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방에서 쫓겨나 홀로 독립한 싱가포르
연방에서 쫓겨나 홀로 독립한 싱가포르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4.01.29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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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시아연방⑤…인종갈등, 경제적 대립 등이 심화되며 통합 2년만에 결별

 

1945815일 일본 항복 소식이 전해지며 싱가포르는 폭력의 도시로 변했다. 약탈과 보복성 살인이 광범위하게 행해졌다. 곧이어 912일 루이스 마운트배튼 경이 이끄는 영국군이 상륙, 일본군의 항복을 받아냈다.

영군이 돌아왔으나 싱가포르인들의 신뢰를 받지 못했다. 그들은 주민들을 지켜주지 못했다. 일본군은 싱가포르 중국인들을 본토의 중국인을 대하듯 숙청하고 학살했다. 싱가포르인들은 중국공산당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1949년 중공 정권이 수립되자, 싱가포르 중국계는 대형깃발을 내걸고 공산혁명을 축하하는 행진을 벌였다.

영국은 싱가포르를 고수하려 했다. 해군기지가 있고, 중계무역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19464월 해협식민지 가운데 페낭과 말라카는 말라야연합으로 넘겨주고, 싱가포르만 직할령으로 남겼다. 1948년 말라야에서 공산폭동이 일어나자 영국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싱가포르에도 준용했다. 식민당국은 치안법을 도입해 좌익에 대한 대대적인 전쟁을 시작했다. 영국은 싱가포르와 말라야에서 좌익척결에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보고, 19542월 영국은 싱가포르 자치를 위한 제헌의회 구성을 발표했다.

 

중공 정권 수립을 축하하는 싱가포르인들의 행진 /위키피디아
중공 정권 수립을 축하하는 싱가포르인들의 행진 /위키피디아

 

리콴유(李光耀, 1923~2015)가 정치무대에 첫발을 내디딘 것은 1955년 입법의원 선거였다. 리콴유는 한해전 좌익대학생 기관지 파자르(Fajar)의 편집장이 선동혐의로 재판을 받았을 때 변호를 맡이 무죄를 이끌냄으로써 싱가포르 중국계에 이름을 떨쳤다. 그 덕분에 그는 인민행동당(PAP)을 창당했다. 당시 입법의원 32석 가운데 7석은 영국의 임명직이었고, 25석을 선출했는데, 리콴유의 PAP3석을 차지했다. 이 선거에서 중도좌파 노동전선이 10석을 얻어 제일당이 되었고, 이 당의 데이비드 마샬, 림유혹(林有福)이 차례로 수석장관(Chief Minister)이 되어 자치령의 행정을 맡았다. 림유혹이 수석장관이던 시기에 좌익에 대해 대대적인 체포가 단행되었다. 이 때 PAP 내 공산주의자였던 림친시옹(林清祥) 등이 구속되어 리콴유는 중도정당을 이끌게 되었다.

중국이 공산화된 직후 싱가포르와 말라야의 중국인들은 붉은 조국에 열광한 반면에 영국과 말라야는 싱가포르의 공산화를 경계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림유혹의 좌파척결 덕분에 영국은 싱가포르 정치 상황을 안심하게 되었고, 외교와 국방을 제외하고 자치를 보장했다.

자치국가의 첫 시험대는 19595월 총선이었다. 이 선거에서 리콴유의 인민행동당은 총 51석 가운데 43석을 차지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림유혹이 너무 성급하게 공산주의자를 척결한 것이 오히려 중국인들의 반발을 샀고, 그 반발표가 어부지리 격으로 캠브리지 출신 변호사 리콴유에게 갔다. 좌파연합의 인민동맹은 4석밖에 얻지 못했고, 림유혹은 소수야당 당수로 급강하했다. 리콴유는 싱가포르 자치정부의 초대총리가 되었다.

 

리콴유 /위키피디아
리콴유 /위키피디아

 

외국인들은 리콴유를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았고, 인민행동당 내 일부 인사를 용공분자 또는 친중국인사로 보았다. 외국계 기업들은 본사를 싱가포르에서 빼서 쿠알라룸푸르로 이전시킬 채비를 했다. 리콴유 휘하의 재무장관 고켕스위(吳慶瑞)는 대대적인 시장개방과 외국인투자 유치에 나서 해외의 우려를 불식시켰다. 그럼에도 싱가포르는 자체적으로 경제 능력이 부족했다. 우선 물이 부족해 말레이반도에서 끌어와야 했고, 내수시장이 작았다. 수출로 벌어먹고 산다고 해도 조그만 섬 하나로 버티기 어려웠다. 장차 독립할 경우 이웃 나라도 두려운 존재였다. 당시 인도네시아는 인구가 1억이 넘었고, 군인수만 40만에 이르렀다. 그들의 군대는 네덜란드와 4년간 전투를 한 경험이 있었다. 리콴유와 PAP 지도부는 말라야연방과의 통합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시장도 넓히고 안보도 보장받겠다는 의도였다.

