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역사⑤…버마 왕자와 결투 벌인 나레수안
태국 역사⑤…버마 왕자와 결투 벌인 나레수안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2.02.02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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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유타야의 영웅…코끼리 대결 이후 버마 종속 탈피, 국토 확장

 

아유타야 왕조의 나레수안(Naresuan) 왕은 톤부리 왕조의 탁신(Taksin) 왕과 함께 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왕의 하나다. 두 왕의 공통점은 이웃 버마(미얀마)로부터 독립하고 영토를 확장해 강력한 국가를 만들었다는 점이다.

태국에는 나레수안에 대한 유산이 많이 남아 있다. 지폐에 그가 등장하고, 태국 육군은 나레수안의 코끼리 결투일인 118일을 기념일로 정하고 있다. 태국의 프리깃함의 이름도 나레수안이며, 나레수안 대학, 나레수안 공원, 나레수안 댐이 만들어졌고, 그를 기념하는 영화가 제작되었다.

 

나레수안 왕 /위키피디아
나레수안 왕 /위키피디아

 

나레수안은 1555년에 태국 북쪽 피싸눌록의 귀족 집안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마하 탐마랏차는 아유타야 왕조의 차카라팟 국왕이 왕위계승전을 벌였을 때 도운 공신으로, 차카라팟이 국왕에 오른 후 사위가 되었다. 따라서 나레수안은 아유타야 왕가와 외가로 연결된 귀족 출신이다.

나레수안이 8살이던 1563년에 버마가 피싸눌록을 쳐들어와 포위했다. 영주였던 아버지 탐마랏차는 버마군의 오랜 포위 공격을 방어하는데 한계를 느낀데다 도시엔 천연두가 창궐했다. 탐마랏차는 결국 버마군에 항복했다. 버마왕 바인아웅(Bayinnaung)은 장남인 나레수안(흑왕자)과 차남인 에카톳샤롯(백왕자)을 인질로 보낼 것을 요구했다. 탐마랏차는 두 아들을 인질로 보내고 버마를 종주국으로 받아들였다.

나레수안은 어린 나이에 버마 수도 바고에 인질로 잡혀갔다. 바고에서 나레수안은 버마 왕족과 귀족 자제들과 함께 군사훈련읇 받았다. 그는 버마 아이들보다 열심히 훈련을 받았고, 성적도 뛰어났다. 그가 적진에서 배운 군대 운용기술이 후에 버마를 물리치는데 유용하게 사용되었다고 한다.

 

아유타유 왕국의 차카라팟 왕은 과거의 속지였던 파사눌록이 버마에 고개를 숙이자, 그 땅을 차지하려고 공격했다. 이에 버마의 바인아웅왕은 1568년에 아유타유를 침공해 왕을 갈아치우고 파사눌록의 영주였던 탐마랏차를 왕으로 앉히고, 아유타유를 위성국으로 만들었다. 이때부터 아유타유에 수코타이 왕조가 들어선다.

아유타유의 왕이 된 아버지 탐마랏차는 공주를 후궁으로 주는 조건으로 두 아들의 귀환을 버마왕에게 청원했다. 1570년 나레수안과 동생은 7년간의 억류를 끝내고 귀국했다. 부왕은 나레수안을 왕세자이자 파사눌록의 영주로 임명했다. 이때 나레수안의 나이가 15세였다.

왕세자 시절에 나레수안은 버마의 명령에 복종했다. 버마가 란쌍(라오스)의 수도 비엔티안을 공격할 때 나레수안은 파사눌록에서 군대를 이끌고 지원했다.

캄보디아의 크메르 왕조가 아유타야가 버마에 끌려다니는 것을 보고 수시로 아유타유를 침공해 왔다. 1574년 버마가 란쌍을 공격할 때 탐마랏차는 군대를 이끌고 지원했다. 그 틈을 이용해 크메르가 아유타야를 공격했다. 그때 나레수안은 천연두에 걸려 치료를 위해 아유타야에 머물고 있었다. 왕세자는 군대를 이끌고 나가 크메르의 함대에 포격을 가해 패퇴시켰다. 1580년에도 크메르가 아유타야를 공격했는데, 나레수안이 지원병을 이끌고 아유타야 방어에 성공했다. 그후 크메르는 더 이상 태국을 공격하지 않았다.

 

1581년에 31년간 버마를 통치하던 바인아웅이 숨지고, 그의 아들 난다 바인(Nanda Bayin)이 왕위를 계승했다. 난다의 삼촌이자 아바 영주였던 타도 민소가 조카에게 반기를 들었다. 난다 바인은 프로메, 타웅우, 치앙마이, 비엔티안 등 각지의 영주에게 동원령을 내려 반란군을 진압했다.

