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역사⑦…아유타야의 사무라이, 야마다
태국 역사⑦…아유타야의 사무라이, 야마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2.02.04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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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용병, 왕실 권력투쟁에 개입하다 몰락…일본 군국주의에 의해 부활

 

바람이 불 때 대나무는 휘청거리지만 부러지지 않는다. 태국의 외교정책을 대나무 외교(bamboo diplomacy)라고 부른다. 강한자에게 굽히면서 실속을 챙기는 것이다. 아유타야 왕국이 중국 명나라에 조공사절단을 너무 자주 보내는 바람에 명나라가 조공회수를 줄여달라고 요청했다. 중국은 조공받는 것보다 많은 것을 하사하는 관례를 유지했기 때문에 아유타야로서는 조공을 많이 하는 것이 무역 이득을 얻는 방식이었다. 살기 위해서라면, 이익이 된다면, 조금쯤 머리를 숙일수 있다는 생각인 것 같다.

16세기 이후 서양 세력이 아시아에 발을 들여 놓았을 때 아유타야 왕실은 그들에게도 문을 열었다. 태국은 인도에 본거지를 튼 영국의 동인도회사, 바타비아(자카르타)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포르투갈에게도 상업적 활동의 자유를 주었다.

 

아유타야 일본인마을 기념비 /위키피디아
아유타야 일본인마을 기념비 /위키피디아

 

아유타야 왕실은 일본에게도 문을 열었다.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막부 시기부터 슈인센(朱印船)이라는 관인(官認) 무역을 시행했는데, 도쿠가와 막부에도 그 제도가 이어졌다. 슈인센은 왜구들이 행한 약탈적 무역행위를 정부 통제하에 두는 제도였다. 도쿠가와 막부는 초기에는 서양인의 도움으로 갤리온선을 건조해 베트남, 스페인령 필리핀, 참파, 캄보디아, 아유타야, 파타니(말레이반도)에 사신을 보냈다.

아유타야의 개방적 태도는 일본인들의 활동에 유리한 여건을 형성했다. 태국에 일본인 정착촌이 생긴 것은 14세기부터였다. 그들은 왕국의 수도 근처에 아유타야니혼진마치(アユタヤ日本人町)라는 정착촌을 형성했다. 처음에 100, 200명씩 거주하던 일본인 마을은 전국시대, 임진왜란 등의 전란을 거치며 급격히 불어났다. 도태된 왜구, 사무라이, 로닌(浪人) 들이 따듯한 남쪽 나라 아유타야에 몰려들었고, 특히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패잔병들의 해외탈출이 피크를 이루었다. 17세기초에는 태국의 일본촌 인구가 8,000명으로 불어났다.

 

야마다 나가마사 /위키피디아
야마다 나가마사 /위키피디아

 

야마다 나가마사(山田長政)는 아유타야 왕실에서 중용된 대표적 케이스다.

1590년 스루가국(駿河國, 지금의 시즈오카현)에서 태어난 야마다는 일본에 있을 때 번주(藩主)를 섬기는 가마꾼이었다. 22살이 되던 1812년 그는 슈인센을 타고 나가사키를 출항했다. 그는 대만을 거쳐 아유타야 일본인촌에 들어가 용병부대에 합류했다. 그는 일본인들이 운영하는 사략선에 승선해 해적행위에 가담했다.

그가 싸운 상태는 바타비아를 거점으로 한 네덜란드 선박이었다. 그는 네덜란드 상선을 공격해 약탈하고, 그 보물을 호주 동해안 어딘가에 숨겼다고 한다. 아직도 호주에는 야마다가 숨긴 보물이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다. 야마다의 사략선이 돌아다닌 곳은 호주의 토러스 해협(Torres Strait), 산호해(Coral Sea) 일대라고 한다. 일본은 이런 이야기를 근거로 영국인 제임스 쿡에 앞서 일본인이 호주를 발견했다고 과장한다. 결정적 증거는 없다.

아유타야 왕실은 야마다의 이런 해적행위를 관심 있게 지켜보았다. 용맹무쌍한 일본인 용병을 서양세력 또는 국내 정적과 싸울 때 이용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1617, 야마다는 타이어로 반이푼(Ban Yipun)이라 불리는 일본인촌 촌장이 되었다. 외국인 거주지의 촌장은 왕실이 임명하는데, 야마다는 송탐(Songtham) 왕의 총애를 받았다는 얘기가 된다. 당시 일본인 용병이 수백명에 이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유타야 왕국은 일본인 이외에도 포르투갈인을 외국인 용병으로 활용했다. 그런데 적국인 버마도 포르투갈인을 용병으로 고용했다. 두 나라에 전투가 벌어질 때 포르투갈 용병은 상대방을 공격하는데 적극적이지 않았다. 이런 약점을 보완해 준 것이 일본인 용병이었다. 버마에는 일본인 용병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포르투갈인처럼 배신하지는 않았다.

