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한②…양나라에 간 백제 사신
마한②…양나라에 간 백제 사신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3.11.01 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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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직공도, 6세기초에도 마한이 존재했다는 사실 입증…마한사 연구에 활력

 

백제가 무령왕 21(521)에 중국 남조 양()나라에 사신을 보낸 사실이 삼국사기에 남아 있다. 같은 기록이 양나라에서도 발견되었다. 이른바 양직공도(梁職貢圖). 직공(職貢)은 조공을 의미한다. 조공사절단의 모습을 그리고 활동내역을 간략하게 적어둔 것이 직공도다. 양나라의 직공도에는 13개국의 기사가 적혀 있는데, 521년 무령왕이 보냈다는 사절단의 기록도 포함되어 있다. 삼국사기와 양직공도는 무령왕이 고구려를 여러 차례 무찔렀다는 내용이 동시에 실려 있어 사료의 신뢰성을 높여준다.

양직공도에는 1,500년전 백제인의 모습이 컬러로 그려져 있다. 백제 사신은 머리에 관을 얹고 끈을 턱에 묶었으며, 도포를 오른쪽 섶으로 여몄다. 검은 가죽신을 신었는데, 신의 코끝은 위로 올라가 있다. 이런 신의 모양은 공주와 부여에서 출토된 금동신발과 비슷하다. 옆에서 그려진 관은 백제 금동관과 같은 반원형 고깔이다.

 

양직공도는 6세기초 백제인의 모습과 상황을 보여주었는데, 마한사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백제가 양나라에 전한 내용에 마한의 존재를 암시하는 내용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양직공도 내용 중에서 역사학자들이 주목한 대목은 백제에 22담로가 있다는 사실, 주변 소국(旁小國)으로 반파, , 다라, 전라, 사라, 지미, 마련, 상기문, 하침라 등이 있다는 사실이다.

담로는 백제의 직할령이고, 방소국(旁小國)은 복속하지만 독립한 나라다. 양직공도에서 설명했듯이 담로는 왕실의 자제종족(子弟宗族)을 파견해 통치하는 영토이고, 방소국은 부용국(附庸國)의 개념이다.

담로는 지방행정제도다. 백제의 영토는 통일신라에서 웅주, 전주, 무주의 3개 주로 편제되었다. 웅주는 지금의 충청도, 전주는 전라북도, 무주는 전라남도(광주 포함)와 대체로 비슷하다.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웅주의 군()13, 전주 10, 무주 15개로 되어 있다.

웅주와 전주의 군의 수를 합치면 23개다. 무녕왕 때 담로의 수 22개와 비슷하다. 백제의 담로와 통일신라의 군이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면, 무녕왕 때 백제영토는 웅주와 전주였다. 전남·광주의 무주는 무녕왕 이후에 백제 땅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전남대 임영진 교수는 양직공도의 기사를 근거로 광주·전남권은 521년경에 백제에 편입되지 않았을 것으로 보았다. 무주의 15개 단위지역()은 나중에 백제와 합쳐졌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임영진 교수는 중국 사서에 나오는 마한 54개국은 충청 12, 전북 10, 전남·광주 15개 정도 있었으며, 나머지 17개는 경기·서울에 있었을 것으로 보았다. 마한의 소국, 백제의 담로, 통일신라의 군이 대체로 비슷한 구역을 형성했을 것이란 가정이다.

 

양직공도 /維基百科
양직공도 /維基百科

 

그러면 무령왕 때 22개 담로에서 제외된 전남·광주는 누가 지배했을까. 그 대답을 양직공도에 기술된 방소국에서 찾을수 있다.

백제 사신은 백제에 부속한 작은 나라로 반파(叛波), (), 다라(多羅), 전라(前羅), 사라(斯羅), 지미(止迷), 마련(麻連), 상기문(上巳文), 하침라(下枕羅)9곳을 거론했다. 이중 반파, , 다라, 전라, 사라는 영남지역이고, 지마, 마련, 상기문, 하침라는 호남지역이다. 사라는 신라인데, 백제가 당시 신라를 부용한다고 주장한 것은 과장이다. 호남의 4곳도 백제로부터 독립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상기문과 하침라의 상·하는 위치를 나타내는 접두어로 보인다. 그렇다면 지마, 마련, 기문, 침라는 어디일까. 임영진 교수는 상기문은 전북 남원에 해당하고, 나머지 3곳은 전남으로 비정했다. 하침라는 고창·영광, 마련은 나주··영암, 지미는 고흥·여수라는 것이다.

양직공도는 중국에서 1960년도에 확인되었고, 국내에 소개된 것은 1965년이다. 이병도 박사가 마한의 백제 병합시기를 369년으로 비정한 때가 1959년이었다. 이병도는 양직공도의 존재를 모른채 마한 멸망시기를 일본서기를 근거로 비정했다.

 

양직공도에 대한 해석이 진척되면서 마한이 369년에 백제에 병합되었다는 견해가 근거를 잃게 되었다. 양직공도가 살아나면서 적어도 521년에 마한은 존속했다는 게 입증되었다. 마한의 수명이 160년 정도 더 연장된 것이다.

