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의 대숙청…스탈린, 공포정치로 반대파 제거
피의 대숙청…스탈린, 공포정치로 반대파 제거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1.04.09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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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70년⑦…집단체제에서 1인 독재로 전환, 비밀경찰 수장도 처형

 

스탈린은 두 번째 부인 나데즈다 알릴루예바(Nadezhda Alliluyeva)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러시아 혁명 15주년이 되던 1932118, 스탈린은 동지이자 정치국원인 클리멘트 보로실로프의 집에 부부 동반의 만찬초대를 받았다. 만찬에는 농담과 함께 혁명과업 수행에 관한 대화가 오갔다. 건배 제의가 여러차례 오가고, 스탈린은 만취했다. 부인 나데즈다는 술을 한모금도 마시지 않았다. 스탈린은 부인에게 왜 술을 마시지 않느냐고 핀잔을 하며 오렌지껍질과 담배꽁초, 빵조각등을 던졌다. 부인은 남편의 공개적인 인격 모독에 화가 나서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나데즈다 /위키피디아
나데즈다 /위키피디아

 

다음날 새벽, 나데즈다는 권총자살을 했다. 소련 공산당은 서기장 부인의 자살 사실을 숨기고, 급성맹장염으로 사망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스탈린은 부인 장례식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아내에 대한 정을 과시했다. 소련 인민들은 지도자의 인간적인 모습에 감명받았다.

스탈린의 부인은 남편의 폭압정치에 반대했다. 그녀는 유언으로 남긴 쪽지에서 현재 벌어지고 있는 모든 것에 반대한다고 썼다. 그녀의 방에는 류틴 강령’(Ryutin Platform) 사본이 놓여 있었다. 이 문건은 스탈린 독재를 비판하며, 정권 전복을 요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당시 스탈린에 대한 반대 여론이 확산되었고, 부인에게까지 파고들었던 것이다.

 

마르테먄 류틴(Martemyan Ryutin)은 원조 볼셰비키였다. 1914년 볼셰비키에 입당해 19172월혁명, 10월혁명에 뛰어들었고, 내전기에 이르쿠츠크와 중국 하얼빈에서 백군과의 전투에도 참가했다. 그는 볼셰비키 우파인 니콜라이 부하린의 추종자였다.

류틴은 19326월에 스탈린과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위기”(Stalin and the Crisis of the Proletarian Dictatorship)라는 제목의 이른바 류틴 강령을 작성해 스탈린의 인간성과 정책을 맹렬히 비난했다. 문건은 집단농장의 강제노동과 그로 인한 대기근, 공업화의 문제점들을 낱낱이 지적했다. 류틴은 스탈린을 부도덕한 정치 음모자”, “파국적인 정책으로 혁명의 무덤을 파는 자라고 썼다. 그는 스스로를 마르크스-레닌주의자라며 스탈린이 레닌주의와 결별했다고 주장했다.

류틴은 같은 생각을 가진 당원들을 결집했다. 미하일 톰스크, 니콜라이 우글라노프, 알렉세이 류코프 등 동지들이 그와 함께 했다. 그 문건의 사본은 당지도부인 레프 카메네프와 그리고리 지노비예프에게도 전달되었고, 스탈린의 부인에게도 건네진 것이다.

하지만 밀고자가 이 모임을 비밀경찰 OGPU에 고발했다. 923일 류틴은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검거선풍이 불었다. 스탈린 집권초기에 삼두체제를 구성했던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도 문건을 신고하지 않은 죄목으로 당에서 추방되었다. 스탈린은 트로츠키를 내쫓을 때 손잡았던 동지를 적으로 내몬 매몰찬 인물이었다.

스탈린은 류틴을 부르주아-쿨라크의 지하조직을 결성하려 한 계급의 배반자로 규정하고 사형을 시키려 했다. 하지만 스탈린의 막역한 친구이자 경쟁자인 세르게이 키로프(Sergey Kirov)의 만류로 죽이지는 않았다. 류틴은 1937년 대숙청 때에 총살당한다.

