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남부 무슬림의 분리주의 운동
태국 남부 무슬림의 분리주의 운동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4.02.10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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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 종교, 언어에서 타이족과 다른 말레이족…2차 대전 이후 독립운동

 

태국은 전통적으로 소승불교의 나라이지만 인구의 5.3%는 수니파 무슬림이다. 태국 무슬림은 말레이시아와 국경을 이루는 말레이반도 남부지역에 거주한다. 행정구역으로는 얄리, 나라티왓, 파타니의 3개주에 밀집해 있고, 송클라, 사툰에도 분포한다. 이 지역 사람들은 태국의 주류종족인 타이족과 다른 인종의 말레이족이고, 언어도 타이어가 아닌 말레이어를 쓴다. 하물며 짐을 나를 때 태국인은 어깨에 매지만 이곳 사람들은 말레이식으로 머리에 인다. 1930년대 태국 군부정권은 민족동화정책의 일환으로 이들에게 머리에 이는 것을 금지하기도 했다. 그 정도로 태국인과는 사람들이다.

 

태국의 말레이족 /위키피디아
태국의 말레이족 /위키피디아

 

말레이반도 무슬림지역을 파타니(Patani) 지역이라고 부른다. 영어로 표기할 때 태국인들은 Patani, 말레이인들은 Pattani라고 표기하는데, t가 하나냐 둘이냐의 차이는 두 종족간 발음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한다.

고대에는 랑카수카(Langkasuka) 왕국이 있었다. 6세기초 중국 남조 양()나라에서 그려진 양직공도(梁職貢圖)에 동남아시아에서 온 랑아수국(狼牙脩國) 사신이 등장한다. 랑카수카 국왕이 중국에 보낸 사신을 그린 그림이다. 랑카수카는 고대해양국가였지만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에서 스리비자야가 강성해지며 쇠약해져 명맥만 이어갔다. 랑카수카는 힌두-불교왕국이었다.

랑카수카에 이어 파타니왕국(Patani Kingdom)이 들어섰다. 파타니왕국이 랑카수카를 계승했는지 여부는 확인되지 않는다. 전설에 따르면 이 지역의 통치자가 사냥을 나가 멋진 사슴을 발견하고 쫓아갔는데 아름다운 해변을 발견하고 바로 이 해변이야”(Pata ni lah!)라고 감탄했다. 왕은 그곳으로 도읍을 옮겼고, 이후 파타니왕국이라 불렀다고 한다.

파타니왕국의 건국시기는 명확치 않으나 15세기 중엽에 나라를 세웠고, 곧이어 이슬람을 받아들인 것으로 추정된다. 파타니는 일찍부터 이웃 태국의 지배를 받았다. 태국 아유타야 왕조의 속국이 되어 조공을 바쳤지만 내정에서 파타니 술탄은 자치권을 행사했다. 네명의 여왕이 지배하는 기간(1584~1688)에 무역국가로서 전성기를 이루었다. 네명의 여왕은 녹색, 청색, 퍼플, 황색 여왕으로 영국에 알려졌다. 파타니가 아유타야 왕조에 조공품으로 상납힌 금꽃(Bunga mas) 세공품이 남아 있다. 파타니는 3년에 한번씩 이 조공품을 올렸는데, 왕조 권력의 위계를 대변하는 유물이다.

 

꽃 모양의 금 조공품 분가마스(Bunga mas) /위키피디아
꽃 모양의 금 조공품 분가마스(Bunga mas) /위키피디아

 

1767년 아유타야가 버마에 멸망하면서 파타니 술탄은 잠시 완전 독립을 구가하지만 곧이어 1782년 태국에 라타나코신 왕조가 들어서면서 다시 속국이 되었다. 이 무렵 태국은 파타니 이외에도 말레이반도의 페를리스, 켈라탄, 케다, 트렝가누의 4개 술탄국도 속국으로 만들어 조공을 받았다.

파타니의 무슬림들은 방콕의 불교왕조에 저항했다. 1791~1808년 사이에 수차례 반란이 일어났고, 태국정부는 파티니 지역을 7개로 쪼개 방콕에 충성하는 인물로 술탄 또는 라자를 책봉했다. 1832, 1838년 두차례의 반란이 일어났고, 태국 정부는 강력하게 탄압했다.

1902년 태국의 쫄라롱꼰 국왕(라마 5)은 행정개혁을 한답시고 그나마 형식으로 남아 있던 파타니의 군주제를 없애고 7개 소주(小州)에 주재관을 파견했다. 영국이 말레이반도에 들어와 주재관을 파견한데 대한 대응이었다. 영국이 파타니 군주들을 흔들 것이 걱정이 되었던 모양이다.

이로써 파타니 술탄제는 명맥이 끊겼다. 왕족들은 태국 정부의 봉급을 받는 귀족으로 전락했고, 조세권과 부역권을 박탈당했다.

말레이반도는 10개의 술탄국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태국의 폭정에 반발해 케다가 자청해 영국의 보호령이 되면서 태국은 말레이반도에서 밀려나기 시작했다. 영국은 국경을 확정하자고 태국정부에 요구했고, 1909년 태국의 라마 5세는 페를리스, 케다, 켈라탄, 트렝가누 등 4개 술탄국을 영국에 내주고 파타니만 영유하게 되었다. 이때 그어진 국경이 지금 말레이시아와 태국의 국경이다.

