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로마제국①…카를 대제, 로마제국 황제 되다
신성로마제국①…카를 대제, 로마제국 황제 되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6.14 07:0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카를 사망후 베르덩-메르센 조약 거쳐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분리

 

유럽사에서 중세와 근대를 관통하며 중부 유럽에 거대한 제국을 형성한 나라가 신성로마제국(Holy Roman Empire)이다. 제국의 범위는 지금의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스위스,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 서부(부르고뉴), 체코를 포괄한다.

이 거대한 제국은 로마 교황청을 등에 업고 서로마제국을 대체했고, 교황청과 싸우기도 했다. 한때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가 제국을 지배하며 유럽 최강국으로 부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말년에는 볼테르(Voltaire)의 표현을 빌리면, 신성하지도 않고, 로마도 아니고, 제국도 아닌 것으로 전락했다. 그러다가 프랑스 나폴레옹에 의해 1806년 해체된다. 초기엔 다민족의 제국이었지만, 17세기 이후 영토가 쪼그라들어 독일어를 쓰는 단일민족의 영역으로 좁혀졌다.

 

신성로마제국의 기원에 관해서는 두 가지 주장이 있다.

우선 서기 8001225, 교황 레오 3세가 프랑크왕국의 카롤(샤를마뉴) 1세에게 황제의 관을 씌워 서로마 제위의 부활을 선언한 시점을 출발점으로 보는 견해다.

다른 견해는 962년 동프랑크 왕국의 오토 1(Otto I)세가 황제에 올라 제위를 부활하면서 출발했다는 것이다. 대다수의 역사가들은 후자를 지지한다.

첫 번째 견해를 따르면 신성로마제국은 800~1806년 사이 1천년, 두 번째 견해를 따르면 962년부터 1806년까지 844년간 지속되었던 제국이다.

 

전자를 따르든지, 후자를 따르든지, 신성로마제국을 얘기할 때 카를 대제를 언급하지 않을수 없다.

476년 서로마제국의 명줄이 끊어진 후 중부 유럽은 무주공산이었다. 게르만 민족의 각 종족들이 서로 힘의 대결을 펼치며 영토 전쟁을 벌였다. 대혼란의 시기가 지나 서서히 새로운 실력자가 등장했으니, 그것은 프랑크족의 왕국이었다.

라인 강 하류에 정착하게 된 프랑크 족은 갈리아(프랑스) 일대로 세력을 넓혔고, 5세기 말에 프랑크왕국을 건설하고, 카를 대제 때 영토를 확장해 지금의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베네룩스 3국을 차지하며 광대한 제국을 건설했다.

카를 대제만큼 각국 언어로 달리 표현되는 황제도 없다. 카를 대제 때 프랑크 왕국은 현재 유럽 10여개국의 원조이기 때문에 각국이 자국어로 읽고 있다. 프랑스어로 샤를마뉴(Charlemagne), 독일어로 카를(Karl), 이탈리아어로 카를로(Carlo), 라틴어로 카롤루스(Carolus). 영어로는 찰스(Charles). 우리는 여기서 카를 대제라고 읽기로 하자.

 

800년 교황 레오 3세가 카를 대제에게 황제의 관을 씌우고 있다. /위키피디아
800년 교황 레오 3세가 카를 대제에게 황제의 관을 씌우고 있다. /위키피디아

 

카를 대제는 서기 800년 크리스마스인 1225일 로마에서 교황 레오 3(Leo III)로부터 로마황제 황제관을 머리에 얹는다. 그는 300여년 전에 멸망한 서로마제국을 부활시켜 황제에 오른다.

카를 대제는 황제가 되기 이전에 프랑크 왕으로 수 차례의 전쟁을 치르면서 왕국의 영토를 두배로 늘렸다. 서유럽에서 영국, 이베리아 반도, 이탈리아 남부를 제외한 전부가 그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게르만족 지역을 대부분 장악했고, 아시아계 유목민족과의 전쟁에서 헝가리 지역까지 정복했다. 이탈리아에서 롬바르드 왕국과 전쟁을 벌이고 베네벤토를 공격하고, 로마를 원정했다. 그때마다 교황에게 최대의 예우를 보였다.

 

카를 대제 때 프랑크 왕국의 최대영역 /위키피디아
카를 대제 때 프랑크 왕국의 최대영역 /위키피디아

 

카를 대제가 로마 황제가 된 것은 속세의 군주와 교황의 이해관계가 일치했기 때문이다.

카를은 사방에서 전쟁을 벌이면서 교회의 권위와 옛 로마제국의 권위를 빌리고 싶어 했다. 이에 비해 로마 교회는 동쪽의 그리스 정교와 주도권 다툼에서 이기기 위해 강력한 세속 권력의 지지가 필요했고, 이탈리아 내의 안정을 원했다.

당시 콘스탄티노플의 동로마 황제는 로마에 인접한 롬바르드 왕국을 부추겨 교황을 공격하게 했고, 로마교회 내 성직자들과 접촉해 교황에 도전했다. 교황은 생존을 위해서도 서유럽에서 가장 힘이 센 카를 왕의 지원이 절실했던 것이다.

카를이 로마 황제에 오르자, 고대 로마제국의 후계자였던 동로마제국의 황제가 분노했는데, 카를은 동로마황제에 깍듯이 예의를 표해 충돌하지 않고 무마했다. 동로마의 미카엘 1세는 812년에 카를을 황제로 인정했다. 짧은 기간이나마 카를 황제 기간에 서유럽에선 팍스로마나의 평화가 형성되었다.