또다른 스탈린 반대파가 있었다. 이반 스미르노프(Ivan Smirnov), 니콜라이 에이스몬트(Nikolai Eismont), 블라디미르 톨마체프(Vladimir Tomachev)등 당 중앙위원들로 구성된 정치엘리트였다. 이들은 회합을 갖고 스탈린의 지도권을 박탈하는 계획을 논의했다. 이들도 참석자 한 사람의 밀고로 스탈린이 알게 되었고, 일제히 검거되었다.

 

트로츠키(가운데)와 이반 스미로노프(왼쪽) /위키피디아
트로츠키(가운데)와 이반 스미로노프(왼쪽) /위키피디아

 

민주주의 국가에서 같은 의견을 가진 사람들끼리 정파를 구성할수 있고, 그 정파는 정치결사로 보호를 받는다. 하지만 독재국가에서 다른 의견이 허용되지 않는다. 스탈린은 분파의 결성을 금지했다. 그는 당과 국가, 즉 자신과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을 권력에서 밀어냈다.

스탈린의 이런 생각은 자신의 공포심에서 비롯된다. 자신이 권력에서 밀려날 것에 대한 두려움, 반동적 부르죠아와 쿨라크가 다시 일어날 것이란 조바심, 독일과 일본의 파시스트들이 동과 서에서 공격해올 것이란 우려가 그를 초조하게 했다. 그는 늘 적들에게 포위되어 있다는 망상에 시달렸고, 당원들 마음 속에 남아 있는 부르죠아적 찌꺼기를 제거해야 한다고 믿었다.

 

스탈린이 대숙청(Great Purge)에 돌입한 계기는 레닌그라드의 당서기이자 절친인 세르게이 키로프의 암살 사건이었다.

1934121, 레닌그라드 공산당사에서 키로프가 트로츠키를 따르는 학생 레오니트 니콜라예프(Leonid Nikolayev)에 의해 암살되었다. 비밀경찰 NKVD는 암살자와 공범 13명을 체포했다.

키로프의 암살은 스탈린이 방조했다는 설이 있다. 암살자는 오래전부터 위험인물로 찍혀 있었고, 그가 당사로 들어가는데도 NKVD가 권총 소지를 허용했다는 것이다. 키로스는 반대 당파들이 스탈린의 대체인물로 생각했기 때문에 제거 대상이 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어쨌든 스탈린은 키로스 암살사건을 십분 이용했다. 그는 즉시 계엄령으로 내리고, 스스로 수사를 지휘했다. 스탈린은 지노비예프의 일파가 범행을 주도했다고 비난하고, 그 일파를 체포하도록 다그쳤다. 탄압은 전국적으로 확대되었고, 1935년에 25만명의 당원이 추방되었다.

 

비밀경찰 NKVD의 책임자 겐리흐 야고다(Genrikh Yagoda)가 총대를 멨다. 야고다는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 일파를 숙청하면서, 너무나 많은 당원들이 제거되는데 불안감을 느꼈다. 그는 한때 동지였던 그들에게 동정심도 느꼈다.

스탈린은 이런 기미를 눈치채고 1936년에 야고다를 밀어내고, 니콜라이 예조프(Nikolai Yezhov)NKVD 수장에 앉혔다. 본격적인 대숙청은 1937~1838년 사이에 전개된다. 대숙청을 예조프시나(Yezhovschina)라고 불릴 정도로 예조프의 역할은 컸다. 예조프는 스탈린의 사냥개 역할을 충실히 했다.

예조프는 트로치키와 지노비예프 일당이 스탈린에 반대하는 거대한 조직을 구성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크렘린 내에 스파이 조직이 있다면서 대규모 숙청을 시작했다. 크렘린의 청소원, 사서, 중앙집행위원회 관리들도 해고되었다. 중앙위원회 의장으로 스탈린의 오랜 친구였던 아벨 예누키제(Avel Enukidze)마저도 반대파를 크렘린에 취직시켜 주었다는 이유로 당에서 쫓겨났다. 그는 자살했다. 예누키제의 제거를 통해 스탈린은 형식적으로나마 유지해왔던 집단지도체제를 무너뜨리고, 일인독제체제를 구축했다.

