윈난 회족 반란, 영국-터키에 구원 요청했으나…
윈난 회족 반란, 영국-터키에 구원 요청했으나…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1.07.04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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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원슈, 평남국 수립…한족-회족 화해 유도, 청조 공격으로 멸망

 

청나라가 말기에 태평천국과 염군의 난으로 곤경에 빠져 있을 때, 서남부 윈난성(雲南省)에선 회족(回族)이 반란을 일으켰다. 윈난 회족의 반란은 종족 갈등에서 비롯되었지만, 청조타도라는 점에서 태평천국과 염군의 난과 일치했다. 반란지가 중앙에서 멀었고, 수도에까지 영향을 미치지 않았지만 다른 두 개의 반란보다 오래 지속되었다.

윈난 회족 반란(1856~1873)은 중국에선 운난회변(雲南回變) 또는 두문수기의(杜秀起義)라 표현하는데 비해 영국에서는 판사이 반란(Panthay Rebellion)이라고 했다. 판사이는 버마(미얀마)어로 회교도를 지칭하는 빠티(Pa-ti)라는 말에서 와전된 표현이다. 윈난은 버마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윈난 반란 지도자들이 영국령 버마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서양에서도 이 반란이 잘 알려져 있다.

 

윈난성 위치 /위키피디아
윈난성 위치 /위키피디아

 

윈난 회족 반란은 회족이 이슬람, 즉 회교(回敎) 신도라는 점에서 종교적 갈등으로 포장되고 있지만, 반란의 동기는 종족간 갈등에서 비롯되었다.

윈난성은 중국 소수민족 55개 가운데 20여개 이상의 민족이 공존하는 인종백화점과 같은 지역이다. 윈난성 회족은 원()나라 지배 시절에 서역(신장)에서 이주해온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데, 당시 윈난 인구의 20~30%를 차지하고 있었다.

청조는 윈난성에 만주족 관리를 파견해 소수민족을 통치했는데, 숫적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한족을 소수민족보다 우위에 두었다. 회족과 한족 사이에 분쟁이 생기면 만주족 관리는 관행적으로 한족의 손을 들어주었다.

 

회족 반란의 기 /위키피디아
회족 반란의 기 /위키피디아

 

1845년 윈난성에서 한족과 회족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다. 아이들 싸움에서 어른 싸움으로 번진 종족 분쟁이었는데, 만주족 관리들은 한족 편을 들었다. 한족 조직폭력배들은 회족 마을 수십곳을 파괴하고 수천명을 살상했다. 이때 두원슈(杜文秀)도 가족과 약혼녀를 잃었다.

두원슈는 이듬해인 1846년 회족 대표들를 이끌고 베이징에 올라가 회족의 억울함을 호소했다. 청조는 한족 주모자들을 체포하는 것으로 사건을 종결지었다. 회족은 수천명이 집단살해되었지만 한족은 몇 명의 처벌로 사태가 끝나버린 것이다. 두원슈와 회족들은 이 원한을 잊지 않고 있었다.

두원슈(1823~1872)는 윈난성 영창부(永昌府) 보산현(保山縣) 회민 상인 집안 출신으로, 과거에 응시 16세에 생원이 되었으며, 수재에 합격했다. 그는 관리로 입신양명하려 했지만 도중에 회족 집단살해라는 소용돌이에 빠지게 되었다.

 

윈난 다리의 총통병마대원수부 /위키피디아
윈난 다리의 총통병마대원수부 /위키피디아

 

회족 대학살이 있은지 11년 되던 1856년 쿤밍(昆明)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은광에서 또다시 한족과 회족 사이에 갈등이 터져 나왔다. 그 은광은 회족이 운영하고 있었는데, 한족 상인이 무력을 동원해 은광을 빼앗자 회족과 한족 사이에 전면전이 벌어졌다. 이번에도 만주족 출신의 윈난성 순무는 한족 편을 들었다. 순무는 회족을 3일동안 찾아내 몰살하라는 일방적인 명령을 내렸다. 이때 회족 4,000명이 학살되었다.

두원슈는 마침내 거병했다. 그는 윈난성 서부에서 회족을 조직해 순식간에 다리(大理)를 점령하고 53개 마을을 차지했다. 만주족 순무는 반란군을 제압하지 못하자 자결했다.

