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한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 통합
실패한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 통합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4.01.24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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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시아연방②…독립운동할 땐 통합 합의, 다른 시기에 따로 독립, 한때 전쟁도

 

말레이시아 사람과 인도네시아 사람은 서로의 말을 알아듣는다고 한다. 언어로 인종을 분류할 때 말레이인과 자바인은 공히 오스트로네시아어족에 속한다. 두 나라의 모국어는 서로에게 방언에 해당한다.

유럽인들이 오기 전에 두 나라는 하나의 영역에서 생활했다. 서로 싸우고 교역하며 문화와 역사를 공유했다. 인도네시아 지역의 고대국가 스리비자야, 마자파빗은 말레이반도까지 지배했고, 말레이반도의 말라카, 조호르는 수마트라섬에도 영향력을 미쳤다. 지금도 음식, 의복, 주거에서 두 나라 사람은 비슷한 양식을 취하고 있다. 종교도 공유했다. 불교와 힌두교가 반도를 거쳐 열도에 퍼졌고, 그후 이슬람권에 편입되었다.

그러던 두 지역이 갈라지게 된 것은 서양세력이 오고부터였다.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 말레이시아는 영국의 지배를 받았다.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의 현재 국경이 그려진 것은 1824년 영란조약에서다. 영국과 네덜란드는 말레이반도와 수마트라섬 사이 말라카 해협을 경계로 지배영역을 나눴다. 보르네오 섬은 애매했다. 영국의 개인과 기업이 보르네오 북부를 차지했고, 네덜란드가 남쪽을 점령하면서 분할되었다.

 

마자파힛의 전성기 지배영역(1365) /위키피디아
마자파힛의 전성기 지배영역(1365) /위키피디아

 

두 지역에서 민족주의가 일어난 것은 20세기 초입이다. 양측 민족주의자들은 독립 후에 두 지역이 하나의 나라를 세우는데 의견일치를 보았다. 이를 범인도네시아주의(Indonesia Raya) 또는 범말라야주의(Malay Raya)라고 부른다. “raya”는 말레이어 또는 자바어로 크다”()는 뜻이다. 말레이반도, 싱가포르섬, 순다열도, 보르네오, 브루나이를 합쳐 하나의 나라를 건설하자는 정치운동이다. 여기에는 포르투갈령 동티모르도 포함된다.

1920년대 말레이반도 페락에 설립된 술탄이드리스 교육대에서 학생과 졸업생 사이에 범말레이국가 창설이 논의되었다. 이 이념은 수마트라와 자바로 건너갔다. 1928년 바타비아(자카르타)에서 수카르노와 하타가 청년회의를 주도하며 숨파퍼무다(Sumpah Pemuda)라는 역사적인 선언을 제창했다. 이들은 하나의 국가, 하나의 민족, 하나의 언어라는 인도네시아 민족운동의 테제를 선언했다. 이 회합에서 위대한 인도네시아’(Indonesia Raya)가 국가로 채택되었다. 1938년 말레이반도에서 이브라힘 야콥 주도로 청년말라야연맹(KKM, Kesatuan Melayu Muda)이 결성되었는데, 이 정치조직은 인도네시아를 포함한 대말랴야를 목표로 했다.

 

1942년 일본군이 영국과 네덜란드를 쫓아내고 진주하자, 두 지역이 하나의 지배자 아래로 통합되었다. 말레이에서 KMM, 인도네시아에서 수카르노측이 독립을 기대하며 일본군을 환영했다. 반도의 KMM은 일본에 너무 일찍이 독립을 요구하는 바람에 해산되었으나, 열도의 수카르노측은 일본에 협조하며 대인도네시아의 꿈을 이어갔다.

일본은 대동아공영권을 앞세워 현지 민족주의를 이용하려 했다. 그러나 말로만 독립을 약속했을뿐, 점령기간 내내 독립을 허용하지 않았다.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자 민족주의자들은 초조해 졌다. 19457월 반도의 민족단체들은 이브라힘 야콥을 중심으로 인도네시아-반도 인민연맹(KRIS)를 조직했다. 이 단체는 영국이 들어온 후에 말레이반도의 독립을 성취한 후에 인도네시아와 합병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이 계획은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와 하타와 사전에 협의되었다.

