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한⑤…나주 금동관의 위세
마한⑤…나주 금동관의 위세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3.11.10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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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금동관과 문양, 제작기법에서 독자성 확인…일본 큐슈 금동관에 영향

 

전남 나주시 반남면 신촌리의 나주박물관을 방문하면 화려한 금동관이 다른 어떤 유물보다 눈에 들어온다. 공식명칭은 인근 신촌리 9호 고분에서 발굴되었다 하여, ‘신촌리 금동관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두 조각으로 나뉘어 있다. 외관과 내관이다.

내관은 상투 위에 얹는 것으로, 모관(帽冠) 또는 상투관이라고도 하며, 외관은 내관 바깥에 두르는 것으로 대관(帶冠)이라고도 한다. 두 관을 함께 쓰기도 하고 따로 쓰기도 한다. 신촌리 금동관의 외관은 나뭇가지 모양의 장식 3개를 머리에 두른 띠 부분인 대륜에 꽂아 세웠으며, 내관은 반원형의 동판 2장을 맞붙여 만들었다. 기본 형태는 신라 금관과 같으나 머리 띠에 꽂은 장식이 신라 관의 자 모양보다 복잡한 풀꽃 모양을 하고 있어, 더 오래된 양식이란 견해가 있다.

 

신촌리 금동관 /문화재청
신촌리 금동관 /문화재청

 

신촌리 금동관은 191712월말, 이 땅을 지배한 조선총독부 고적조사단의 야쓰이 세이이치(谷井濟一) 일행이 발굴한 것이다. 무덤에는 독널(옹관) 11개가 묻혀 있었고, 그 중 을()관이라 임시로 붙인 옹관에서 금동관이 나왔다. 이 옹관에서는 금동관 뿐아니라, 금동신발, 환두대도, 토기 등 다양한 유물도 1,500년의 세월을 뚫고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신촌리 금동관은 우리나라에서 발굴된 최초의 금동관이다. 곧이어 3년후 1920년에 경남 양산에서 금동 모관과 대관이 출토되고, 또 한해 후인 1921년에 경주 금관총에서 신라 금관이 나와 신촌리 금동관은 상대적으로 빛을 잃었다.

 

하지만 해방이후 충청도, 전라도 일원에서 금동관이 속속 발견되면서 신촌리 금동관이 주목받게 되었다. 게다가 일본 큐슈의 에다후나야마(江田船山) 고분의 금동관과 유사하다는 점에서 관심이 증폭되었다.

연구가 진척되면서 신촌리 금동관은 백제 지역 금동관과 차이점이 확인되었고, 따라서 이 금동관이 마한 문화의 상징으로 부상했다. 신촌리 금동관은 1997년 국보 295호로 지정되었고, 2005년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가 설립되고 2013년 국립나주박물관이 개관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신촌리 금동관에 대해 두 가지 논란이 있다. 하나는 백제가 만들어 나주지역 수장에게 하사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나주의 마한 세력이 독자적으로 만들어 사용했다는 것이다.

2011KBS 역사스페셜은 금동관, 백제통치의 비밀을 풀다라는 제목의 프로그램에서 충청도와 호남지방에 모두 7개의 유사한 금동관이 발견되었는데, 백제왕실이 간접지배를 위해 지방 수장에게 내려준 것이라고 진단했다. 익산 입점리, 공주 수촌리, 서산 부장리, 고흥 길두리 등지에서 발견된 금동관은 대체로 4세기말에서 5세기 중엽에 제작된 것으로, 이 시기는 한성백제기다. 백제가 서울 송파에 수도를 두었을 충청도와 전라도 일대의 지방세력에게 고도로 정밀한 금동관을 제작해 하사하고, 복속관계를 맺었다는 것이다. 금속 세공의 기술적 차이도 거론된다. 금동관들은 아주 정밀하게 세공되었는데, 지방에서 이런 가공기술이 없었을 것이고, 백제 수도에서 만들어 보냈을 것이란 해석이 나왔다.

 

하지만 이 논리는 반론에 부딛쳤다. 전남대 임영진 교수는 고대에 지배자가 지역수장에게 칼()을 내려준 경우는 있어도 왕관을 하사한 경우는 없다고 주장했다. 임영진은 따라서 신촌리 금동관은 나주지역에서 자체 제작한 가능성에 무게를 두었다.

또 백제 하사설은 서기 369년에 백제가 마한을 병합했다는 이병도 박사의 설을 전제로 했다. 이 주장을 토대로 4세기 말에 백제가 병합지역 수장에게 금동관을 주어 지배관계를 확고히 했다는 것이다.

최근 연구에서 마한의 존속기간이 6세기초로 연장되면서 멀쩡한 독립세력에게 백제가 위세품을 하사했을 것이란 종전의 견해가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다. 백제보다 거대한 고분을 만든 나주 세력이 금은 세공에서도 상당한 실력을 갖췄을 것이란 주장이다.

고고학자들은 백제지역의 금동관과 마한지역의 금동관 사이에 문양이 다른 점을 주목한다. 전남문화재연구소의 이범기는 마한지역의 수촌리와 임점리 등의 금동관은 수촌리로 대표되는 백제지역 괌동관과 행태와 제작방식에서 분명한 차이를 보여준다고 했다. 임영진 교수에 따르면, 마한 금동관의 장식문양은 복합나선문으로, 백제 금동관의 초화문과 계통적으로 다르다고 했다.

 

에다후나야마 고분의 금동관 /위키피디아(일본판)
에다후나야마 고분의 금동관 /위키피디아(일본판)

 

20204월여 전남 영암 내동리 고분에서도 금동관이 출토되었는데, 신촌리 9호분 금동관의 문양과 매후 흡사하다. 따라서 마한 금동관은 백제의 금동관과 다르고, 독자성에 무게가 실린다. 전남·광주 지역의 금동관은 백제가 하사한 것이 아니라, 마한세력이 독자적으로 만들어 썼다는 견해가 설득력을 얻어가는 추세다.

백제 하사품이든, 자체제작이든, 신촌리 금동관은 9호분 고분에 묻힌 나주 일대 최고권력자의 것이다. 그는 대단히 높은 신분을 가졌을 것이고, 그 위세가 일본에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일본 큐슈의 에다후나야마 고분에서 발견된 금동관은 신촌리 금동관과 유사하다. 나주의 마한 세력이 큐슈 일대에도 진출했음을 반증한다.

 

자료=이범기 논문 캡쳐
자료=이범기 논문 캡쳐

 


<참고한 자료>

우리가 몰랐던 마한, 임영진, 2021, 홀리데이북스

고분 출토 金銅冠飾履로 살펴본 馬韓·百濟·日本과의 비교 검토, 이범기, 2018

위키피디아, 江田船山古墳 

KBS 역사스페셜 금동관, 백제통치의 비밀을 풀다 (2011.5.19.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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