두원슈는 반란자들에 의해 지도자로 선출되어 총통병마대원수((總統兵馬大元帥)가 되었다. 그는 차이파춘(蔡發春)을 대도독(大都督), 마진바오(馬金保)를 대장군, 리궈룬(李國綸)을 대사공(大司空)으로 임명했다. 아울러 리원쉐(李文學)이 이끄는 이족(彝族) 봉기군과도 제휴했다.

 

두원슈는 한족을 적으로 규정하지 않고 만주족만 고립시키는 전략을 채택했다. 한족과 회족 간의 갈등이 만주족이 윈난 통치 만든 인위적 구조임을 간파한 것이다. 두원슈는 이런 전략 하에 만청(滿清) 타도의 기치를 내걸었다. 봉기군의 기본강령은 만주족을 없애고(鋤滿), 한인을 위무하고(拊漢), 간적을 제거한다(除奸)”는 것이었다.

그는 이슬람교도의 지지를 얻기 위해 회교지도자 마루롱(馬如龍)에게 제휴의 손길을 내밀었으나 마화롱은 두웬슈를 지지하지 않고 청조에 투항했다.

 

윈난 회족반란(그림) /위키피디아
윈난 회족반란(그림) /위키피디아

 

두원슈는 다리를 수도로 평남국(平南国)을 수립하고, 대외적으로 자신을 이슬람의 수장을 의미하는 술탄 슐레이만(Sultan Suleiman)이라 칭했다.

두원슈는 무슬림지도자를 자처했지만, 평남국은 무슬림 국가가 아니었다. 청조에 반대하는 한족과 여러 소수민족이 신생 독립국에 합류했다. 두원슈는 한족과 회족의 화해를 추구했다. 두원슈는 한족과의 화해 차원에서 그는 이교도인 태평천국과의 협력을 제안하기도 했다.

1869~1868년 사이 8년간이 평남국의 전성기였다. 이 무렵 두원슈는 36만 군대를 거느리고 있었다. 윈난의 이슬람국가는 100개 마을을 통치하고 있었다.

두원슈는 이 기간에 이슬람의 성지 메카를 순례했는데, 도중에 버마의 랑군과 인도의 캘커타를 방문해 영국의 힘을 의식했다고 한다.

 

평남국은 1868년 이후 쇠락했다.

1867년 두원슈는 자신의 딸 펑양(鳳楊)과 사위 차이팅둥(蔡廷棟)에게 병력을 주어 쿤밍을 포위했지만 실패했다. 1869, 옛 마루룽 세력의 협력을 얻어 청조는 두원슈에 대한 반격을 시작했다. 청조는 윈난포정사(雲南布政使) 천위잉(岑毓英)을 앞세워 다리를 압박해 왔다.

두원슈는 영국에 구원을 요청했다. 영국 자료에 따르면, 두원슈의 양자인 하산(劉道衡)1872년에 사자의 신분으로 영국과 터키를 방문했다. 두원슈는 영국 빅토리아 여왕에게 보낸 서한에서 군대를 동원하여 대리 정권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영국 정부는 청조와 이미 베이징 조약을 체결한 상태여서 오히려 윈난 정권을 도와줄 경우 청과의 외교 훼손을 염려했다. 영국 정부는 두원슈의 요청을 거부했다.

무슬림의 종주국이었던 터키도 윈난 무슬림국의 지원요청에 도움을 줄수 없다고 완곡하게 거절했다.

 

두원슈의 밀사파견은 너무 늦었다. 사자가 외교활동을 벌일 때 청군은 1872년 평남국의 본거지 다리를 함락했다. 두원슈는 아편을 한 웅큼 입에 털어 넣고 자결했다. 청군은 그의 시신을 끌고가 참수하고, 머리를 베이징으로 가져갔다. 두원슈가 죽고 난 후에도 수천명의 회족이 청군에 의해 학살되었다.

두원슈 자결 뒤에도 반란은 2년이 더 지나서야 완전히 진압되었다. 회족의 반군은 18735월 완패하고 버마 국경을 넘어갔다. 그들은 버마 국경 건너편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재기를 노렸으나, 결과적으로 눌러 앉아 버렸다. 버마에는 이후 국공내전에서 피난간 회족이 합류해 집단을 이루고 잇다.

 


<참고자료>

Wikipedia, Panthay Rebellion

Wikipedia, Du Wenxiu

정면, “영웅과 매국노 사이-杜文秀를 둘러싼 기억 경쟁”, 동북아문화연구 제63(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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