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한⑦…1,500년전 금동신발에서 나온 파리
마한⑦…1,500년전 금동신발에서 나온 파리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3.11.13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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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암리 금동신발, 백제의 하사품 추정…나주지역 견제 위해 세력별 사여

 

1,500년전의 어느날, 전남 나주 다시면 복암리 일대를 통치하던 마한의 수장 부인이 죽었다. 저승길을 갈 때 신도록 특별히 제작된 금동신발이 시신의 발목에 신겨졌다. 그 순간 파리 한 마리가 날아들어 신발 속으로 들어갔다. 곧이어 시신은 관에 넣어졌다. 관은 장례를 치를 때까지 닷새 이상 외부에 보관되었다. 금동신발에 들어간 파리는 신발 속에 알을 낳았다. 엄동(嚴冬)의 계절이 아니었으므로, 그 알은 유충(구더기) 과정을 거쳐 번데기가 되었다. 곧이어 장례식을 치르고, 금동신발 속의 파리 번데기도 땅 속에서 뭍혔다. 그 번데기가 1,500년의 세월을 인고한 끝에 세상의 빛을 만났다. 지금 나주 복암리 인근에서 서식하는 검정빰금파리와 같은 종자였다.

 

정촌고분 속 피장자 유골의 발뼈에 붙은 파리 번데기 껍질 /문화재청
정촌고분 속 피장자 유골의 발뼈에 붙은 파리 번데기 껍질 /문화재청

 

2014년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는 나주 복암리 정촌고분을 발굴하던 중에 1호 석실에서 금동신발을 발굴했다. 연구소는 금동신발 내부의 흙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무덤 주인의 발뒤꿈치 뼛조각과 함께 파리 번데기의 껍데기 십여 개를 발견했다. 연구진들은 법의곤충학적 분석을 동원해 곤충 잔해의 속성을 추적했다.

연구진들은 정촌고분 1호 석실과 같은 조건(빛 차단, 평균 온도 16, 습도 90%)에서 파리의 알, 구더기, 번데기가 어떤 상태일 때 성충이 되는지를 실험했다. 그 결과, 번데기 상태일 때만 성충이 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통상 알에서 번데기가 되기까지 평균 6.5일이 걸리는 점을 고려할 때 정촌고분 1호 돌방의 주인공은 무덤 밖에서 일정기간 장례 절차를 거친 후에 무덤 안으로 들어갔다는 분석이 나왔다. 아울러 시신을 무덤 외부에 두고 장례를 치르는 ’()이라는 장례 절차를 시행했을 것이란 추론도 내놨다.

연구소는 파리 번데기 껍질이 검정뺨금파리(Chrysomyia megacephala)’의 것으로 추정했다. 이 파리는 현재 정촌고분 주변에서도 서식하고 있으므로 1,500년 사이에 기후 변화가 그다지 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활동기간은 5~11(9월경에 가장 활발히 번식)로 정촌고분 1호 돌방의 주인공도 이 기간에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나주 정촌고분 금동신발(보물) /문화재청
나주 정촌고분 금동신발(보물) /문화재청

 

금동신발이 발견된 정촌고분 1호 석실은 현재까지 확인된 영산강유역 석실중 가장 큰 석실이다. 신발의 주인이 이 일대의 대단한 세력가임을 암시한다.

우리나라에선 삼국시대 금동신발이 여러지역에서 발굴되었다. 1917~1918년 나주 반남면 신촌리 9호고분에서도 금동신발이 발굴되었고, 1921년 경주 금관총에서도 금동신발이 출토되었다. 무녕왕릉에서도 금동신발이 나왔고, 그후 2003년 공주 수촌리 고분에서 3점이 발굴된 데 이어, 서산 부장리에서 2, 고흥 길두리와 고창 봉덕리에서 각각 1점씩 발굴되다. 이어 세종 나성리, 화성 요리, 나주 정촌고분 등에서도 금동신발이 발굴되었다.

금동신발은 한국 전역에서 발굴되지만 중국에선 찾아볼수 없고, 일본에서는 출토된다.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말을 탄 무사가 밑창에 못이 박힌 신발을 신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한국에서 삼국시대 고분에서 40여점이 출토되며, 그중 백제지역에서만 20여점이 확인되었다.

