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천국의 난③…내우외환에 휩싸인 청조
태평천국의 난③…내우외환에 휩싸인 청조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1.06.30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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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 암투로 농민군 분열…영국-프랑스 연합군 베이징 점령

 

스스로 하느님의 아들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동생이라는 태평국의 지도자 홍슈취안은 기독교 경험이 없는 중국인 다중을 속일수 있었지만, 서양인들은 속이지 못했다. 홍슈취안의 초청으로 난징을 방문한 미국인 로버츠(Issachar Jacox Roberts)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하느님의 입장에서 홍슈취안의 종교적 관점을 본다면 혐오스러운 것이다. 종교문제에 관한한 그는 미쳤다.”

남녀 평등은 좋은데, 남자신도와 여자신도를 분리해 생활하게 했다. 부부도 떨어져 살게 했다. 홍슈취안은 난징의 천조궁전에 쳐박혀 교리를 선포했다. 그의 주변엔 수많은 여자들이 보필.했다. 그는 신처럼 행동했다. 이 사기행각을 일찌감치 간파한 사람이 동왕 양수칭(楊秀清)이었다.

양수칭은 야심만만한 사나이였다. 그는 처음부터 천왕이 신의 아들이란 주장이 거짓임을 알고 있었다. 그는 1850년 태평국 봉기가 시작되자 훙슈취안에게 신의 은총이 자신에게 내렸다고 주장했다. 홍슈취안은 그의 폭로가 두려워 그에게 높은 자리를 주었다. 양수칭은 정군사(正軍師)가 되어 태평군에서는 총사령관과 내정에서는 총리 역할을 하게 되었다.

동왕은 늘 천왕 옆을 지켰다. 모든 신하들이 천왕 앞에 무릎을 꿇는데 그만 홀로 무장한 채 서 있었다. 동왕은 경쟁자인 북왕 웨이창후(韋昌輝)와 익왕 스따카이(石達開)를 지방으로 파견시키고 궁궐을 장악했다.

 

난징의 태평국 궁전 모형도 /위키피디아
난징의 태평국 궁전 모형도 /위키피디아

 

동왕의 기세는 날로 높아갔다. 그는 하느님의 말씀이 있었다면서 홍슈취안을 꾸짖기도 했다. 1856년 양수칭은 정부군 주력부대인 강남대영(江南大營)과 싸워 대승을 거뒀다. 양수칭은 이 전과에 고무되어 홍슈취안을 폐위시키고 자신이 천왕에 오를 시기가 왔다고 판단했다.

홍슈취안은 양수칭의 역모를 간파하고 있었다. 천왕은 북왕과 익왕에게 밀서를 보내 동왕을 제거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북왕 웨이창후는 양수칭에 의해 쫓겨났다는 분노에다 이 기회에 권력 중앙에 진입할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익왕보다 먼저 군대를 이끌고 난징에 진입했다.

북왕은 동왕의 진지를 기습공격해 동왕을 살했다. 북왕의 친위쿠데타는 여기서 그쳐야 했다. 하지만 그는 동왕의 추종자 2만여명을 집단학살했다. 뒤늦게 수도에 들어온 익왕은 북왕의 살육이 지나쳤다고 비판했다. 홍슈취안은 여론을 살펴야 했다. 천왕은 자신에게 반역한 동왕을 제거하는 건 마땅하지만 그 부하를 몰살한 것은 잘못이라는 익왕의 주장을 지지했다. 홍슈취안은 이번에 익왕 사따카이에게 북왕을 제거하라고 지시했다.

익왕은 북왕을 처단했다. 이제 군권을 쥔 것은 익왕 스따카이였다. 홍슈취안은 부하들을 이간시켜 하나씩 제거했지만 마지막에 익왕에게 힘이 쏠린 것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스따카이는 순수한 사람이었다. 그는 천왕에 충성을 다했지만 천왕은 그를 믿지 않았다.

