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한⑧…유리구슬로 대양을 꿰다
마한⑧…유리구슬로 대양을 꿰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3.11.17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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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슬, 금은보다 귀하게 여겨…인도·동남아에서 중국 남부 거쳐 일본까지 네트워크 형성

 

서기 3세기 중국의 사가 진수는 삼국지위서 한조에 이렇게 썼다.

한인(韓人)은 구슬을 보배로 삼아 옷을 꿰어 장식하고 혹은 목에 걸고 귀에 달았지만 금비단은 진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以瓔珠爲財寶 或以綴衣爲飾 或以懸頸垂耳 不以金銀繡爲珍)

진수는 같은 책에 부여 사람들은 금과 은으로 장식한 모자를 썼고, 고구려인도 비단옷에 금과 은으로 장식했다고 했다. 북방 기마민족 계열인 부여와 고구려인들은 금과 은을 좋아했는데, 한반도 남부에 거주한 삼한의 사람들은 금과 은, 비단은 귀하게 여기지 않고 구슬을 보물로 삼았다는 것이다.

이 내용은 후한서 동이열전에서도 不貴金寶錦罽唯重瓔珠綴衣爲飾 及縣頸垂耳”, 진서(晉書) 사이전(四夷傳) 마한조에도 俗不重金銀錦罽, 而貴瓔珠, 用以綴衣或飾髮垂耳라고 나온다. 중국 사서에 나오는 앵주(瓔珠)는 통상 구슬을 말한다. 구술은 재질에 따라 석영을 녹여 만든 유리, 마노·수정·경옥(비취)등 자연산 보석 등으로 구분된다.

 

영산강 유역 구슬 출토유적지 /김미령 논문
영산강 유역 구슬 출토유적지 /김미령 논문

 

놀랍게도 마한지역 고분을 파헤치면 구슬이 쏟아진다. 1,700년 전에 쓰여진 고문헌의 내용과 현대의 고고학적 발굴이 일치한다. 권오영 교수(서울대)의 연구에 따르면, 고구려 고분 부장품에서 영주, 즉 구슬류의 부장 빈도는 매우 낮은데 비해, 백제, 가야, 신라의 고분 부장품에서 구슬류가 다량으로 묻혀 있는 경우가 흔하다.

특히 마한의 옛땅이었던 한반도 서남부 지역 고분에서는 구슬이 어머어마한 수량으로 쏟아지고 있다. 오산 수청동유적에서는 무려 75,000여 점의 구슬이 무더기로 나왔다. 전남 고창 봉덕리 1호분에서는 400여점의 구슬이 나왔고, 전남 영광 학정리고분 3기의 석실에서는 1,000점의 구슬이 출토되었다. 전남지방에서 나오는 막대한 구슬의 대부분은 유리구슬이다. 유리구슬은 영산강 유역 뿐 아니라, 김해 양동, 창원 다호리, 대구 팔달동, 경산 임당 등 영남지방에서도 발굴되어 한반도 전역에서 유통되었음을 보여준다.

고분발굴자나 고고학자은 그동안 구슬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구슬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기도 하거니와 너무 많이 출토되어 희소성이 줄어 일괄로 처리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고고학계에서는 금동관과 검 등의 위세품에 관심이 집중되었고, 구슬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화학적 성분에 관한 지식이 향상되고 구슬에 대한 각국의 연구가 교류되면서 다양한 접근이 이뤄지는 추세에 있다.

 

영산강 유역 분구묘 출토 구슬 /김미령 논문
영산강 유역 분구묘 출토 구슬 /김미령 논문

 

구슬은 고대에 인도, 동남아시아, 중국남부, 한반도, 일본에서 교환된 위세품이었다. 국가 또는 부족의 수장은 구슬이라는 상징을 통해 공동체 구성원에게 권위와 지위를 과시했다. 구슬은 귀한 보석이었기 때문에 자체 생산하기 어려울 경우 외국에서 수입했다. 수입은 교역이란 상거래 행위와 조공이라는 국가간 행위에 의해 이뤄진다. 구슬도 이런 과정을 거쳐 지역을 뛰어넘어 교환되었고, 구슬의 이동이 고대에 동아시아 네트워크를 형성했다는 사실이 최신 연구에 의해 드러나고 있다. <끝>

한국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유리구슬은 납-바륨 유리다. 공주 봉안리와 부여 합송리 유적에서 푸른색 유리 대롱구슬이 발견되었고, 비슷한 유물이 중서부, 서남부에서 발굴되었다.

