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타제국①…시바지, 힌두국가 건국하다
마라타제국①…시바지, 힌두국가 건국하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3.01.21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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힌두세력 결집해 무굴제국에 저항…영국의 인도 식민지화에 마지막 걸림돌

 

마라타 제국(Maratha Empire)은 인도 역사에 등장하는 마지막 힌두교 국가다. 무굴제국 아우랑제브 황제 재위시기인 1674년에 건국되어 1818년 영국 동인도회사 군대에 의해 해체되기까지 144년간 지속했다. 인도 서부 마하라슈트라 지방에서 출발한 이 나라는 한때 인도반도 중부와 북부로 영토를 확장하며 이슬람 국가인 무굴제국을 약화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마침내 무굴제국을 속국으로 만들었으나, 인도 내륙으로 팽창하는 영국과의 대결에 패해 무너졌다. 영국은 마라타 제국을 멸망시킴으로써 인도를 집어삼키는 마지막 걸림돌을 제거했다.

 

마라타인은 서부 데칸 고원의 전사 집단을 말한다. 그들은 17세기에 힌두 자치주의를 의미하는 힌다비 스와라지’(Hindavi Swaraj)를 내걸고 세력을 불렸다. 그들이 주장한 스와라지는 후에 인도 민족주의자들의 독립운동 슬로건으로 활용되었다.

마라타가 일어난 마하라슈트라 지역은 지형상 강과 언덕으로 둘러싸여 외부의 침입이 쉽지 않은 곳이었다. 토양도 거칠고 강우량이 부족해 경작이 힘들었다. 이곳 사람들의 기질은 강인했다. 이들은 특히 힌두교로 무장했다. 마라타인들은 그들의 강점이었던 기동성을 잘 활용해 무굴 제국과의 전쟁에서 압도해 나갔고, 인도반도에 세력을 확장시켜 나갔다.

무굴제국의 아우랑제브 황제는 독실한 무슬림이었다. 황제는 이교도가 무슬림과 동등한 대우를 받는 것을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아우랑제브는 악바르 황제 때 비무슬림에게 인두세를 면제해주던 조치를 철회하고 다수의 힌두사원을 폐쇄했다. 무굴제국 내에 힌두교도 등용을 제한하고, 포로로 잡힌 반란자에게 무슬림 개종을 강요했다. 아우랑제브의 이런 조치에 힌두교도들의 불만이 고조되었다.

 

시바지 초상화 /위키피디아
시바지 초상화 /위키피디아

 

마라타인들에게 시바지 보살레(Shivaji Bhosale, 1630~1680)라는 탁월한 지도자가 있었다. 그의 아버지 샤하지는 자신의 병력을 보유한 지방군벌로 무슬림 국가인 비자푸르에 봉사하고 있었다. 당시 데칸고원은 비자푸르, 아흐메다나가르, 골콘다의 세 무슬림 국가가 할거하고 있었다.

시바지는 나이 열여섯에 토르나 요새(Torna Fort)의 주인이 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자신의 영지를 확대해 나갔고, 라지가드 요새(Rajgad Fort)을 축성했다. 시바지는 키 150cm의 단신으로 무슬림의 통치를 증오했다. 그는 산등성이를 오르내리며 비자푸르의 요새들을 공격하며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그의 영향력이 커지자 비자푸르 술탄 아딜샤가 시기해 그의 아버지 샤하지를 1년간 구금하기도 했다. 1649년 아버지가 풀려나자 시바지의 공격은 재개되었다. 아버지는 아들의 반역과 무모함을 나무랐지만, 나중에 시바지의 리더십과 전투력, 힌두교에 대한 충정을 지지하게 되었다.

 

시바지는 억압받는 힌두교 민중에게 영웅으로 떠올랐다. 그는 비자푸르의 취약한 곳을 공격했고, 힌두교를 억압하는 무슬림을 단호하게 처벌해 지지기반을 넓혀 나갔다. 1659년 비자푸르가 아프잘 칸에게 2만 명의 군대를 주어 시바지를 공격했다. 시비지는 패해 도주하는 척하다가 산악지대로 유인해 아프잘 칸을 사로잡아 죽이고 비자푸르를 제압했다. 이 전투 이후 시비지는 마하라슈트라 지역의 강한 군벌로 자리잡게 되었다.

 

무굴의 아우랑제브 황제는 처음에 시바지의 반란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황제 자신은 북쪽에서 일어난 힌두 무사 라지푸트 반란을 진압하는데 주력하고, 남쪽 데칸고원은 현지 총독에게 위임했다. 그런데 마라타가 의외로 선전하고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시바지는 1663년 푸나 지역을, 1664년엔 무굴제국의 주요 무역항이던 수라트를 약탈했다.

