 캐우가 덥석 물었다. 정성공의 적인 만주족과 네덜란드가 손잡는 오랑캐 연합이 형성되었다.

만주족의 저의는 대만의 정성공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푸젠성 해안에 남아 있는 남명 잔당을 소탕하는 것이었다. 질란디아 요새를 지키는 코예트는 만주족과의 동맹을 기대했지만 방향은 다른 곳으로 흘러 실망했다. 오히려 캐우는 이솔태의 요청에 응해 팽호열도로 이동했다.

캐우는 딴 마음을 먹었다. 그는 만주족을 돕는척하며 도주할 생각을 했다. 그가 탄 배는 팽호열도로 돌렸다가 사라졌다. 캐우의 배는 사이암(태국)으로 향했고, 그후 그를 본 사람은 없었다.

 

무너진 질란디아 요새 /박차영
무너진 질란디아 요새 /박차영

 

네덜란드가 대만을 지킬수 여력은 충분했다. 하지만 동인도회사의 오판, 지도부의 갈등, 비겁함이 겹치면서 대만을 내주고 만 것이다. 남아 있던 네덜란드 함선 3척은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채 돌아가버리고 말았다.

이제 질란디아 요새의 군인과 민간인이 최후까지 버텨야 했다. 지원군이 다시 올 것이란 막연한 기대로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다. 이때 결정적인 일이 일어났다. 질란디아 부대에 속해 있던 외국인 용병 가운데 독일 출신 상사 한스 유르겐 라디스(Hans Jurgen Radis)가 적에 투항한 것이다.

라디스는 계급이 낮았지만 유럽에서 수많은 전쟁터를 전전한 백전노장이었다. 그는 질란디아 요새의 결정적 약점을 알고 있었다. 정성공은 이 독일인을 환대했다. 라디스는 네덜란드가 더 이상 버틸 여력이 없으며, 결정적으로 공격할 포인트를 가르쳐 주었다. 바로 위트레흐트 탑(Utrecht Tower)이었다. 이 탑은 질란디아 요새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는데, 이곳에서 쏘는 포탄이 중국군의 요새 접근을 저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라디스는 이곳을 파괴하면 쉽게 성을 공략할수 있다고 알려줬다. 네덜란드군은 탑위에 포대를 설치하고 있는데 탑이 무너지면 모든 방향에서 요새를 공격할수 있다는 것이다.

 

부하들에게 콕싱가(國姓爺)라고 불리던 정성공은 라디스의 일타강의를 받아들였다. 해가 바뀌어 16621월 정성공은 화력을 탑에 집중했다. 125일 정성공의 대표 28문이 일제히 포문을 열었다. 2,300개의 포탄이 탑을 향해 날아갔다. 탑에서 반격을 가하면 중국군은 피했다가 다시 포격에 참여했다. 날이 저물 무렵, 위트레흐트 탑이 무너지며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정성공은 그곳을 접수하기 위해 군사들과 함께 달려갔다. 라디스는 정성공을 말리며 기다리라고 했다. 적이 그냥 도망치지 않았을 것이 분명했다. 콕싱가가 멈칫하는 사이에 탑의 잔해가 갑자기 불길을 뿜으며 폭발해 버렸다. 일부 중국 병사는 폭발과 함께 쓰러졌다.

 

1662년 1월 정성공에게 항복하고 배를 타기 위해 행진하는 네덜란드 병사들 /위키피디아
1662년 1월 정성공에게 항복하고 배를 타기 위해 행진하는 네덜란드 병사들 /위키피디아

 

그날밤 코예트와 지도부는 더 이상 버틸수 없다고 판단했다. 선택은 두 가지다. 장열하게 전사할 것이냐, 항복을 해서 남은 사람들의 생명을 건지느냐는 것이었다. 그들은 후자를 선택했다. 요새 사람들은 18개 항의 항복문서를 보냈다. 정성공은 그 조건을 받아들였다.

항복문서에서 가장 중요한 조건은 네덜란드인의 위신을 지켜주는 것이었다. 합의된 문서에 따라 네덜란드인들은 승선할 때까지 총독의 지휘 하에 장전된 총기를 소지한 채 깃발을 흔들고 불똧을 터트리고 북을 두드리며 행진하도록 허락을 받았다. 승자는 정성공이 아니라 코예트의 부대인 것처럼 보였다. 끝까지 저항하던 네덜란드 군인, 민간인들은 요새에서 행진해 나와 배에 올라탔다. 선박에는 바타비아까지 항해하면서 쓸 식량과 소모품이 실려 있었다. 중국 장군들에게 배당된 네덜란드 여성들도 돌아갔다. 정성공이 차지했던 선교사 안토니우스 함브룩의 딸도 풀려났다.

9개월에 걸친 전투에서 네덜란드인 1,600명이 사망하고, 900명이 살아남아 돌아갔다. 166221일 네덜란드 선박이 떠나자 정성공은 질란디아 요새를 접수했다.

 

적감루 /박차영
적감루 /박차영

 

정성공은 파괴된 질란디아 성을 버리고 프로빈샤 요새(Fort Provintia)로 옮겨 대만 통치의 궁궐로 삼았다. 중국인들은 적감성(赤嵌城) 또는 적감루(赤嵌樓)라고 했다. 중국어 발음으로 츠칸러우다.

누각의 해질녘 풍경이 아름답다고 하여 '적감석조(赤嵌夕照)'라고 했다. '츠칸‘(赤嵌)이라는 명칭은 푸젠에서 절벽을 '’()이라고 하는 것과 관련이 있으며, 붉은색 벽돌로 쌓은 성벽이 저녁 햇빛을 받아 무지개를 토해내고 노을을 뿜는 듯한 데서 유래되었다.

1653년에 네덜란드인들에 의해 세워졌고, 정성공이 대만을 점령한 후 동도승천부(東都承天府)로 고쳐져 대만 지배의 최고 행정기관이 되었다. 1945년에 현재의 이름으로 고쳐졌고 중화민국 내정부에 의해 국가 일급고적으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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