 

카를 대제는 프랑크족의 관습법에 따라 자신이 죽은 후 제국을 아들들에게 똑같이 나눠 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러 아들이 일찍 죽고, 자신이 죽기 전에 살아남은 아들이 루이(루트비히) 밖에 없었다. 그는 고민 없이 제국을 루이에게 넘겨 주었다.

814년 아버지에게 제국을 독점적으로 물려받은 루이는 제국의 안정을 위해 프랑크족의 상속제도를 버리고 장자상속제도로 선택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재위 3년째 되던 817년 루이는 맏아들 로타르를 제국의 유일한 상속자로 지명했다. 문제는 루이의 두 번째 부인이 아들을 낳으면서 불거졌다. 전 왕비의 아들은 자신들이 물려받을 영토가 줄어들지 않을까, 사사건건 새 왕비와 대립했다.

아버지 루이는 생전에 로타르의 동생들에게 제국 내 소왕국을 물려주었다. 프랑크족의 관습을 기대하던 로타르의 동생들은 불만이 컸다. 아버지가 왜 갑자기 오랜 관습을 뜯어고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840년 아버지 루이가 죽자 사단이 벌어졌다. 믿아들 로타르는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제국 전체를 장악하려 들었다. 로타르는 동생들과 조카들의 영토를 내놓으라고 했다. 동생인 루이 2세와 카를은 배다른 형제이고, 서로 원수같이 지내던 사이였지만, 상속 지분에 관해서는 뜻을 같이 했다. 피보다 재산과 영토가 중요했던 것이다. 두 동생은 프랑크족의 관습에 따라 제국을 나눠야 한다며 맏형인 로타르에 대들었다.

전쟁은 필연이었다. 3년간 혈투가 벌어졌다. 841년 퐁트누아 전투에서 맏아들측이 두 동생의 연합군에 패했다. 3년간의 내전을 종식시키는 길은 타협 밖에 없었다. 동쪽에선 슬라브족, 북쪽에선 바이킹족, 서쪽에선 바스크족이 밀려들었다. 프랑크족의 관습법에 따라 한쪽이 나머지를 차지하는 것도 무리였다. 모두들 만족하는 수는 공평하게 나누는 것이었다.

 

843년 베르덩 조약에 의한 경계 획정 /위키피디아
843년 베르덩 조약에 의한 경계 획정 /위키피디아

 

서기 843811일 프랑스 북부 베르덩이라는 소도시에서 카를 대제의 손자 로타르 1, 루이 2(루트비히), 카를 등 세 상속자들이 모여 프랑크제국의 영토를 3등분하는 베르덩 조약(Treaty of Verdun)을 체결했다. 조약문은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어어로 번역되어 발표됐다.

조약에 따라 장손자인 로타르는 로트링겐(라인강 하류의 저지대, 지금의 베네룩스 3)과 알사스와 이탈리아를, 루이 2(루트비히)는 라인강 동쪽의 독일지역을, 그리고 막내 카를 2세는 아키텐을 포함한 프랑스 지역을 각각 소유하게 되었다. 중부유럽을 통일한 프랑크왕국은 동프랑크, 중프랑크, 서프랑크로 분열되었다.

 

이 조약이 체결된 원인은 게르만족으 상속제도에 있었다. 게르만족은 관습적으로 분할상속(Partible inheritance) 제도를 채택했다. 아버지가 죽으면, 남자 형제들이 영토(토지)와 작위, 재산을 균일하게 나누어 상속했다. 그런데 게르만족의 관습법과 달리 아버지의 지시로 한 상속자가 모든 것이 돌아갔으니, 다른 형제들이 강하게 반발하고, 결국은 전쟁이 터질 수밖에 없었다. 세 형제가 영토를 3등분 하기로 한 협정이었다.

 

870년 메르센 조약에 의한 경계 획정 /위키피디아
870년 메르센 조약에 의한 경계 획정 /위키피디아

 

동프랑크와 서프랑크는 지역적으로 밀집되어 있어 나름 통합이 쉬웠다. 하지만 중프랑크는 중간에 알프스산맥이 가로 막혀 있어 통합이 어려웠다. 북부의 로트링겐과 알사스 지역은 중프랑크에 속해 있었지만, 동서 프랑크의 양면 공격으로 쉽게 무너졌다.

베르뎅 조약이 체결된지 37년후인 8708월 메르센 조약(Treaty of Meerssen)이 체결된다. 이 조약으로 인해 생긴 국경이 오늘날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로 굳어지는 기원이 된다.

 

중프랑크 영역이었던 로트링겐의 알사스-로렌지역은 오랫동안 독일과 프랑스의 분쟁지역으로 남게 된다. 알사스-로렌은 1738년 빈 조약에 의해 합스부르크에서 프랑스로 이양되고, 1871년 프로이센의 프랑스 침공 이후 독일 영토가 되었다가 1919년 베르사이유 조약으로 프랑스 땅이 되었다. 2차 대전이 발발하고 독일이 일시 점령했지만, 전쟁이 끝난후 다시 프랑스로 되돌아갔다. 알사스-로렌의 비극은 멀리 1천년전 베르뎅 조약에서 그 출발점을 갖는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