 

농촌지역 쿨라크 가족들이 소개되는 모습 /위키피디아
농촌지역 쿨라크 가족들이 소개되는 모습 /위키피디아

 

대숙청 기간에 축출은 곧 사형을 의미했다. 1937~1938년 사이에 95~120만명이 처형된 것으로 추정된다. 일종의 공포정치다. 당의 지침을 거부하거나 스탈린에 반대할 경우 처형된다는 공포심이 최초의 공산국을 지배했다. 19378월에서 193811월 사이에는 하루 평균 1,500명 가량이 총살당했다. 처형되지 않은 사람은 강제노동수용소에 보내졌다. 이 기간에 굴락(강제노동수용소) 수용 인원은 120만명에서 150만명으로 늘어났다.

처형되거나 강제노동에 처해진 정치범의 부류는 다양했다. 스탈린을 비판한 공산당원에서 집단농장 거부자, 소수인종도 포함되었다.

당시 모스크바 당 서기장이었던 니키타 흐류쇼프의 말에 따르면, 스탈린은 고발 내용 가운데 10%가 진실이라 하더라도 고발 내용을 사실로 간주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의 사냥개 예조프는 비밀경찰에게 부족한 것보다 과한 것이 낫다며 대량의 숙청자를 고발하도록 종용했다.

피고발자들은 자백을 강요받았다. 그들에겐 자백할 때까지 고문이 가해졌다. 스탈린의 정적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의 경우 공개재판을 통해 연루자 160명이 처형되었다.

니콜라이 부하린도 예조프의 음모에 걸려들었다. 부하린은 조사과정에서 논리적으로 자신의 무죄를 설명했다. 하지만 그도 물리적 수단과 아내와 가족에 대한 협박을 이기지 못하고 끝내 만들어진 죄의 틀에 맞춰 자백을 했다.

 

우크라이나 비니챠의 학살사건(1943) /위키피디아
우크라이나 비니챠의 학살사건(1943) /위키피디아

 

죄를 지은 사람은 자수하도록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자수하지 않을 경우 당에 충실하지 않다는 의혹으로 가중 처벌을 받았다. 한사람이 체포되면 그 주변의 사람들이 줄줄이 연루되었다. 지역의 당 책임자가 체포되고, 조수, 친구, 지역은행가, 언론인, 소방서장까지 조사를 받았다.

친구 친지도 의심의 대상이었다. 지위가 높을수록 체포될 가능성이 높았다.

상호 고발이 장려되었다. 가족 구성원도 서로 고발했다. 부부, 연인관계가 증오로 변한 경우, 의도적 고발도 있었다. 상대방이 고발하기 전에 먼저 고발하는 게 유리했다.

국민들은 비밀경찰의 감시하에 있었다. 경찰은 정보원을 두었고, 그들은 늘 수십명 또는 수백명을 감시했다. 물리적 보상을 노리거나 공산당에 대한 충정심으로 자발적 고발을 한 사람도 있었지만, 체포된 친지를 살려주겠노라 하는 위협에 짓눌려 허위로 고발하는 경우도 있었다. 세상은 거대한 감시망에 갇혀 버렸다. 영국작가 조지 오웰은 이 상황을 ‘1984이란 소설에서 묘사했다.

 

이런 공포 분위기를 끝낸 것도 스탈린이었다. 스탈린은 19381월에 진위가 확인되지 않고 비방에 근거해 체포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NKVD의 예조프에게 지시했다. 사냥개의 역할은 이것으로 끝났다. 그해 11월 예조프가 비밀경찰의 수장 자라에서 물러났다.

사냥개들은 팽() 당했다. 예조프는 인민을 적으로 만들었다는 이유로 1940년에 총살당했다. 앞서 1936년 그의 전임 야고다는 예조프에 의해 밀수와 부패, 스파이 혐의로 체포되어 총살당했다.

스탈린은 이 모든 공포가 예조프의 짓이라는 인상을 주도록 유도했다. 자신은 그런 의도가 없었는데, 아랫 것들이 일탈했다는 것이다.

 


<참고자료>

Wikipedia, Nadezhda Alliluyeva

Wikipedia, Ryutin affair

Wikipedia, Great Purge

Wikipedia, Bloc of Soviet Oppositions

Wikipedia, Nikolay Yezho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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