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티오피아사⑦…마지막 황제 하일레 셀라시에
에티오피아사⑦…마지막 황제 하일레 셀라시에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10.13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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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제 데우티투 섭정으로 권력 장악…이탈리아 침략에 망명, 공산반란으로 퇴위

 

에티오피아의 마지막 황제는 하일레 셀라시에(Haile Selassie, 1892~1975). 솔로몬 왕족의 방계로 황제 서열에서 멀었지만 24세의 나이에 제우티투(Zewditu) 여제의 섭정으로 권력을 잡은 후 황제에 올라 44년간 통치하다가 1974년 공산혁명으로 퇴위했다. 이탈리아 침공으로 나라를 빼앗겨 5년간(1736~1941) 영국에 망명생활을 하기도 했으며, 이탈리아가 2차 대전에서 패전한 이후 복귀했다. 19506·25 전쟁 때 에티오피아군을 파병했고, 19685월에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의 이름은 타파리 마코넨(Tafari Makonnen)이다. 타파리는 13살이던 1906년에 아버지가 죽고 셀라테(Selale)라는 소도시의 영주가 되었고, 18살이던 1910년에 하라르(Harar)의 총독이 되었다.

191312, 영웅적 황제였던 메넬리크 2세가 아들 없이 죽고 권력 공백이 생겼다. 메넬리크는 죽기 전에 혼외로 낳은 맏딸의 아들, 즉 외손주 이야수(Iyasu)를 후계자로 지명했지만, 그의 나이는 18살에 불과했고 적통성도 약했다.

메넬리크의 생전 가신들이 황제의 죽음을 감추고 황실 친척들을 추방하거나 감금해 버렸다. 가신들은 이야수를 허수아비로 앉혀 놓고 국정을 농단했다. 이야수는 여러차례 가신들과 관료들에게 저항했지만,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 장관들이 권력을 독식하고 이야수는 황제 아닌 황제 놀음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3년이 흘렀다. 19168월 이야수는 변장을 하고 황궁을 탈출해 프랑스령 소말리아(지부티)로 갔다. 그가 그곳에서 기독교를 배교하고 이슬람 친구들과 어울리며 코란을 낭송했다는 소식이 에티오피아 왕실에 들려왔다.

메넬리크에겐 정실 자손이 없지만 혼외 자식으로 두명의 딸이 있었다. 둘째 딸 제우티투가 조카 이야수의 배교 소식을 듣고 분노했다. 그녀를 도와준 사람이 타파리였다. 1)

 

하일레 셀레시에 황제 /위키피디아
하일레 셀레시에 황제 /위키피디아

 

1916927일 제우디투는 이야수의 퇴위를 선언하고 여제에 올랐다. 물론 타파리를 중심으로 하는 귀족세력들의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메넬리크 2세의 남성계열의 후계자가 없었기에 제우티투는 에티오피아 역사상 유일의 여성 황제(Negiste Negest)가 되었다. (남성황제는 nəgusä nägäst)

제우티투 여제 /위키피디아
제우티투 여제 /위키피디아

 

이때 티파리는 24세였다. 제우디투는 마침내 메넬리크 2세의 죽음을 공포했다. 죽은지 3년만이다. 아야수는 즉위식도 하지 못한채 물러났다.

제우티투도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실권은 티파리를 비롯해 귀족들이 쥐고 있었다. 티파리는 제우디투의 언니(Woizero Shoaregga) 측의 반란과 이야수 지지자들의 도전을 제압했다. 에티오피아의 귀족회의는 티파리를 섭정으로 지명했다.

남성 귀족들은 여성 황제의 통치를 제한했다. 제오티투의 남편은 멀리 외직으로 밀어내고, 여제는 내정에 간섭하지 못하도록 했다. 후에 이야수가 체포되었는데, 제우티투는 조카에 대한 동정심으로 자신이 감금시키는 조건으로 처벌을 완화하는 조치를 취했다. 여제가 할수 있는 것은 고작 이 정도였다. 2)

 

타파리는 섭정 시절부터 에티오피아의 근대화에 앞장섰다. 그는 1923년에 에티오피아를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에 가입시키고, 노예제도를 폐지했다. 당시 에티오피아에 200만명의 노예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924년 타파리는 고위관료들로 시찰단을 구성해 외국의 선진문물을 배우러 다녔다. 방문지는 예루살렘(영국령), 알렉산드리아(이집트). 파리, 브뤼셀, 암스테르담, 스톡홀름, 런던, 제네바, 아테네 등지였다. 그들은 해외의 교육시설을 시찰하고 병원, 공장, 교회들을 방문했다. 타파리는 유럽국가들의 경제적 제국주의를 예의 주시하면서 신진문물을 받아들이되 산업은 국내 자본으로 운영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19304월 제우디투 여제가 죽고 타파리가 제위에 올랐으니, 하일레 셀레시에 황제다. 셀레시에는 즉위 직후 1931년 처음으로 성문헌법을 채택하고, 양원제를 도입했다. 3)

 

에티오피아를 침공한 이탈리아군 /위키피디아
에티오피아를 침공한 이탈리아군 /위키피디아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를 집어삼키기 위해 준동했다. 이탈리아에선 1922년 베니토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당이 정권을 장악해 제국주의적 영토확장을 추진했다. 그는 30년전인 1896년 에드와 전투에서 에티오피아에 패배한 것을 설욕하겠다고 다짐했다.

