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6년 ‘뜻밖의 세계일주’ 한 민영환
1896년 ‘뜻밖의 세계일주’ 한 민영환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4.01.21 14:2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러시아 황제 대관식 참석 위해 태평양·대서양 항해, 캐나다·시베리아 횡단

 

민영환(閔泳煥, 1861~1905)은 고종의 외척으로 1905년 을사조약 체결에 분개해 45세의 나이에 자결한 애국지사다. 그의 동상은 그의 시호를 딴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 사거리에 세워져 있다. 그가 순국한지 5개월이 지나 서울 서울 종로구 조계사 근처에 있던 자택 뒷방 마룻바닥에서 붉은 반점의 대나무가 돋아났다. 사람들을 그것을 '혈죽‘(血竹)'이라고 했다.

민영환 /국가보훈처
민영환 /국가보훈처

 

민영환은 개화기에 세계일주를 한 인물이었다. 1896년 러시아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여하기 위해 태평양을 건너고 아메라카 대륙을 지냈으며, 대서양을 건넜다. 유럽에서 육로로 러시아 모스크바에 도착했고, 그후 시베리아철도를 타고 블라디보스톡을 거쳐 인천으로 돌아왔다. 이 기나긴 여행은 그해 41일 서울을 출발해 1021일 도착할 때까지 무려 6개월 21일에 걸친 대장정이었다.

민영환에 앞서 1883년에 민영익이 보빙사로 미국에 파견되면서 유렵을 경유해 돌아오면서 조선인으로 최초로 세계일주를 했다. 따라서 민영환은 두 번째 세계일주라고 할수 있는데, 그와 동행들의 여행기가 많이 남아 있어 그 당시 우리 선조들이 서양문물을 보며 어떤 생각을 했는지를 알수 있다. 민영환의 해천추범(海天秋帆), 김득련의 환구일기(環璆日記)와 환구음초(環璆唫艸), 윤치호의 윤치호일기(尹致昊日記)가 그것이다. 해천추범은 민영환의 이름으로 나왔지만, 수행원인 김득련이 집필했다는 점에서 공저라고 할수 있다. 연구자들은 민영환의 대관식 사절단을 앞서 세계를 일주한 청나라 벌링게임 사절단과 일본의 이와쿠라 사절단과도 비교하기도 한다. 하지만 청국과 일본 사절단은 서양문물을 배우기 위해 2년에 걸쳐 조직적으로 기획되고 진행된 반면에 민영환 일행은 러시아 황제 대관식을 위해 뜻하지 않게 세계일주를 하게 되었다는데서 차이점이 있다.

민영환 일행의 외교일정은 의도하지 않은 두 번의 사건에 의해 세계일주로 둔갑했다. 그 첫째가 중국 상하이에서 수에즈 운하를 경유하는 배를 놓친 것이고, 둘째는 러시아 측의 설득으로 준공되지도 않은 시베리아 철도를 이용하게 된 것이다. 그의 경로를 따라가 보자.

 

러시아 황제 대관식 참석은 18962월 고종이 왕궁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고(아관파천) 친러내각이 구성된 이후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중요한 외교행사였다. 러시아 차르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은 526일로 예정되어 있었다.

민영환은 1896310일 특명전권공사로 임명되었다. 특사단은 수행원 윤치호, 2등 참서관 김득련, 3등 참서관 김도일, 비서(隨從) 손희영, 통역 겸 안내자인 러시아인 시테인(Stein)으로 구성되었고, 41일 서울에서 출발했다.

일행은 42일 오전 10시쯤 인천항에서 러시아 군함 크레마지호에 올라 44일 오전 10시 중국 상하이에 도착했다. 그들은 상하이항에 대해 각국의 기선이 부두에 어지러이 있고 서양식으로 만들어진 가옥은 하늘에 솟아있으며 화물이 구름같이 쌓여있다. 참으로 동양 제일의 번화한 큰 항구다.”고 썼다. 같은 목적으로 러시아에 가기 위해 상하이에 도착한 청국 리훙장(李鴻章)은 조선 사절단의 입항 사실을 들었다는 기록을 남겼다.

