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시아사②…영국령 말라야
말레이시아사②…영국령 말라야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4.01.15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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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낭에서 최초 식민지, 싱가포르 건설…중국인 소요사태 겹치며 연방형성

 

근대기 말레이반도에는 여러 술탄국들이 올망졸망 병립하고 있었다. 세력의 규모와 무슬림 내부의 지위에 따라 군주의 호칭을 술탄, 라자 등으로 달리 불렀지만, 대체로 9개의 술탄국이 있었다. 소왕국들은 하나의 정치통합체를 이루지 못하고 분권체제를 유지했기 때문에 이웃 샴(태국)과 서양세력들의 먹잇감으로 노출되어 있었다.

18세기 후반, 인도를 야금야금 집어삼키던 영국이 말레이반도에서 원한 것은 항구였다. 영국은 반도의 술탄들이 서로 치고받고 싸우든 관심이 없었고, 중국에 진출하기 위한 중간기항지를 찾아 이리저리 기웃거렸다.

그러던 중 말라카 해협에 접해 있는 케다에서 호박이 굴러들었다. 1771년 인도에서 활동하던 한 영국회사(Jourdain, Sulivan and de Souza)가 상거래를 트기 위해 반도 북서쪽에 있는 케다(Kedah) 술탄국에 사절단을 보냈다. 술탄은 사절을 보자마자 거래를 허용할 터이니, 영국의 보호를 받고 싶다고 했다. 태국이 집어 삼키려고 했기 때문에 케다는 영국을 방패막이로 삼으려 했다. 사절의 보고가 동인도회사에 올라갔지만, 영국은 대답하지 않았다.

2년후 영국 사절이 또다시 케다를 방문했다. 지난번 술탄은 죽고 그의 아들이 왕위에 올랐는데 상황은 더 위태로웠다. 이번엔 버마(미얀마)도 케다를 넘보았다. 술탄은 무역은 물론 페낭섬도 줄 터이니 보호령으로 삼아 달라고 했다. 1786년 동인도회사와 케다는 영토 이양과 보호에 관한 조약을 체결했다. 이렇게 해서 페낭 섬에 유니온 잭이 올라갔고, 몇 년후 섬 건너편 육지(웰즐리)도 양도받았다.

 

얼마후 1795, 유럽에서 네덜란드가 나폴레옹의 프랑스에 점령당했다. 런던으로 도망온 네덜란드 왕가는 영국에 아시아 식민지를 위임했다. 영국은 말레이반도에 있는 말라카와 자바섬의 자카르타를 공격해 점령했다가 전쟁이 끝난 1816년에 네덜란드에게 돌려 주었다. 그 기간에 네덜란드 식민지의 총독이었던 스탬퍼드 래플스는 말레이반도에 말라카와 자카르타에 버금가는 항구를 만들 것을 동인도회사에 요구해 허락을 받았다.

래플스는 조호르의 남쪽 끝에 있던 섬에 항구를 건설했으니, 싱가포르. 1819128일 래플스가 이끄는 조사단은 128일 싱가포르 인근 세인트존스 섬(St. John’s Island)에 내렸다. 래플스는 첫눈에 싱가포르가 마음에 들었다. 항구로서의 입지가 좋았고 방어에 유리했다. 중국과 인도를 연결하는 항로가 바로 이웃해 있었다. 래플스 일행은 조호르 강 입구를 조사도 하지 않고 싱가포르 섬을 자유무역항의 입지로 결정하게 된다. 이날이 싱가포르 근대사가 개막된 날로 기념되고 있다.

싱가포르 섬은 조호르의 영토였다. 당시 조호르에는 왕권 다툼이 벌어져 누가 실권자인지 애매했다. 래플스는 조호르의 술탄 후세인과 조약을 체결했다. 동인도회사가 무역 전초기지를 세울 권리를 갖고, 매년 술탄 후세인에게는 5천달러, 술탄의 아버지 테멘공(Temenggong)에게는 3,000 달러를 지불하는 조건이었다.

이번에는 네덜란드가 싱가포르 건설에 제동을 걸었다. 조호르는 네덜란드 관할이며, 싱가포르 섬은 술탄의 이복동생 압둘 라만의 영지라고 주장했다. 이에 래플스는 네덜란드 주장을 무시하고 항구 건설에 매진했다.

그 사이에 영국과 네덜란드는 협상을 벌였다. 1824년 영국과 네덜란드가 조약을 맺어 말레이반도와 수마트라를 경계로 두 나라의 경계를 그었다. 이로써 싱가포르는 영국령이 되었고, 말레이반도에 있던 말라카도 영국에 넘어갔다. 이 조약이 오늘날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를 분리하는 계기가 되었다.

영국은 기존의 페낭과 웰슬리, 말라카, 싱가포르를 합쳐 해협 식민지(Straits Settlements)라고 통칭하고 인도에 분부를 두고 있는 동인도회사이 관할하도록 했다.