이듬해인 1857년 스따까이는 자신의 충성을 보여주는 시 한수를 남기고 부하들과 함께 태평국을 떠났다. 그를 따라간 수가 수만명이 되었다고 한다. 스따카이는 태평국을 떠난 후에도 홍슈취안과 연락하며 필요할 때 병력을 지원하기도 했다. 그는 별도부대를 이끌고 청조와 전투를 벌였으며, 그의 군대는 7년간 여러 성을 전전하다가 쓰촨성에서 정부 토벌대에 의해 1863년 최후를 마쳤다.

 

쓰촨성 청두의 스따카이 묘비 /위키피디아
쓰촨성 청두의 스따카이 묘비 /위키피디아

 

1856년 태평국 내분은 내부의 결집력을 크게 약화시켰다. 상당수의 신도들이 태평국을 떠나가려 했는데, 청조는 여기서 이간질을 하지 못했다. 청조는 태평군의 투항자를 처형하라고 명령을 내리는 바람에 태평군 병사들은 떠나고 싶어도 떠나지 못했다.

홍슈취안은 무능력한 형제들을 등용하고 최초의 포섭자인 사촌동생 홍런깐((洪仁玕)을 간왕(干王) 겸 섭정자로 임명했다. 결국 홍슈취안도 혈족에 의지해 권력을 유지한 것이다. 지리멸렬의 위기에 빠진 태평군을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리슈청(李秀成)이었다. 그는 천재적인 전략가로 충왕(忠王)에 임명되어 태평군을 재건했다.

 

태평국이 내분에 휩싸여 있을 때, 청조가 농민반란군을 완전히 진압하지 못한 것은 같은 시기에 일어난 제2차 아편전쟁 때문이었다. 일명 애로전쟁’(Arrow War)으로 불리는 이 사건으로 청나라는 내우외환에 직면하게 되었다.

1차 아편전쟁(1840~1842)에서 청나라가 영국에 패한 이후 두 나라의 긴장관계가 악화되었다. 1856108일 중국 남쪽 광저우(廣州) 해상에 정박하고 있는 애로(Arrow)호에 중국 관원들이 해적을 소탕한다는 이유로 급습해 선원 12명을 체포하고 영국 국기를 내릴 것을 요구했다.

애로호의 소유주는 중국인이고 선장은 영국인, 승무원은 모두 중국인이었다. 원래 이 배는 중국 선적이었으나 홍콩 섬이 영국 조차지가 된 이후 선적지를 홍콩으로 바꿔 영국기를 게양하고 있었다. 이 선박은 926일로 홍콩 등록이 만료가 된 상태였다.

영국은 선박이 등록기간에 출항한 선박은 돌아온 날을 만료일로 한다고 국제법에도 없는 억지를 부리며, 선원들을 석방하라고 요구했다. 영국은 신성한 영국기를 찢었다는 구실로 광저우를 포격하며 전쟁을 시작했다. 프랑스도 자국 카톨릭 신부 오귀스트 샤프들렌(Auguste Chapdelaine)이 한해 전에 살해된 사건을 구실로 참전했다. 이 전쟁은 1차 아편전쟁의 연장이라는 의미에서 2차 아편전쟁이라고 한다.

영불 연합군은 56천명의 병력으로 광저우를 공격해 중국의 양광총독 예밍천(葉名琛)을 체포해 영국령 인도 캘커타로 압송했다. (그는 1859년 그곳에서 병사했다.) 영불 연합군은 광저우에 괴뢰정부를 수립한 후 20여척의 전함을 이끌고 18584월에 베이징의 코앞인 다구(大沽)과 텐진(天津}을 점령했다.

서양 군대가 칼을 목에 대고 협박하는 바람에 청의 함풍제는 협상에 나서 그해 6월 텐진조약(天津條約)을 체결했다. 텐진조약에는 각국 공사가 베이징에 주재하고, 난징 등 10개 항구를 개방하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러시아는 이때 영국과 프랑스의 무력개입을 중재해 준다는 명분으로 외싱안링 산맥 이남에서 아무르강 이북의 땅을 러시아에 넘겨주고, 우수리강 동쪽(연해주)를 공동관리로 둔다는 내용의 아이훈 조약(璦琿條約)을 체결했다.