 

리콴유의 통합론은 당내 분열을 불러일으켰다. 인민행동당 좌파는 싱가포르 단독 독립을 원했다. 당내 경쟁자였던 옹엥구안(王永元)이 탈당해 1961년 보궐선거에서 인민행동당 후보를 누르고 압승했다. 말라야 집권당인 연합말레이국민기구(UMNO)는 리콴유의 리더십을 탐탁치 않게 생각했고, 리콴유가 공산주의자에 질질 끌려다니는 게 아닌지, 의심했다. 또 싱가포르가 연방에 들어오면 중국계가 다수가 될 것이란 의심에 사로잡혔다.

UMNO 지도부의 대체적인 기류는 통합에 부정적이었으나, 1961527일 압둘 라만 총리가 극적인 정책변화를 추진, 보르네오 북부를 합친 말레이시아 연방안을 제안했다. 싱가포르가 연방에 들어오더라도 브루네이와 사라와크, 북보르네오를 합치면 인구 구성에서 말레이인의 우세를 유지할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중요한 건 싱가포르가 공산화되면 중공의 영향에 들어가 쿠바화할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였다. 말라야의 보수세력들은 싱가포르를 연방 내로 끌어들여 공산주의자를 척결해야 한다고 생각을 바꿔먹었다.

 

리콴유 등 인민행동당 우파는 연방가입을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하기로 하고, 196291일로 날을 잡았다. 그리고 본격적인 캠페인에 나섰다. 국민투표에서 71%의 연방가입 지지를 얻었다. 1963831일로 예정된 말레이시아 연방 창설은 필리핀과 인도네시아의 반대로 연기되었지만, 리콴유는 그날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공식 선언했다. 그는 영국령인 상태에서 연방에 가입하는 게 아니라 독립국으로서 가입하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유엔의 중재에 의해 1963915일 말레이시아연방이 선포되고, 싱가포르는 말레이시아의 일원이 되었다.

 

싱가포르의 영토 /브리태니카
싱가포르의 영토 /브리태니카

 

말레이시아로 통합된 연후에 두 이질적인 집단의 모순이 심각하게 드러났다. 말레이시아는 말레이족 우선의 원칙(부미푸트라)를 채택했는데, 싱가포르에도 그 원칙을 적용하라는 것이었다. 이 원칙에 따라 싱가포르는 공무원의 일정비율을 말레이족을 임용해야 했다. 리콴유는 말레이인도 중국계, 인도계와 동등한 자격으로 경쟁하고, 그 과정을 통해 공직에 나설수 있다며, 특정인종의 우대정책을 반대했다. 말레이인들은 숫적으로 많았지만 중국인과 인도인이 경제적으로 월등히 우세해 이대로 가다간 중국인 세상이 되지 않을까, 걱정했다. 싱가포르의 중국인 비율은 87%였다.

말레이인정당은 UMNO와 싱가포르 집권당인 인민행동당 사이가 틀어졌다. UMNO가 싱가포르 선거에 후보를 내자, 인민행동당도 말레이반도 선거구에 후보를 냈다. 두 정당간 금기가 깨지며 감정적 분노가 높아갔다.

두 민족의 감정을 격하게 끌어올린 사건은 1964년 싱가포르 인종폭동이었다. 721일 이슬람 예언자 무하마드 탄생일 축제가 열렸다. 행렬이 시내를 지나갈 때 중국인과 말레이인 사이에 충돌이 벌어졌다. 사태는 빠르게 확산되었다. 싱가포르 당국은 통행금지 조치를 내렸지만 충돌을 막지 못했다. 이 사건으로 21명이 죽고 454명이 부상당했다. 9월도 충돌이 일어나 13명이 죽고 100여명이 다쳤다.

사태가 악화되자 UMNO의 과격파들은 리콴유를 처형하라는 극언을 서슴치 않았다. 연방에 가입하면 안보가 든든해질 것이란 기대도 무너졌다. 1965310일 인도네시아 군에 의해 싱가포르 시내 맥도널드하우스가 폭격을 받았다.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사이 영토분쟁의 유탄이 싱가포르에 떨어진 것이다.

재무장관 고켕스위는 통합으로 인한 경제적 이득이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연방정부는 말레이반도의 공업화에 치중하고 싱가포르 상품의 개방에 미온적이었고, 인도네시아와의 충돌로 교역 시장이 악화했다는 것이었다.

마침내 두나라 지배정당 사이에 헤어질 결심을 하게 되었다. 더 이상의 유혈사태를 막는 것은 이별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 UMNOPAP 지도자들은 극비리에 결별을 위한 협상에 들어갔다. 압둘 라만과 리콴유도 결별에 합의했다.

196589일 말레이시아 연방의회는 1260의 만장일치로 싱가포르의 연방 탈퇴를 의결했다. 그날 리콴유는 TV에 나와 울먹였다. “말레이시아와의 통합은 나의 평생 정치철학이었습니다. 우리는 지리적으로, 경제적으로, 인종족으로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싱가포르공화국의 새로운 나라로 독립했습니다.” 싱가포르는 말레이시아 연방에서 쫒겨나 작은 도시국가로 독립하게 되었다.

 


<참고한 자료>

Wikipedia, History of Singapore 

Wikipedia, 1959 Singaporean general election 

Wikipedia, Self-governance of Singapore 

Wikipedia, Singapore in Malaysia 

Wikipedia, Lee Kuan Yew 

Wikipedia, 1964 race riots in Singap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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