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에서 DMZ를 먼저 거론한 영국
한국전에서 DMZ를 먼저 거론한 영국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4.01.26 20:5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모니까 ‘DMZ의 역사’에 설명…미국 반대로 무산, 이후 휴전회담에서 재등장

 

군인 시절에 우리쪽 철책선과 북한 철책선 사이의 비무장지대를 하염없이 지켜보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 무심한 공간이 남북 대치의 현장이요, 젊은 시절 1년을 보낸 곳이기도 하다.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한모니까 조교수에게 비무장지대(DMZ. demilitarized zone)는 연구대상이었다. 그는 그동안의 연구 결과를 모아 ‘DMZ의 역사 - 한반도 정전체제와 비무장지대’(2023. 11. 돌베개)란 책을 냈다. 저자는 70년 동안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우리를 가로지른 경계선, 젊은이들이 서로 총부리를 겨누며 공간, 해결책이 없는 것 같은 분단선의 역사를 조명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새롭게 인식하게 된 것은 DMZ6·25 전쟁 초인 195011, 영국에 의해서 제안되었다는 사실이다. 또 이 사실은 많은 것을 생각게 했다.

​책표지​
​책표지​

 

한 교수에 따르면, 한국전쟁 기간에 비무장지대라는 이이디어를 낸 나라는 영국이었다.

1950101일 유엔군과 국군은 38선을 넘어 북진했다. 114일 중국은 참전을 공식화했다. 중국군의 참전으로 한국전쟁이 한반도를 넘어 확장될 가능성을 암시했다. 참전국의 일원이었던 영국은 확전을 우려했다.

영국은 중국이 완충지대 설치를 목적으로 참전했다고 판단했다. 117일 영국 육군 참모총장 윌리엄 슬림(William Slim)은 참모위원회에서 적당한 방어선과 협상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1113일 참모위원회에서 슬림은 현재의 전선에서 연합군의 진격을 중지하고 북위 40° 정도부터 중국국경까지 지역을 완충지대로 남겨두어야 하며, 이 지역에 공산군이 재침략을 위해 집결할 경우 공중폭격으로 이를 분쇄해야 한다고 말했다.

영국 내각도 슬림의 인식을 공유했다. 내각은 유럽에서 한국의 전력적 가치가 낮다고 평가하고, 완충지대가 전략적 가치가 별로 없는 지역에 값비싼 대가를 치르는 군사개입을 조기에 종결할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보았다.

미국 저널리스트 I. F. 스톤(Isidor Feinstein Stone)는 저서 비사 한국전쟁’(he Hidden History of the Korean War, 19501951.)에서 중국은 압록강 수풍댐과 동북 공업시설 보호를 위해 완충지대를 두려는 목적에서 참전했다고 주장했다. 당시 서방에서는 영국과 비슷한 정세인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영국은 앞서 세계 분쟁지역 여러곳에서 완충지대, 중립지대, 비무장지대 등의 개념을 적용한 경험이 있다. 1907년 영국은 러시아와 페르시아를 세 지역으로 분할하고, 그 중간에 중립지대를 설정했고, 1차 대전 직후 베르사이유 조약을 통해 라인란트를 비무장지대로 설치했다. 이런 완충지대는 패전국 영토에 적용되었다. 영국에게 비무장지대는 너무나 익숙한 방식이었지만, 한국인에게는 생소한 개념이었다.

1907년 영국-러시아의 페르시아 분할 /위키피디아
1907년 영국-러시아의 페르시아 분할 /위키피디아
1차 대전 직후 독일 라인란트 비무장지대 /위키피디아
1차 대전 직후 독일 라인란트 비무장지대 /위키피디아

 

영국은 한국전쟁에서 완충지대를 적용하기 외교적 행동에 들어갔다. 영국은 유엔에서 완충지대안을 여론화하는 한편, 미국에도 제시했다. 영국 외무장관 어니스트 베빈(Ernest Bevin)1113일 주미 대사관을 경유해 미 국무부에 전문을 보내 새로운 접근으로 비무장지대 구축에 관해 제안했다.

영국 외무부는 확전의 위험을 막기 위해 유엔 결의 방식으로 구축하되, 완충지대 범위를 정주~흥남 라인에서 한만 국경까지로 설정했다. 비무장지대는 한국이 통일될 때까지 일시적으로 설정되는 것으로 했다.