 

금동신발은 금동관과 함께 발굴되기도 하지만 금동관이 없이 신발만 나오는 경우도 있다. 정촌리 고분은 금동관이 발굴되지 않은채 금동신발만 나와 피장자가 여성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었다. 나주문화재연구소의 오동선 학예연구사는 금동신발이 나온 목관에서 두개골이 나왔는데, 인골은 40대 여성의 뼈로 키가 146cm일 것으로 추정했다. 그는 “6세기를 전후한 시점에 영산강 유역 사회는 여성 지위가 지역 수장급에 해당할 정도로 높았다고 말했다.

나주문화재연구소는 이런 추론을 전제로 정촌고분 금동신발의 주인공을 복원해 공개했다.

 

나주 정촌고분 금동신발의 주인공 복원도 /나주문화재연구소
나주 정촌고분 금동신발의 주인공 복원도 /나주문화재연구소

 

금동신발은 실생활에 사용되지 않는 물건이다. 금동관은 살아 있을 때 사용하다가 죽어 함께 주인의 무덤에 뭍는 부장품이지만, 금동신발은 죽은 사람에게만 신기는 장례용품이다. 신발 크기는 일반신발보다 월등하게 크고, 밑창에 수십개의 못이 박혀 있을 뿐 아니라 약하다. 실젤 사용할수 없고, 저승길로 제작된 것이다. 저승길이 험난하므로 못을 박았다는 것이다.

임영진 전남대 명예교수는 도교와의 관련성을 제기했다. 그는 지배세력이 도교에서 추구한 신선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특별한 신발이 필요했을 것이라고 추론했다. 그렇다면 마한에 도교가 파급되었을까. 금동신발이 유행한 4~6세기에 백제에는 도교가 들어왔지만 마한에는 도교가 들어오지 않았다. 마한지역에서 발굴되는 금동신발은 백제가 마한 수장이 죽었을 때 내리는 하사품으로 여겨진다. 임영진은 신촌리와 복암리의 금동신발은 벡제가 만든 것이며, 복암리 금동신발 주인은 마한수장에게 시집온 백제 귀족 출신 여성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나주 반남면 신촌리와 다시면 복암리는 영산강을 사이에 두고 남과 북에 위치하고 있다. 마한이 고대국가로 성장하지 못한채 부족국가로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나주 일대에서는 반남세력과 다시세력이 서로 견제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백제가 다시면 복암리 새력과 혼인을 통해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고, 530년경 백제가 광주·전남지역을 병합한 다음 반남면 세력을 제압함으로써 이 지역을 관리했을 보인다.

공주대 이훈은 다른 견해를 제시했다. 복암리 세력이 영산강유역에서 여타 집단보다 빨리 세력화에 성공해 이 지역의 새로운 유력집단으로 성장했다. 이에 백제는 현지 세력 사이의 견제를 도모하고 복암리 세력의 과도한 성장을 막고자 반남면 신촌리세력에 금동관과 금동신발과 같은 최상위 위세품을 사여했다는 것이다.

백제의 사여품에 대해 마한 사람들은 반기지만은 않았다. 2006년 고흥 길두리 안동고분에서 금동신발과 금동상투관이 동시에 출토되었는데 상투관은 피장자의 머리쪽이 아니라 발쪽에 있었다. 이 금동관은 백제가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데, 고흥의 지배자가 백제와의 관계를 탐탁지 않게 여겼기 때문에 상투관을 발치에 부장했다는 게 고고학자들의 추론이다.

마한지역에서 출토되는 금동신발에서 1,500년전 사람들의 많은 사연을 전해주고 있다.

 


<참고한 자료>

금동신발로 본 복암리 세력과 주변지역의 동향, 이훈(공주대), 2015, 호남사학회

나주 복암리 정촌고분 출토 금동신발의 제작기술과 복원, 이현상·이혜연·오동선·강민정, 2018, 국립문화재연구원

우리가 몰랐던 마한, 임영진, 2021, 홀리데이북스

문화재청, 신선되어 하늘나르샤 우리가 몰랐던 마한, 임영진, 2021, 홀리데이북스

문화재청, 1,500년 전, 금동신발과 함께 묻힌 파리에는 어떤 비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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