양직공도의 발견은 마한사에 이정표를 제시했다. 마한은 고대에 사라진 왕국이 아니라, 백제말기까지 영산강 일대에 존속했던 나라로 돌변했다. 그동안 백제를 뿌리라고 생각했던 호남 사람들이 마한을 다시 보게 되었다. 온조왕 때 마한이 멸망했다는 삼국사기 기사는 일부 재야학계 이외에서는 사실로 받아들여지지 않게 되었다.

마한에 대한 문헌적, 고고학적 연구도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미스터리에 싸여 있던 나주 반남고분도 다시 들여다보게 되었다. 2019년 백제·마한 관련 학술지인 백제학보에 더 이상 백제의 4세기 마한합병설을 입증할수 없다는 논문이 발표되었다. 고고학적 논문도 이 견해를 뒷받침했다.

 

정동준 성균관대 교수는 문헌고찰을 통해 4~5세기에 백제가 금강 이남 지역에 대해 철저하게 지배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정동준은 양직공도의 4개 소국(지미 마련 기문 침라)이 백제의 영역이 된 것은 성왕(재위 523554) 대의 어느 시점으로 보았다.

전남광주 일대에 700여개의 마한 유적이 발굴되었다. 전남대 박물관의 강은주는 2019년 논문에서 영상강 상류권의 생활유구와 분묘유구를 분석한 결과로 3세기~ 5세기 전기에 마한의 공통적 정체성이 공유되면서 독자성의 발판이 형성되었다고 보았다. 2단계로 5세기 중엽~6세기 전기에 다양한 외래적 요소가 나타나 조합되면서 새로운 양식이 형성되고, 6세기 중엽 이후 3단계에 백제 토기로 일원화했다고 파악했다.

마한이 언제 멸망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다만 땅 속에서 발굴되는 고고학적 증거로 볼 때 6세기 중엽일 것이란 의견을 지배적이다. 임영진 교수에 따르면 5세기말~6세기초에 성행했던 거대한 마한 고분들이 6세기 중엽 이후 소규모 백제고분으로 바뀌는 것이 백제의 병합이 그 싣기에 이루어졌음을 말해준다.

 

마한이 6세기 중엽까지 존재했다면, 백제가 전남·광주 지역을 지배한 것은 100년 남짓에[ 불과하게 된다. 전남·광주권은 고대사의 뿌리 찾기 일환으로 역사문화 정비 등에 관한 특별법에 마한을 넣자고 요구했다. 그동안 신라, 백제, 가야, 고구려는 특별법 대상에 들어가 있었는데, 20216월에 마한과 가야도 대상에 포함되었다.

전라남도 지역에선 그동안 국립박물관이 광주에만 있었는데, 2013년에 마한의 상징적 유적인 나주 반남고분군 근처에 국립나주박물관이 개관했다. 또 영암에 마한역사문화센터를 건립하기로 결정되었다. 마한이 부활하고 있는 것이다.

 

양직공도 /維基百科
양직공도 /維基百科

 

<양직공도의 내용>

百濟國使

百濟舊來夷馬韓之屬. 晉末駒驪略有遼東, 樂浪亦有遼西晉平縣. 自晋已來常修蕃貢, 義熙中其王餘?, 宋元嘉中其王餘毗, 齊永明中其王餘太, 皆受中國官爵. 梁初以太爲征東將軍. 尋爲高句驪所破, 普通二年, 其王餘隆遣使奉表云, 累破高麗.

所治城曰固麻, 謂邑曰?, 於中國郡縣, 有二十二檐魯, 分子弟宗族爲之. 旁小國有 叛波, , 多羅, 前羅, 斯羅, 止迷, 麻連, 上巳文, 下枕羅 等附之. 言語衣服 略同高麗, 行不張拱 拜不申足, 以帽爲冠, 襦曰複袗 袴曰褌, 其言參諸夏 亦秦韓之遺俗.

 

백제국 사신

백제는 동이 마한에 속하였다. ()진 말에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하자 백제 역시 요서 진평현을 차지하였다. ()진 이래 조공해 왔는데 (동진) 의희 연간에 왕 여전(진지왕), 송나라 원가 연간에 왕 여비(비유왕), 제나라 영명 연간에 왕 여태(동성왕) 모두가 중국 관작을 받았다. 양나라 초에태(동성왕)을 정동장군으로 삼았다. 몇 차례 고구려가 침략하였는데 (양나라) 보통 2년에 그 왕 여융(무령왕)이 사신을 보내 표를 올리며 고하기를 잇달아 고구려를 무찔렀다고 하였다.

그 나라 도성을 고마라 하고 읍을 담로라고 하는데 이는 중국 군현과 같다. 22담로가 있어 (왕의) 자제종족이 나누어 다스렸다. 주변 소국으로 반파, , 다라, 전라, 사라, 지미, 마련, 상기문, 하침라 등이 있어 부용한다. 언어와 의복은 대체로 고구려와 같다. 걸을 때 팔을 벌리지 않고 절을 할때 다리를 펴지 않는다. 모자로 관을 삼고 저고리를 복삼이라 하며 바지를 곤이라 한다. 그 나라 말에는 중국 말들이 섞여 있으니 이는 진한의 습속이 남은 것이다. (출처: 임영진 저서)

 


<참고한 자료>

우리가 몰랐던 마한, 임영진, 2021, 홀리데이북스

문헌사료로 본 백제의 마한 통합과정, 정동준, 2019 백제학보

영산강 상류 마한세력의 성장과 백제, 강은주, 2019 백제학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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