나레수안도 신임 버마왕의 지시를 받아 반군 진압을 위해 군대를 동원했다. 그런데 나레수안은 반군과의 전투에 소극적이었고, 난다 바인은 나레수안을 의심하게 되었다. 버마 왕은 왕세자 밍기 스와(Mingyi Swa)에게 나레수안을 살해하라고 지시했다.

나레수안이 버마 국경에 도착했을 때, 밍기 스와가 자신을 죽이려고 병력을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레수안은 부하 장수들과 몬족 사람들을 모아 놓고 금으로 만든 잔에 물을 가득 채워 땅에 쏟아면서 지금 이 순간부터 버마와 관계를 끊는다고 신에게 맹세햇다. 버마의 속국에서 벗어나 독립할 것임을 선언한 것이다.

그는 몬족을 동맹으로 삼아 버마의 수도 바고로 진격해 그곳에 잡혀 있던 타이족 포로들을 데려왔다. 하지만 아직은 나레수안은 버마를 이길수 없었다. 난다 바인이 병력을 이끌고 쳐들어오자 나레수안은 퇴각했다. 158610월 난다 바인은 버마군을 이끌고 쳐들어와 수도 아유타야를 포위했다. 하지만 나레수안이 철저하게 방어하는 바람에 버마군은 5개월만에 포위를 풀고 되돌아갔다.

 

태국 나레수안 왕과 버마 밍기 스와 왕세자의 코끼리 대결을 형상화한 상 /위키피디아
태국 나레수안 왕과 버마 밍기 스와 왕세자의 코끼리 대결을 형상화한 상 /위키피디아

 

1590년 아버지 탐마랏차가 사망하고, 나레수안은 아유타야의 왕이 되었다. 그는 산펫 2(Sanphet II)로도 불린다.

나레수안이 왕이 된 이후에도 버마의 침공은 멈추지 않았다. 1592년말 버마의 난다 바인 왕은 왕세자 밍기 스와에게 군대를 주어 태국을 공격하도록 지시했다. 나레수안은 캄보디아를 진압하기 위해 출병하려 했다가 버마 전선으로 방향을 바꿨다.

태국 서부 수판부리에서 양측 군대는 진영을 형성했다. 나레수안은 퇴각하다가 적절한 지점에서 공격할 작정이었다.

15931, 나레수안을 태운 코끼리가 광포하게 날뛰어 적진 한가운데로 들어갔다. 나레수안은 적장 밍기 스와가 나무 그늘에서 쉬고 있는 것을 보았다. 나레수안은 밍기 스와보다 3살 많았고, 버마에 인질로 잡혀 가 있을 때부터 알고 있던 사이였다. 아유타야 왕은 버마 세자에게 약을 올렸다.

아우야, 졸장부처럼 나무 그늘에 쉬고만 있을 터인가. 병사들을 고생시키지 말고, 나랑 일대일로 붙어 보자꾸나.”

밍기 스와는 태국왕의 싸움 제의를 받아들였다. 30대의 혈기왕성한 두 군왕은 서로 코끼리를 올라타고 일합을 겨뤘다. 망기 스와의 칼 끝이 나레수안의 몸을 스쳐 지나가고, 투구를 갈랐다. 최종 승자는 나레수안이었다. 태국 왕의 칼은 버마 왕세자의 몸을 베었다. 함께 전투에 참여한 왕의 동생 에카톳사롯은 버마군의 또다른 장수를 무너뜨렸다. 지휘관들을 한꺼번에 잃은 버마군은 패주했다.

버마 연대기에서는 두 왕가의 결투 스토리가 없고, 대신에 왕자가 적의 총탄에 맞아 코끼리에서 떨어졌다고 서술되어 있다. 이 코끼리 결투에 관해 사실 여부를 의심하는 역사가들도 있다.

하지만 역사의 기록은 승자의 몫이다. 태국 역사가들은 이 전투를 재미있는 전설로 꾸며 전하고 있다. 이 전투에서 손상된 왕의 투구와 빼앗은 밍기 스와의 칼은 아직도 태국 왕실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나레수안 왕이 버마의 수도 바고에 입성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나레수안 왕이 버마의 수도 바고에 입성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코끼리 대결 이후 아유타야 왕국은 버마를 제압해 나갔다. 버마는 더 이상 태국을 침공하지 않았고, 오히려 태국이 버마 깊숙이 쳐들어갔다. 1595, 나레수안은 버마를 공격했고, 1599년에는 버마 수도 바고를 점령하기도 했다. 나레수안은 크메르 왕국을 압박하고, 타이족의 또다른 나라 란나(Nan Na)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했다.

16054, 나레수안은 버마를 정벌하려다가 병으로 쓰러져 태국 북부 치앙마이에서 5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3명의 아내를 두었지만 자식이 없었기에 왕세제인 에카톳사롯이 그를 이어 아유타야 왕국의 국왕으로 즉위했다.

 


<참고자료>

Wikipedia, Ayutthaya Kingdom

Wikipedia, Naresuan

Wikipedia, Mingyi S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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