일본 패망 직전인 194589일 일본군 남방사령관 데라우치 하사이치(寺内寿一)가 수카르노와 하타를 일본군 남방사령부가 있는 베트남 사이공(지금의 호치민시)으로 불렀다. 데라우치는 그제야 곧 독립을 시켜줄 것이니 준비하라고 했다. 수카르노와 하타는 데라우치에게 영국령 말레이반도 인도네시아에 포함해 달라고 했다. 데라우치는 자신의 소관이 아니라며 답변을 회피했다. 돌아가는 길에 812일 수카르노와 하타는 말레이 페락에서 이브라힘을 만나 반도와 열도를 합친 대인도네시아 건국을 다시 한번 다짐했다.

수카르노 일행이 자카르타에 돌아온 날은 일본이 항복을 선언한 815일이었다. 이틀후 수카르노와 하타는 500명의 군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독립선언문을 낭독했다. 그 선언에 영국령 말레이반도는 빠져 있었다. 이브라힘을 비롯해 말레이반도의 범말라야주의자들은 크게 실망하고, 수카르노와 인도네시아 민족주의자들에게 페락에서의 약속을 이행하라고 요구했다.

 

대인도네시아 영역 /위키피디아
대인도네시아 영역 /위키피디아

 

수카르노는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의 독립이 급했다. 우선 인도네시아를 독립시킨 연후에 말라야와 합병한다는 전략을 취했다. 곧이어 네덜란드가 군대를 파견하는 바람에 독립전쟁이 벌어졌고, 194912월에야 인도네시아는 독립을 쟁취하게 되었다.

반도와 보르네오 북부에는 영국군이 진주했고, 1957831일에 말레이반도의 9개 술탄국과 2개 영국 직할령으로 구성된 말라야연방이 독립했다. 서로 다른 시기에 두 개의 국가가 독립하는 과정에서 범인도네시아든, 범말랴야 등 민족통합론은 잊혀져 있었다.

말라야연방이 독립한 후 브루나이, 사라와크, 북보르네오(지금의 사바)로 구분되는 보르네오 북부가 영국령으로 남아 있었다. 브루나이에선 술탄이 자치권을 행사했고, 사라와크와 북보르네오에서는 전후 영국이 브룩 백인왕조와 기업가로부터 주권을 이양받아 직할령으로 만들었다. 북부 보르네오는 기름이 나는 브루나이 이외에는 경제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영국은 어떻게 독립을 시킬 것인지를 고민했다.

 

북부보르네오 땅을 놓고 인도네시아, 말라야가 경합했다. 독립운동 당시엔 양쯕 민족주의자들이 한 마음으로 주장하던 범인도네시아, 범말라야이념이 이젠 서로의 이기적 개념으로 변질되어 충돌했다. 이런 가운데 보르네오 내부에서는 세 곳을 합쳐 북보르네오연방(North Borneo Federation)을 만들자는 주장이 나왔다.

먼저 선수를 친 정치인은 말라야의 초대총리 툰쿠 압둘 라만이었다. 1961527일 라만 총리는 말라야와 싱가포르, 브루나이, 사라와크, 북보르네오를 합친 말레이시아연방 구상을 밝혔다. 말라야연방을 보르네오북부로 확장해 말레이시아연방을 만들겠다는 취지였다. 라만이 수카르노의 범인도네시아론을 도용해 말레이시아연방론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16년전에 말라야를 방기했던 수카르노는 이번에는 북보르네오가 자국영토라고 강하게 주장했다. 우여곡절 끝에 1963916일 브루나이를 제외하고 말라야, 싱가포르, 사라와크, 사바가 말레이시아연방을 결성하게 되었다. (싱가포르는 2년후 연방에서 탈퇴한다.)

 

1964년 영국군이 인도네시아군과 맞서기 위해 헬기로 보급품을 수송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1964년 영국군이 인도네시아군과 맞서기 위해 헬기로 보급품을 수송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수카르노는 영국에 의해 자신의 구상이 수포로 돌아가지 보르네오 북부에 대해 군사공격을 감행했다. 1963년부터 1966년까지 인도네시아가 말레이시아 창설에 반대하며 벌인 군사행동을 벌이자, 영국은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 군을 동원해 말레이시아를 방어했다. 이 전쟁에서 영국과 말레이시아측은 114명아 전사한 반면에 인도네시아측은 590명 사망했다.

수카르노는 아무런 성과없이 피해만 키웠고, 1965년 군부쿠데타가 일어나 실각했다. 수하르토가 권력을 잡으면서 전쟁은 시들해졌고, 19665월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사이에 협상이 시작되어 811일 평화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로써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는 평화를 되찾았으나, 그 앙금은 아직도 남아 있다.

 


<참고한 자료

Wikipedia, Greater Indonesia 

Wikipedia, IndonesiaMalaysia confrontation 

Wikipedia, IndonesiaMalaysia rel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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