 

​마라타의 시조 시바지가 무굴황제 아우랑제브를 만나는 그림 /위키피디아
​마라타의 시조 시바지가 무굴황제 아우랑제브를 만나는 그림 /위키피디아

 

아우랑제브는 남쪽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무굴제국의 막강한 군대가 데칸고원에서 공세를 취하면서 시바지의 세력권도 밀려나게 되었다.

1666년 무굴의 아우랑제브가 시바지를 아그라(델리라는 설도 있다)로 소환했다. 아우랑제브는 인도의 황제였고, 시바지는 지방의 일개 군벌에 지나지 않았다. 황제의 부름에 응하지 않으면 죽음이 기다릴수도 있었다. 시바지는 무굴에 맞서 싸우느냐, 평화의 기간을 잠시 갖느냐의 기로에 서 있었다.

시바지는 9살 난 아들 삼바지(Sambhaj)만 데리고 무굴 궁전으로 갔다. 인도 역사가들은 이 장면을 대담하게 그린다. 무슬림은 외부의 종교, 힌두는 민족 종교로 보는 힌두사관으로선 약간의 과장이 필요할 것이다. 512일 시바지는 무굴 궁전으로 들어가 아우랑제브를 만났다. 황제는 높은 왕좌에 앉아 있고, 시바지의 주변엔 자신과 싸워 패한 장수들이 도열해 있었다.

시바지는 당당하게 황제의 제안을 거절했다고 한다. 아우랑제브는 시바지와 그의 아들 삼바지를 대신 람 싱(Ram Singh)의 집에 연금시켰다. 무굴제국은 시바지 부자를 죽일 것인지를 논의했다. 람 싱은 이용가치가 있다며 그들을 죽이지는 말자고 해 아우랑제브도 받아들였다.

그렇게 목숨을 부지한 시바지 부자는 극적으로 탈출했다. 그해 817일 부자는 하인으로 변장하고, 커다란 빨래 바구니에 들어가 무굴 제국을 벗어나게 되었다. 무슬림에 눌려 지내던 힌두교도들이 지어낸 영웅담일수도 있다.

 

시바지 말년의 마라타 영토 /위키피디아
시바지 말년의 마라타 영토 /위키피디아

 

어쨌든 마라타로 돌아온 시바지는 무굴제국을 다시 공격함으로써 무굴과 마라타의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었다.

시바지는 167466일 라이가드 요새에서 정식으로 즉위식을 갖고 차트라파티( Chhatrapati)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이는 산스크리트어로 주권자라는 의미로, 황제로 번역한다. 그는 그후 6년간 재위하면서 종교에 대한 관용 정책을 베풀었다. 무슬림도 예외는 아니였다. 그는 골콘다 왕조와 연합해 무굴 제국의 침입을 막아내기도 했다. 그는 1680년에 사망했는데, 50세였다.

시바지가 죽을 무렵 마라타의 영토는 인도 대륙의 4.1% 정도를 차지했으며, 300여개의 요새, 4만여명의 기병, 5만여명의 보병들을 거느린 나라로 성장해 잇었다.

 

삼바지 초상화 /위키피디아
삼바지 초상화 /위키피디아

 

시바지에게는 삼바지와 라자람 두 이복형제가 있었다. 형 삼바지가 라자람보다 국민들에게 더 많은 지지를 얻고 잇었다. 시바지가 사망한 후, 장남 삼바지가 승계했고, 그는 아버지에 이어 영토 확장 정책을 이어갔다.

삼바지는 와디야르 왕조와 포르투갈 군대를 무찔렀고, 아우랑제브 황제에게 반란을 일으킨 황자 악바르와 동맹을 맺었다. 아우랑제브는 아들을 무릎을 꿇리기 위해 1681년에 50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남진했고, 비자푸르 술탄국을 정복하며 삼바지를 압박했다. 삼바지는 8년 동안 아우랑제브의 무굴 군대와 맞서 싸웠는데,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1689년 초, 삼바지 보살레는 군사 회의를 열었는데, 그 정보가 무굴군에 넘어갔다. 아우랑제브는 습격을 명령했다. 그해 21일 무굴군은 마라타 수뇌부의 회의장을 급습해 삼바지를 생포했다. 아우랑제브에게 포로가 되기는 두 번째다. 아우랑제브는 삼바지에게 굴욕을 주었다. 무굴군은 마라타 황제에게 광대 옷을 입혀 거리를 끌고 다니고, 구경꾼들에게 욕을 하도록 강요했다. 아우랑제브는 삼바지에게 이슬람으로 개종할 것을 요구했다. 그는 끝내 개종을 거부했다. 삼바지는 321일 반역죄를 뒤집어 쓰고 처형되었다. 그후 그의 이복형제였던 라자람 보살레가 승계했다.

 


<참고한 자료>

Wikipedia, Maratha Empire

Wikipedia, Shivaji

Wikipedia, Sambhaj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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