 

주석광산으로 개발된 쿠알라룸푸르 광산촌(1900) /위키피디아
주석광산으로 개발된 쿠알라룸푸르 광산촌(1900) /위키피디아

 

18~19세기에 말레이반도에서 주석이 발견되었다. 그동안 반도 술탄국의 내정에는 관심이 없었던 영국은 주석광산에 눈독을 들였다. 유럽에 산업혁명이 한창이었기 때문에 주석수요가 급증했다. 케다와 남쪽 경계에 있던 페락(Perak)에 대규모 주석광산이 발견되었다. 북쪽의 샴이 페락을 노렸다. 태국은 케다에게 압력을 넣어 페락을 공격하도록 했다. 페락은 영국에 보호령이 되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1826년 영국은 페락을 보호령으로 삼았다.

미국의 남북 전쟁(1861~1865)이 일어나면서 주석의 세계적 수요가 급증했다. 말레이반도는 셰계주석의 주요 생산지가 되었다. 주석광산에 영국, 중국, 말레이 술탄의 자본이 흘러들어 경쟁했다. 중국인들은 쿨리를 노동력을 활용했고, 그들은 삼합회(三合會)와 같은 비밀결사조직과 결탁이 되어 있었다.

페락에는 하이산콩시(海山公司)와 기힌콩시(義興公司) 두 중국인 회사가 경합했다. 두 파벌은 모두 광둥 출신으로, 회사의 형태를 띠었으나 삼합회와 결탁되어 있었다. 18617월 페락의 라룻(Larut) 광산에서 두 회사는 물길을 놓고 분쟁을 벌이다 대판 싸움이 붙었다. 해협식민지 윌리엄 캐버너 총독이 중재에 나서 양파벌의 대결은 휴전에 들어갔다.

1865년 두 파벌은 투전판을 벌이다가 싸움을 벌였고, 하이산이 기힌의 죄수 14명 가운데 13명을 죽였다. 나머지 한 사람이 기힌의 본부로 도망쳐 사실을 알려주었다. 기힌측이 하이산을 급습해 40명을 죽였다. 패싸움은 영국령 식민지 페낭으로 번졌고, 영국이 개입해 두 파벌의 두목을 추방하고 벌금을 물림으로써 강제진압했다.

1871년엔 양측 두목의 치정관계에 얽혀 전쟁이 벌어졌고, 페락의 술탄 라자 압둘라가 개입해 간신히 뜯어말렸다. 1873년에는 양측의 앙금이 재연되어 네 번째 전쟁이 일어났다.

이 와중에 페락에는 술탄의 승계분쟁이 일어났다. 1871년 페락의 술탄 알리가 죽고 승계 1순위는 압둘라 왕자였다. 그런데 재상 이스마일이 술탄 승계를 선언했다. 압둘라는 영국인들의 도움으로 숥탄에 올랐다.

 

말레이반도의 영국령 형태 /위키피디아
말레이반도의 영국령 형태 /위키피디아

 

술탄 압둘라는 두 가지 문제, 즉 술탄의 승계와 중국인 소요를 해결하기 위해 영국의 주재관을 둘 것을 요청했다. 1874120일 술탄 압둘라와 영국의 해협식민지 총독 앤드류 클라크 사이에 팡코르 조약(Pangkor Treaty)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영국이 말레이 술탄국을 식민지배하는 공식 조약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이 조약을 기점으로 영국은 소동이 일어나는 술탄국들과 조약을 체결했다. 페락의 남쪽 셀랑고르(Selangor)에서도 1864~1874년 사이에 여러차례 중국의 비밀조직과 말레이 토호가 연결된 소요가 일어났다. 187510월 셀랑고르의 술탄 압둘 사마드는 앤드류 클라크 총독에게 서신을 보내 페락에서처럼 주재관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파항(Pahang), 네게리셈빌랑(Negeri Sembilan)도 순차적으로 영국의 주재관이 파견되는 보호령이 되었다.

1895년 영국은 셀랑고르, 페락, 네게리셈빌랑, 파항 4개의 보호국을 합쳐 연방을 구성했다. 공식명칭은 연방말레이주(FMS, Federated Malay States).

영국은 또 1909년 샴(태국)과 조약을 맺어 케다(Kedah), 페를리스(Perlis), 테렝가누(Terengganu), 켈라탄(Kelantan)의 지배권을 양도받았다. 1919년 이들 4개국에 조호르를 합쳐 5개국의 비연방말레이주(UMS, Unfederated Malay States)를 조직했다.

영국은 싱가포르, 페낭, 말라카의 해협식민지(SS), 4개주의 연방(FMS), 5개주의 비연방(UMS)으로 나눠 반도를 통치했다. SS는 영국 직할영토였고, FMS는 술탄이 이슬람과 관습의 문제를 맡고 행정은 영국이 파견한 주재관에게 위임되었고, UMS에는 고문관을 두었고 술탄은 폭넓은 자치권을 행사했다. 세 형태의 지배구조는 1942년 일본이 점령할때까지 지속되엇다.

 


<참고자료>

Wikipedia, British Malaya 

Wikipedia, Straits Settlements 

Wikipedia, Larut Wars 

Wikipedia, Pangkor Treaty of 18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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