이탈리아는 호시탐탐 에티오피아 침공을 위한 꼬투리를 잡으려 했다. 1928년 이탈리아는 양국이 설정한 국경선 안쪽 웰웰(Welwel)이라는 오아시스에 군사요새를 건설했다. 에티오피아는 이탈리아의 의도를 비난했다.

셀레시에가 즉위한 후 193411월 에티오피아는 1,000명의 병력을 동원해 아틸리아 초소에 접근해 철수를 요구했다. 이탈리아군은 거부했고, 양측 사이에 교전이 발생했다. 에티오피아군에서 107, 이탈리아군이 50명의 사망자가 각각 발생했다.

이탈리아는 이 사태의 책임을 에티오피아에게 전가하고 전쟁을 개시했다. 1935103일 이탈리아는 선전포고도 없이 에리트레아와 소말리아에 주둔한 병력을 에티오피아 영내로 진입시켰다. 에티오피아군은 격렬하게 저항했다. 황제는 몸소 전쟁터에 나가 전투를 지휘했다. 하지만 탱크와 야포, 항공기를 보유한 이탈리아군은 재래식 무기로 무장한 에티오피아군을 격퇴시키고 서서히 고원지대로 조여갔다. 이듬해 봄, 이탈리아군은 수도 아디스아바바에 접근했다.

 

1935~1936년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공 /위키피디아
1935~1936년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공 /위키피디아

 

황실과 각료들 사이에 황제가 망명해야 하느냐, 내륙 고산지대로 이동해 계속 저항하느냐를 놓고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셀레시에는 망명을 선택했다. 그는 홀로 에티오피아 교회의 성지인 랄리벨라를 방문한 후 193554일 프랑스령 소말리아로 탈출했다. 다음날 이탈리아군은 아디스아바바를 점령하고 이탈리아 국왕 빅토르 엠마누엘 3(Victor Emanuel III)를 에티오피아 황제로 선포했다. 4)

 

셀레시에와 황족은 영국 군함을 타고 예루살렘에 들러 참배했다. 자신이 솔로몬 왕의 후손임을 확인하고 기독교 서방세계에 지지를 호소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지브롤터를 거쳐 영국으로 건너가 머물면서 이탈리아의 침공을 규탄하는 호소문을 국제연맹에 제출했다.

국제연맹 총회는 셀레시에를 초대해 연설을 들었다. 총회 의장은 그를 에티오피아 황제라고 소개했다. 이탈리아의 침략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그는 암하라어로 연설을 했다. 국제연맹이 이탈리아를 규탄하고 셀레시에를 지지하자 이탈리아는 국제연맹을 탈퇴했다.

 

이탈리아 점령 5년 동안 에티오피아인들은 처절하게 저항운동을 펼쳤다. 그들은 검은 사자단’(Black Lions)를 조직해 산악지대에서 게릴라전을 펼쳤고, 수도 아디스아바바 탈환을 시도했다. 이에 대응해 이탈리아는 대량학살을 저질렀다. 1937219일에 일어난 예카티트 12’(Yekatit 12) 사건은 이탈리아 군은 아디스아바바 인구의 20%에 해당하는 2~3만명을 학살했다. 이탈리아군은 제네바 협정을 위반하며 독가스를 살포했다. 이런 만행은 2차 대전에서 이탈리아가 패전하면서 종식되었다.

 

19406월 영국군은 에티오피아 저항군과 함께 동아프리카 이탈리아령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이탈리아군은 영국군에 순식간에 제압되었고, 황제는 망명한지 5년이 되는 194155일에 아디스아바바로 돌아왔다.

 

하일레 셀레시에 황제가 1941년 4월 영국 장교들과 작전을 논의하고 있는 모습. /위키피디아
하일레 셀레시에 황제가 1941년 4월 영국 장교들과 작전을 논의하고 있는 모습. /위키피디아

 

황제에 복위한 그는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에티오피아군을 파견했고, 195511월 대한민국 건국훈장 최고등급인 대한민국장을 수여받았다.

1961년의 베오그라드의 비동맹 정상 회의에 참석해 제3세계의 입장을 강화하고, 1963년에 설립된 아프리카통일기구(OAU) 초대 의장이 되었다. 그는 이스라엘과 군사적 협력 관계를 맺는 등 독자적인 외교 노선을 추진했다.

1973년 이후 파업과 시위가 빈번히 발발했고, 에리트레아에서는 내전이 발생해 정세가 악화 일로를 걸었다. 19741012일 하일레 셀라시에는 소련의 지원을 받는 공산주의자들의 쿠데타로 폐위되었다. 그는 감옥에 갇혔다가 이듬해인 1975827일에 사망했다.

하일레 셀라시에가 퇴위한 이후 지병 치유차 해외에 머물고 있던 황태자 암하 셀라시에(Amha Selassie)가 형식적으로 제위를 이어받았다. 하지만 공산정부가 19753월에 공식적으로 황제 제도를 폐지함으로써 에티오피아의 솔로몬 왕가는 종언을 고하고 말았다.

 


1) Wikipedia, Lij Iyasu of Ethiopia

2) Wikipedia, Zewditu

3) Wikipedia, Haile Selassie

4) Wikipedia, Second Italo-Ethiopian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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