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시아사④…보르네오 분할
말레이시아사④…보르네오 분할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4.01.18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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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와크에 동남아 최초 백인 왕 등장…북부는 영국, 남부는 네덜란드 보호령

 

보르네오 섬은 그린란드, 뉴기니에 이어 세계 세 번째로 큰 섬이다. 면적이 74.8로 남북한을 합친 면적의 4배에 가깝고, 인구는 2,100만 정도다. 섬은 세 나라의 영토로 갈려 있는데, 말레이시아, 브루나이, 인도네시아다. 식민지 시절에 북부는 영국이, 남부는 네덜란드가 각각 지배했는데, 면적을 기준으로 하면 13의 비율이다.

1824년 영란조약에서 두 나라는 말라카 해협을 경계로 말레이반도와 수마트라섬 이하 열도로 관할영역을 나누기로 합의했지만, 보르네오에 대해선 명시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 섬에는 먼저 깃발을 꽂는 나라가 먹는 무주선점(無主先占)의 제국주의 논리가 적용되었다.

 

제임스 브룩 /위키피디아
제임스 브룩 /위키피디아

 

1838, 인도에서 태어난 제임스 브룩(James Brooke)이라는 영국인이 자기 소유의 범선 로열리스트(Royalist)호를 이끌고 보르네오 북부 쿠충(Kuching)에 내렸다. 그는 싱가포르의 영국 총독이 오마르 알리 현지 술탄에게 보내는 서신을 소지했다. 쿠충에는 원주민 다약(Dayak)족과 상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어수선했고, 술탄의 삼촌 무디 하심이 반란 진압차 와 있었다.

하심은 브룩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브룩은 자신의 배와 선원을 무장시켜 반란군 진압에 힘을 보탰다. 브루나이의 술탄은 고마움의 표시로 이 백인을 쿠충 총독으로 임명했다. 술탄과 브룩의 생각은 달랐다. 술탄은 영국인을 자신에게 세금을 내는 부하로 생각했는데, 브룩은 쿠충을 자신의 독립영지로 생각했다. 이는 다른 세계에 살아온 인식의 괴리에서 비롯되었을 수도, 서로의 욕심에서 나온 견해차일 수도 있다. 하지만 브루나이 술탄은 영국인 총독을 제압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를 점점 더 의지하게 되었다. 궁중암투와 반란이 일어날 때마다 이 영국인의 도움을 받았고, 브룩은 마치 영국 정부를 대표하는양 그를 도와주었다. 그 댓가는 땅이었다. 브루나이 서쪽 끝 쿠충에서 시작한 브룩의 지배영역은 점점 동쪽으로 뻗어나갔다. 그럴수록 술탄의 영토는 쪼그라 들었다.

1842년 오마르 알리 술탄은 마침내 사라와크(Sarawak)의 주권을 브룩에게 이양하고, 라자(Rajah)라는 칭호를 내렸다. 라자는 술탄(Sultan) 아래 등급의 군주다. 기독교도이자 유럽인이 보르네오 무슬림 세계에서 왕위에 오른 것이다. 그는 말레이족 세계에서 최초의 백인 왕으로 기록된다.

 

1844년 제임스 브룩은 영국 해군, 동인도회사 해군을 끌어들여 수마트라 섬 북쪽 해상에서 해적 소탕에 참여했다. 이 전투에서 그는 어깨에 총상을 입었다. 브루나이 술탄은 해적 퇴치에 도움을 준 공로로 브룩에게 라부안(Labuan) 섬을 주었고, 브룩은 라부안을 영국 국왕에게 바쳤다. 영국 정부는 제임스 브룩을 라부안 총독 겸 사령관에 임명했다. 브룩은 사라와크에서 군주이자, 라부안에선 영국정부의 총독이라는 이중 직함을 갖게 되었다. 영국은 또 그에게 기사 작위를 주어 사라와크도 대영제국의 범위에 포함시켰다.

사라와크의 백인왕조는 1842년에 시작되어, 2차 대전 때 일본군에 와해될 때까지 3100년에 걸쳐 지속되었다.

 

보르네오 섬의 국가별 영토 /위키피디아
보르네오 섬의 국가별 영토 /위키피디아

 

이 시기에 북부 보르네오(현재의 사바)는 브루나이 술탄의 실효적 통치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었다. 형식적으로는 브루나이의 영토이지만, 보르네오와 필리핀 사이에 있는 술루(Sulu) 군도의 오랑라웃(해양유목민족)이 자유롭게 활동하는 지역이기도 하다.

1865년 미국인 영사 찰스 모시스가 브루나이 술탄 압둘 모민에게서 북보르네오 토지를 10년간 임대하는 조약을 체결했다. 그러자 술루왕국이 북보르네오에 대한 종주권을 주장하고 나섰다. 모시스는 사업 성과를 내기 어렵다고 판단해 독일인 오버베크 남작과 영국인 알프레드 덴트에게 임대권을 매각했다. 그들은 북보르네오회사를 설립해 술루왕국에 매년 일정액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분쟁을 해결했다. 그러자 이번엔 필리핀을 식민통치하던 스페인이 술루왕국의 관할권을 주장하며 북보르네오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했다. 영국과 독일이 개입했다. 1885년 마드리드에서 영국, 독일, 스페인 3자 대표가 회동해 스페인이 술루군도의 영유권을 갖되, 보르네오를 넘보지 않는다는 선에서 합의가 이뤄졌다.

북보르네오에는 인구가 적었기 때문에 경제적 효용가치가 낮았다. 오버베크는 이곳에 감옥을 지어 호주처럼 유럽의 죄수를 데려오는 방안을 궁리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방안은 채택되지 않았고, 중국인 인력을 데려왔다. 북보르네오는 목재가 좋았다. 보르네오 목재는 주로 이곳에서 생산되었다.

 

술루 왕국 /위키피디아
술루 왕국 /위키피디아

 

영국인들이 보르네오 북부를 잠식하는 동안에 네덜란드는 보르네오 남부를 차지했다. 보르네오 남부에는 폰티아낙(Pontianak) 술탄국, 중국인이 세운 난방(蘭芳) 공화국 등이 존재했으나, 하나씩 네덜란드에 점령되었다.

1888년 영국은 사라와크, 북보르네오, 브르나이를 보호국으로 만들었고, 1891년 네덜란드는 남부보르네오를 보호국으로 설정함으로써 보르네오의 분할이 마무리되었다.

 


<참고자료>Wikipedia, Borneo

Wikipedia, History of Malaysia 

Wikipedia, James Brooke 

Wikipedia, History of Sab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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