-바륨 유리는 중국 남부 양쯔강 중류에서도 널리 사용되던 것이다. 박준영 교수(서울대)에 따르면, -바륨 유리는 중국에서 제작된 완제품을 한반도로 수입한 후에 그대로 사용했거나, 혹은 다양한 방식으로 재가공했을 것으로 보인다. 고대 한반도에서 가장 흔히 발견되는 환옥은 늘인기법으로 제작되었다. 이 기법은 유리덩어리에 열을 가해 녹이고, 관 형태로 길게 늘인 후에 원하는 크기로 자르는 방식이다. 잘린 유리구슬은 끝단이 날카로우므로 다시 가열해 둥그런 구슬로 만들어진다. 마한-백제 권역에서는 거푸집이 많이 발견되는데, 대부분 흙으로 만들어졌다. 거푸집의 존재는 한반도에서 2차 생산(재가공)이 이뤄졌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 다음 시기에 제작된 구슬이 포타시 유리다. 이 유리는 중국 남부지방과 베트남 북부에서 많이 생산된다. 우리나라에서는 김해 지역에서 발견된다. 포타시 유리도 우리나라에서는 생산되지 않고, 남인도, 스리랑카, 베트남의 옥에오 등지에서 생산됐고, 한반도에서는 가공만 이뤄졌을 가능성이 크다.

3세기 이후에는 색상이 다양한 소다유리 구슬이 만들어졌다. 이 유리는 중국 남북조 시대의 동오와 동남아 권역에서 발견되며, 동오와 교류를 했던 마한 지역에서 대량으로 출토된다.

6세기 이전까지 한반도에서 만들어진 유리구슬의 원재료는 외부에서 제작되어, 국내에서 일부 가공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에서 발굴되는 고대 구슬은 동남아, 중국남부에서 만들어져 교역, 조공 등을 통해 한반도로 건너온 것으로 관측된다.

 

광주 선암동유적 출토 유리거푸집 /박준영 논문
광주 선암동유적 출토 유리거푸집 /박준영 논문

 

구슬을 위세품으로 사용하는 지역은 대체로 바다로 연결된다. 육지로 문화교류를 이룬 한반도 북부와 만주 지역에선 구슬이 드물게 나오는 반면에 한반도 남부 해안지역에서는 무덤 속에서 많은 구슬 부장품이 나온다. 해안을 통해 동남아와 일본이 연결되었음을 반증한다. 권오영은 서로 멀리 떨어진 정치체 사이에서 구슬에 대한 사고를 공유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라며, “한반도에서는 바다를 통해 호남과 영남의 해안가에 위치한 정치체 사이에 유사한 인식이 생겼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바다를 건너 큐슈지역에서도 구슬이 나오는데, 일본열도 내에서 가장 많다.

구슬 네트워크는 옹관 네트워크와도 오버래핑한다. 영산강 유역권은 항아리에 시신을 담는 옹관고분이라는 독특한 매장문화를 가지고 있는데 옹관묘 매장관습은 남중국해 연안에서도 유행했다. 베트남 중부 사휜집단은 신석기 이래 옹관을 묘제로 사용했다. 사휜(Sa Huynh)의 옹관 문화는 후에 참파 토착문화로 이어졌고, 태국, 캄보디아,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으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전남대 허진아 교수는 해상실크로드로 연결된 환황해 네트워크 문화권에서 옹관묘 매장이 성행했다면서 동남아시아 구슬 해상교역은 BC 500년경부터 남중국해를 중심으로 활성화되기 시작했으며 BC 206년 한() 왕조가 등장한 이후에는 동서양을 연결하는 광역교류망으로까지 발전했다고 설명했다.

포타시 유리의 전파는 한 무제와의 관련성이 제기된다. 한무제는 베트남(남월)을 멸망시키고 그곳에 9개 군(영남9)을 설치하고, 고조선을 멸하고 한사군을 두었다. 한무제 때 조공체제개 형성되면서 베트남과 한반도 사이에 유리구슬이 이동했을 가능성이 대두된다.

3세기 이후 소다유리는 베트남 남부 옥에오, 또는 말레이반도의 랑카수카(狼牙脩 )를 거쳐 수입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의 남조가 동남아 일대와 교역을 하고, 백제와 마한이 남조와 교류를 했으므로, 그 사이에 유리구슬이 오갔다는 것이다.

넓게 보면 동남아시아와 동북아시아에 소재하는 정치체와 국가끼리 구슬의 애용, 옹관묘, 쌀농사 등을 공유하는 공통 권역을 설정할 수 있다. 종족과 국가를 넘어서서 구슬로 묶을 수 있는 광역의 권역인 셈이다.

구슬은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다. 한반도 남부, 특히 마한지역에서 쏟아지는 구슬도 그 연결고리를 찾는 과정에서 동남아시아에 거대한 네트워크가 드러나고 있다. 연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마한이 해상왕국이었으며, 구슬을 교역하면서 인도에서 일본까지 바다 네트워크를 연결한 것이다.

 

BC 200년부터 BC 500년까지 해상실크로드와 육상실크로드. /자오춘관 논문
BC 200년부터 BC 500년까지 해상실크로드와 육상실크로드. /자오춘관 논문

 


<참고한 자료>

아시아의 옥문화, 나주박물관, 2021 

목포MBC, 해상강국 마한, 구슬로 세계를 잇다, 2022. 6. 8. 

JTV 특집다큐 2부작, 위대한 이야기 마한, 유리의 왕국 2, 2022. 10. 24. 

狼牙脩國海南諸國의 세계, 권오영, 2013, 백제학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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