 

영국의 비무장지대 구상은 미국의 월경추격권을 억제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117일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도망가는 적기를 만주까지 공격할수 있도록 하용할 것을 참모본부에 요구했다. 미국 참모본부는 개입이 한반도에 국한한다는 점을 명확히 하며 맥아더를 제어했다. 이에 맥아더는 강력히 반대했다.

영국은 미국이 월경추격권을 검토하고 관련국에 타진한 상황을 매우 우려했다. 비무장지대안은 중국의 개입과 미국의 만주 공격 등으로 일어날 수 있는 확전을 반대하는 대안이었다.

윌리엄 슬림 /위키피디아
윌리엄 슬림 /위키피디아

 

미 국무부는 영국의 비무장지대론을 검토했다. 국무부 정책기획국의 참모 존 데임스(John P. Dames)미국이 한국을 단념하고 즉시 철수하는 방안은 미국의 위신과 영향력에 처참한 영향을 미칠 것이고, 병력 증대를 통해 북한에서 중국인을 축출하는 방안은 전쟁 종료 시점을 예측할수 없게 하며, 남만주 지역을 겨냥해 작전을 수행하는 방안은 세계대전으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고 분석했다. 데임스는 북한 북부 지역에 비무장지대 설치, 북한지역에 대한 유엔의 관리, 한반도에서 유엔군의 단계적 철수, 한국군 강화 등을 제안했다.

하지만 데임스의 제안은 채택되지 않았다. 미국 수뇌부는 비무장지대 구축에 부정적이었다. 미국은 군사적 우월성을 자신하며 연합군이 중국을 이길수 있다고 자신했다. 맥아더는 영국이 북한의 한 지역을 떼어줌으로써 중공을 달래려 한다면 이는 1938년 히틀러에게 굴복한 뮌헨협정과 다름이 아니다고 참모본부에 주장했다.

당시 미국은 총공세의 군사작전을 계획하고 있었다. 1116일 맥아더는 존 무초 주한 미국대사에게 자신이 압록강의 교량들을 타격할 권한을 부여받았으며, 국경과 유엔군 주둔지역 사이를 사막처럼 초토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정부는 영국과 미국 사이에 비무장지대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이에 임병직 외무부 장관은 주미대사를 통해 완충지대 설치에 대한 우려와 반대의사를 표명했다. 주미대사였던 장면은 뉴욕에서 국무부 극동담당 차관보 러스크와 동아담당관 에먼스을 면담하고 비무장지대안을 반대하며 공산주의자들을 한국 땅에서 몰아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모니까 교수는 당시 이승만 정부의 기본 노선은 북진통일이었고, 비무장지대 설치에 반대했다고 설명했다.

 

DMZ /위키피디아
DMZ /위키피디아

 

한국정부의 주장이 먹혀들어간 것은 아니지만, 미국은 군사적 접근을 고수하며 영국의 비무장지대론을 부정했다. 1130일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핵은 무기의 하나라며 핵무기 사용을 검토하고 있음을 시사했다.

그러면 영국의 비무장지대론에 중국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한모니까 교수는 중국이 거부했다고 설명했다. 영국은 비무장지대 설치에 관해 다각도로 중국의 반응을 타진했으나, 뚜렷한 답변을 받지 못했다. 결국 영국의 비무장지대 설치 제안은 무위로 돌아갔다.

그해 12월 중공군은 빠른 속도로 남하하고, 이듬해 1월초 서울이 함락되었다. 1951710일 정전회담이 시작되면서 비무장지대 설치에 관한 논의도 다시 거론되었다.

 

미국의 외교거장 헨리 키신저는 저서 ‘Diplomacy’(외교, 1993)에서 인천상륙작전을 성공한 맥아더 사령관이 한국 인구의 90%를 차지할 수 있는 한반도 동과 서의 길이()가 가장 좁고 짧은 청천강과 함흥만을 잇는 선에서 북진을 멈추었어야 했다고 주장했다. 키신저는 다른 저서인에서인 ‘On China’(2011)에서 남포~원산 주변의 북위 39도를 기점으로 휴전했으면, 중국과 완충지대가 만들어져 손자병법을 숭상하는 모택동도 동의했을 것이라고 했다. 니얼 퍼거슨 교수는 ‘Colossus’(2005)에서 군사적 전략가를 넘어서 미국 대통령 출마에 야심을 품은 맥아더 장군이 한국전쟁을 이용하기 위해 두만강까지 진격하고 중공이 개입하자 원폭을 사용하려고 했다고 논증한 바 있다. (김위영 헨리 키신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