 

민영환의 경로 /박차영
민영환의 경로 /박차영

 

민영환 일행은 상해에서 프랑스 배를 타고 홍콩을 거쳐 스에즈 운하를 지나 가려고 했지만 배에 자리가 없었다.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선박회사가 다른 승객에게 자리를 내주었기 때문이다. 선박회사에 문제가 있지만, 조선사람들에게도 시간 관념이 없던 시절이다. 어쨌든 배를 놓쳤으니 대관식에 맞추기 위해 가장 빠른 배를 잡은 것이 캐나다 선적 차이나 엠프레스(Empress of China)호였다. 일본을 거쳐 캐나다에 도착하는 노선의 배였는데, 일행은 서쪽으로 가려던 계획을 급선회, 동쪽 항로를 선택했다. 이 우연이 그들로 하여금 세계일주를 하게 만들었다.

일행은 411일 엠프레스호에 올라 다음날 일본 나가사키에 도착했다. 배는 시모노세키와 고베를 거쳐 요코하마에 도착했다. 요코하마에서 도쿄의 조선공사관에 들러 잠시 휴식을 취하다가 417일 태평양을 향해 출항했다. 그들은 열흘 이상 망망대해를 항해했다. 민영환은 대양에서 일출의 환희를 이렇게 서술했다. “갑자기 동쪽 가에 붉은빛이 올라왔다가 꺼지는데 만 갈래가 눈을 쏘더니 조금 있다가 태양이 끓어오르는데 그 크기가 비교할 데가 없으니 참으로 장관이다.”

429일 배는 캐나다 서안 벤쿠버에 내렸다. 미국 배였다면 샌프란시스코에 내려 대륙횡단철도를 탔을 텐데, 캐나다 선적이어서 사흘 더 걸리는 길을 가게 되었다. 벤쿠버에서 기차를 탔다. 캐나다 대륙횡단철도였다. 민영환은 기차를 처음 탔다. 조선에서 최초 철도 경인선이 개통한 것은 4년후인 1900년이다.

그는 기차를 탄 소감을 바람이 달리고 번개가 치는 듯하니 보던 것이 금방 지나가 거의 꿈속을 헤매는 것 같다고 썼다. 동행한 김득련도 차 한 잎을 달이다가 신기한 기계를 만들었다. 장방(후한의 費長房)의 축지법도 오히려 번거로울 지경이라고 했다. 제임스 와트가 차를 끓이다 주전자에서 나오는 김을 보고 증기기관을 개발한 것을 말한 것이다.

이들은 몬트리올을 거쳐 56일에 미국 뉴욕에 도착했다. 그들은 뉴욕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민영환은 눈이 황홀해 말로 다 형용할 수 없으니, 참으로 지구 위에 이름난 곳이라고 했고, 김득련은 부유하고 번화함이 입으로 형언할 수 없고 붓으로도 기술할 수 없다. 불야성 속의 극락천(極樂天)’이라고 했다.

그들은 배를 기다리며 3일간 뉴욕을 구경한 후 59일 영국 상선 루케이니아(Lucania)호를 타고 출항했다. 또다시 망망대해, 그들은 515일 영국 퀸즈타운에 정박했다가 다음날 새벽에 런던 인근 리버풀에 도착했다.

그들은 런던을 주마간산 격으로 둘러보았다. 민영환은 런던을 보고 소감을 적어 두었다. “이 도시에 사는 사람은 5백만이다. 거리와 시가의 상점, 집들, 차와 말 등이 뉴욕과 비슷하나 그 웅장함이 더하다. 땅은 좁고 사람이 많아 곳곳의 거리 위에는 땅을 파고 지하도를 몇 층으로 만들었다. 그 속에 사는 집이 있다. 상점이 있고 철로가 있고 차와 말이 오가니 그 번성함이 천하에서 최고다.”

당일치기 런던 끝내고 16일 오후 영국을 떠나 다음날 새벽에 네덜란드 플나싱에 상륙했다. 일행은 대관식 일정이 촉박했기 때문에 쉬지도 못했다. 바로 철도를 타고 폴란드를 거쳐 520일 대관식이 열리는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526일 대관식은 화려했다. 대관식 이후 일행은 러시아 최대 해군기지이자 발트해 관문인 페테르스부르크로 가서 근대문명을 둘러보았다. 당시 러시아는 서유럽에 비해 뒤떨어졌지만 조선과는 비교할수 없을 정도로 선진문물을 수용하고 있었다. 페테르부르크에서 사절단은 각종시설을 둘러보았고, 군수공장, 조포창, 조선소를 견학했다.