 

예밍천의 체포 /위키피디아
예밍천의 체포 /위키피디아

 

함풍제는 뒤늦게 텐진조약이 치욕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중국 역사에 한번도 외국사절을 수도에 주재하게 한 경우가 없었다. 청의 황제는 서양세력과 전투를 벌여서라도 잘못된 조약을 철회할 것을 다짐했다.

영국은 홍콩섬 건너편 구룡(九龍)반도의 중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홍콩섬만으로는 독자적인 도시기능을 할수 없고, 군사적 판단은 물론 상업, 위생, 치안 등을 위해서도 반도를 임대 또는 소유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영국과 청국은 서로 다시 전쟁을 벌일 시비거리를 찾았다. 18596월 영불 연합군은 텐진조약 비준서를 교환한다는 구실로 영국 사절단은 전함과 병사를 이끌고 다구 앞바다에 도착했다. 중국 내에서도 반영 분위기가 일어나 베이징 북부를 흐르는 바이허(白河) 하구에 외국배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쇠사슬을 쳐놓았다. 영국 공병대가 쇠사슬을 끊으려 작업을 하던 도중에 청군이 포격을 가해 영국 전함 4척이 침몰하고 434명의 사상자가 났다.

전쟁이 재개되었다. 영불 연합군은 18602만명의 병력을 파견해 베이징을 향하던 도중에 협상이 열렸다. 영국측 협상대표 해리 파크스(Harry Parkes)는 청측 협상대표 이친왕(怡親王)을 안하무인 격으로 대했고, 이에 분노한 이친왕은 파크스를 비롯해 영국인 26명과 프랑스인 13명을 체포했다. 청측의 강경조치에 영불 연합군은 베이징을 점령하고 청 황실의 여름 궁전인 원명원(圓明園)을 불태우고 많은 보물과 집기들을 약탈했다.

함풍제에게 아들을 낳아준 황후는 후에 서태후가 되는 자희황후였다. 자희황후는 원명원이 불탄 것을 몹시 안타까워 했다.

 

파괴된 원명원 서양루의 잔해 /위키피디아
파괴된 원명원 서양루의 잔해 /위키피디아

 

함풍제는 여름 수도 열하(熱河)로 도피했다. 영국군은 차제에 청조를 멸망시키고 한족 정권을 수립하는 레짐 체인지(Regime Change)를 구상했다. 수도가 점령당하고, 서양인에 의해 한족괴뢰정권이 수립된다면 청조는 끝장나게 된다. 청조는 태평천국보더 더 큰 서양의 적을 만난 것이다.

황실이 경각에 달린 시점에 함풍제는 공친왕(恭親王)을 앞세워 협상에 나섰고, 영국과 프랑스는 베이징 조약(北京條約)을 체결했다. 영국은 이 조약으로 구룡반도를 차지했다. 더 큰 도둑은 러시아였다. 러시아 대사 니콜라이 이그나티예프 (Nicolai Ignatiev)는 영국과 프랑스의 군사개입을 막아준다는 명분으로 연해주를 먹어버렸다.

2차 아편전쟁을 통해 이권을 차지한 서양 국가들은 더 이상 태평천국에 대한 관심을 잃었다. 청과 체결한 베이징 조약을 유지하는 것이 더 유리했다. 서양 국가들은 청과의 전쟁을 끝내고 태평국 괴멸에 힘을 보태게 되었다.

 


<참고자료>

Wikipedia, Taiping Rebellion

Wikipedia, Taiping Heavenly Kingdom

Wikipedia, Shi Dakai

Wikipedia, Second Opium War

임계순, 淸史-만주족이 통치한 중국, 도서출판 신서원, 2000

이매뉴얼 C.Y. , -현대 중국사(상권), 까치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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