 

1932년 태국에 군부쿠데타가 일어나 입헌민주주의가 채택되었다. 권력을 잡은 사람들은 민족주의자였다. 1938년 정권을 잡은 피분송크람은 파타니의 무슬림에게 동화정책을 강요했다. 피분은 파타니 초등학교에 말레이어 교육과정을 폐지하고 말레이어 서적 반입을 금지했다. 말레이인들이 입는 원통형 사롱 치마의 착용도 금지했다. 행정구역도 파타니, 얄라, 나라티왓으로 분리했다.

2차 대전 기간에 일본은 인도차이나를 점령한 기간(1942~1945)에 태국에 4개 술탄국을 양도했으나, 전후 영국이 다시 돌려받았다.

2차 대전에서 일본이 패하자 파타니의 옛 왕족과 귀족들은 런던에 청원서를 보내 파타니를 태국에서 독립시켜 달라고 요구했다. 영국은 태국이 일본에 부역한 적으로 보았으나 미국은 후에 들어선 친미 정권에 주목했다. 게다가 전후 냉전체제가 고착되면서 미국은 태국을 서방진영으로 끌어들일 필요가 있었다.

영국은 미국의 눈치를 보느라 파타니의 청원서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이제 더 이상 영국의 시대가 아니었다. 파타니의 독립은 무산되었다.

 

태국 남부 국경분쟁지역과 언어분포 /위키피디아
태국 남부 국경분쟁지역과 언어분포 /위키피디아

 

전후 태국은 말라야 민족주의자들의 부추김으로 파타니 무슬림들이 동요할 것을 우려했다. 방콕 정부는 파타니 무슬림에 대해 유화정책을 추진했다. 이슬람 체계를 도입하고 중앙에 무슬림을 관장하는 기관을 설립했다. 피분 정권이 금지했던 이슬람의 결혼, 가족, 상속제도를 복원하고, 모스크의 등록, 모스크평의회 설립 등의 조치를 시행해 나갔다.

그런데 종교적 측면에서는 타협이 이뤄졌지만, 언어 문제에서는 서로 강하게 부딛쳤다. 1960년대초 방콕 정부는 무슬림 사설학원인 폰독(pondok)을 양성화하는 조치를 단행했다. 폰독을 정부에 등록하고 정부의 지원을 받도록 했다. 교수어로 말레이어를 써도 좋지만 타이어를 두 번째 교수어로 채택하도록 했다. 아울러 교사와 학생 명단을 제출토록 했다.

무슬림들이 독자적으로 운영하던 폰독들이 고민에 빠졌다. 교육부에 등록해 재정지원을 받을 것인지, 예전처럼 비등록 상태에서 고유문화를 유지할 것인지 하는 것이었다. 1971년 통계에 400개 폰독이 정부에 등록한 반면에 150개 등록을 거부했다.

 

태국 남부 파타니 분쟁지역 /위키피디아
태국 남부 파타니 분쟁지역 /위키피디아

 

파타니 무슬림들에게 폰독은 방콕의 간섭을 받지 않는 고유의 공간이었다. 정부가 이 공간을 틀어쥐려고 하자 반발이 일어났다. 1962년 폰독 교사들이 민족혁명전선(BRN, Barisan Revolusi Nasional)을 결성했다. 이들은 좌파였다. 이들은 무장투쟁을 통해 말레이계 무슬림의 독립을 달성하는 것을 목표호 했다. 투쟁방식은 암살, 납치, 태업, 폭탄공격 등 폭력 수단을 동원했다. 이들의 극좌적 행동은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이에 1968년에 이슬람 학자들을 중심으로한 파타니연합해방기구(PULO, Patani United Liberation Organisation)가 조직되었다. 무슬림 조직은 중동 이슬람국가의 재정지원을 받았으며, 젊은이들은 아프가니스탄, 시리아, 레바논 등지로 건너가 수니파 알카에다의 훈련을 받았다. 1993년 태국정부는 무슬림 무장단체에 무기를 내려놓으면 사면을 약속했다. 지하에 암약하던 전사의 절반이 정부의 요구에 순응했지만, 150~200ㅁㅇ은 투항을 거부하고 말레이시아 국경근처 밀림에 들어가 버렸다.

파타니 독립운동은 현재 진행형이다. 2005년 민주적인 탁신 시나와트라 총리가 파타니 게릴라들과 평화협상을 추진했으나 20069월 군부 쿠데타로 무산되었다. 파타니 저항군의 규모는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는다. 태국 군부는 500명이라고 주장하지만, 다른 관측통들은 15,000명에 이른다고 추정한다. 2004~2015년 사이에 파타니 분리주의 운동으로 6,500명이 사망하고, 12,000명이 부상당했다는 주장이 있다.

 


<참고한 자료>

Wikipedia, Patani (historical region) 

Wikipedia, Patani Kingdom

Wikipedia, Patani United Liberation Organisation 

Wikipedia, South Thailand insurgen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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