 

이제 러시아에서의 공식일정과 시찰을 마치고 돌아가야 할 때가 되었다. 민영환은 당초 상하이에서 놓친 수에즈 노선을 이용해 돌아갈 생각을 했다. 그런데 러시아인 통역자인 시테인이 시베리아 노선을 이용할 것을 제안했다.

시테인은 북방경로는 다시 여행할 기회가 없을지도 모르며, 비용이 저렴하다고 꼬득였다. 민영환은 나중에 철도가 완성되면 이용할 기회가 있을 것이라며 수에즈 바닷길을 고집했다. 그러자 시테인은 남방 항로는 더위와 태풍을 만날 수 있고, 지금 이집트에는 콜레라가 창궐한다고 겁을 주었다. 시테인의 주장은 러시아측의 바람이기도 해 러시아와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사절단 책임자로선 거절하기 어려웠다. 마침내 민영환은 시베리아 길로 가겠노라고 했다. 이때 윤치호는 따로 프랑스에서 어학공부를 하다가 돌아가겠다고 해 여비를 주어 먼저 보냈다.

 

819일 민영환 일행은 페테르부르크에서 가차를 타고, 20일 모스크바에 들렀다가 21일 니주니 노브고르트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3일간 박람회 관람을 한 후 26일 볼가강에서 기선을 타고 사마라에 도착해 기차를 탔다. 831일 일행은 옴스크에 도착했고, 다시 사륜마차를 타고 이르쿠츠크까지 갔다. 당시 시베리아철도를 건설하고 있었는데, 완공 구간은 기차로, 건설중인 지역은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했다.

이들이 이르쿠츠크에 도착한 것은 911일이었다. 여기서 또 기선을 타고 바이칼 호수를 건너고 다시 실카강을 내려가 24일 흑룡강 상류인 이그나시노, 25일 체르나예보, 103일 하바로프스크에 도착했다. 여정이 힘들고 피로와 추위가 겹쳐 민영환은 감기에 걸리기도 했다. 하바로프스크에선 기차를 타고 1010일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했다.

착공한지 5년이 된 시베리아철도는 고생길이었다. 3구간만 기차를 탔고, 나머지는 마차와 기선을 이용했다. 민영환은 길은 험하고 질척거려 차가 매우 흔들리니 사람은 피곤하고 말은 기운이 빠졌다고 했다.

일행은 블라디보스톡에서 잠시 쉬었다가 1016일 다시 배를 탔다. 그들은 동해로 남하해 멀리서 울릉도를 바라보며 1020일 인천항에 입항했다. 민영환은 다음날 서울에 도착해 긴 여정의 종지부를 찍었다.

 

서대문구 충정로의 민영환 동상 /박차영
서대문구 충정로의 민영환 동상 /박차영

 

한편 윤치호는 818일 민영환 일행과 작별한 후 프랑스로 돌아와 3개월간 공부하다가 귀국길에 올랐다. 윤치호는 민영환이 애초 가려던 수에즈 운하를 이용했다. 윤치호는 1122일 마르세유항구를 출항해, 이집트 포트사이드, 홍해 입구 지부티(아프리카), 스리랑카 콜롬보, 싱가포르, 베트남 사이공, 홍콩을 거쳐 상하이에 도착했다.

 

128년전 러시아 대관식에 참석하기 위한 공무 여행이었지만 민영환 사절단의 세계일주는 서양문물을 배우려는 노력을 생생하게 남겼다. 그들은 6개월 21일 동안 중국, 일본, 캐나다, 미국, 영국, 독일, 폴란드, 러시아 8개국을 거쳤다. 그들은 서양 열강의 산업, 군사, 의술, 교육, 문화 등 선진 문물은 물론 천문, 지리 등에 관한 견문과 감상을 자세히 기록해 두었다.

 


<참고한 자료>

민영환 사절단의 세계 일주와 대양 항해, 조세현, 2020, 부경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