인도네시아를 공략하던 네덜란드 함대가 야마다의 함선을 공격하려 했지만, 그가 아유타야의 지지를 얻는 것을 알고서는 공격을 중단했다고 한다. 그의 함대를 치는 것은 곧 아유타야와 전쟁을 벌이는 것이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야마다는 아유타야를 2차례 공격한 스페인 함대를 격퇴했다. 아유타야 왕실은 그 공을 인정해 공주를 야마다와 결혼시켰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 전설은 아유타야 연대기에 기록되지 않아 사실여부가 확실하지 않다. 분명한 것은 야마다가 송탐왕의 신임을 얻어 귀족 서열 3위인 오크야 세나피묵(Ok-ya Senaphimuk)이라는 지위까지 올랐다는 사실이다. 그는 짜오프라야 강에 진입하는 배에 세금을 받을 권리도 갖고 있었다고 일본측 연구자들은 주장한다. 야마다의 권세가 하늘을 찌를 때, 아유타야 왕국에서 일본인 용병들은 알장기를 휘날리며 사열을 했다.

 

야마다 용병부대가 일장기를 앞세우고 아유타야 왕국에서 행진하고 있는 그림 /위키피디아
야마다 용병부대가 일장기를 앞세우고 아유타야 왕국에서 행진하고 있는 그림 /위키피디아

 

1624년 그는 사슴가죽 등 샴의 특산물을 싣고 나가사키로 갔다. 그는 3년간 머물면서 도쿠가와 막부에게 슈인센 허가장을 받으려 했지만 끝내 받지 못했다. 막부는 그를 단지 태국 왕실에 봉사하는 외국인으로 보았을 뿐이다.

그는 일본에 머물 때 자신의 전함을 그려 고향 시즈오카의 한 절에 걸었다. 그 그림은 후에 화재에 불탔지만, 사본이 아직 남아 있다. 그의 전함은 18대의 포를 장착한 서양식 함선이었다.

 

야마다의 전함 /위키피디아
야마다의 전함 /위키피디아

 

1629, 그는 송탐 왕의 사절로 일본을 다시 방문했다. 그가 아유타야로 돌아왔을 때 송탐왕은 나이 38살에 사망하고, 왕실에는 왕위계승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송탐왕의 반대파가 차기 왕위를 계승했고, 새 정권은 중국계 화교와 손을 잡았다. 야마다는 권력에서 멀어졌다. 아유타야 왕실은 일본인들의 반란을 우려해 야마다를 말레이반도에 있는 나콘시탐마랏(Nakhon Si Thammarat) 영주로 좌천시켰다.

변방에 좌천된 나가마사는 1630년 말레이계 파타니 왕국과 전투중에 다리에 부상을 당했다. 그는 상처를 치료하는 도중에 사망했다. 상처에 고약을 발랐는데, 독이 함유되어 있었다고 한다. 네덜란드 사료에는 야마다의 독살설이 기록되어 있는데, 가해자는 프라삿 통 왕의 신정권이라고 한다.

야마다가 죽은후 아유타야의 찬찰자는 4,000명의 병력을 동원해 수도의 일본인 정착촌을 파괴하고 일본인들을 축출했다. 일본인들은 이웃 크메르 왕국으로 도피했다. 그들 중 300여명이 3년후인 1633년에 태국에 다시 들어가 옛 터전을 이어갔다.

한편 에도(도쿄)의 막부가 샴의 정정으로 야마다 등 일본인들이 살해되고 축출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막부는 이를 일본에 대한 공격으로 판단하고, 보복 차원에서 태국에 대한 슈인센 허가를 취소했다. 아유타야 정부가 에도 막부에 교역 재개를 요청했지만, 일본은 1636년에 쇄국을 전격적으로 단행했다. 일본인들이 태국에서 쫓겨난 후 그 반사이익을 네덜란드가 치지했다.

 

야마다 나가마사는 그후 태국과 일본에서 잊혀졌다. 그가 다시 살아난 것은 2차 세계대전이다.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동남아시아를 침공하면서 야마다를 다시 살려냈다.

일본군은 버마를 공격하기 위해 길을 열어달라고 했다. 태국 정부는 또다시 대나무처럼 휘청거리는 외교술을 발휘했다. 1938년 일본 해군 연습 함대가 태국의 아유타야 일본인 마을 터에 야마다 나가마사를 제신으로 하는 신사를 건립했다.

군국주의 시절에 일본 도덕 교과서는 야마다를 소개하면서 “320년 전에 야마다 나가마사가 샴에 갔다. 그 샴은 지금 태국이다.”고 서술했다. 마치 태국이 일본의 속국인양 떠든 것이다.

태국 역사가들은 일본이 주장하는 야마다 나가마사의 업적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는 용병에 지나지 않았으며, 왕실에 충성한 신하였을 뿐이라는 것이다.

 


<참고자료>

Yoshiteru Iwamoto, Yamada Nagamasa and His Relations with Siam (Nihon Univ.)

Wikipedia, Ayutthaya Kingdom

Wikipedia, Yamada Nagamasa

Wikipedia, Japanese Village (Ayutthaya)

ウィキペディア, 山田長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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