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시아사⑤…일본이 부추긴 인종갈등
말레이시아사⑤…일본이 부추긴 인종갈등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4.01.19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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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대전 점령기에 말레이인엔 우호적, 중국인엔 적대적…심각한 후유증 유발

 

194112월 일본군이 말레이반도 페낭을 공격할 때 영국군은 무방비였다. 영국은 일본군이 싱가포르를 먼저 공격할 것으로 예상하고 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군은 태국을 거쳐 말레이반도 북부에서 남하했다. 태국이 일본의 겁박에 눌려 길을 내준 것이다. 게다가 영국은 공군이 없었다. 유럽에 매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싱가포르엔 육군이 없었다. 물도 부족한 상황이었다. 일본 25군 사령관 야마시타 도모유키는 개전 70일만인 1942219일 싱가포르에서 영국군 사령관 아더 퍼시벌의 항복을 받고 말라야 점령을 완료했다. 일본은 싱가포르의 명칭을 밝은 남쪽 섬이란 의미의 쇼난도’(昭南島)로 바꿨다. 말레이반도는 영국령 해협식민지와 연방 또는 비연방의 9개 술탄국을 주로 편성해 10개 주로 재편했다..

영국이 싱가포르 방어에 치중하는 바람에 보르네오의 사라와크와 브루나이는 아무런 저항없이 일본에 점령되었다. 일본 25군은 싱가포르를 거점으로 말레이반도와 수마트라 섬을 통합 지배했다.

 

1942년 2월 싱가포르에서 야마시타 도모유키 일본군 사령관이 아서 퍼시빌 영국군 사령관으로부터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1942년 2월 싱가포르에서 야마시타 도모유키 일본군 사령관이 아서 퍼시빌 영국군 사령관으로부터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일본은 대동아공영권의 일환으로 영국 지배에 저항하던 말레이 민족주의의 도움을 받을 생각을 했다. 말레이반도와 인도네시아 열도의 대말라야 통합을 주장하는 청년말라야연맹(KMM, Kesatuan Melayu Muda)은 일본군의 진주를 환영했다. 처음엔 일본과 KMM 두 세력이 협조 관계에 있었다. KMM의 지도자 이브라힘 야콥(Ibrahim Yaacob)은 일본이 말레이족의 통합과 독립을 보장해줄 것으로 믿었다. 얼마 되지 않아 이 조직이 독립을 요구하자, 일본은 귀챦아 졌다. 일본은 KMM의 영향력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파악한 후 19426월에 해산해 버렸다.

일본은 중국인들을 적대세력으로 파악했다. 중국인들은 중일전쟁에서 조국을 괴롭히는 일본을 미워했고, 그들이 말레이를 침공하자 노골적인 적개심을 노출했다. 일본은 중국인을 대상으로 숙청명단을 만들어 대대적인 불순분자 색출작업에 나섰고, 싱가포르와 반도에서 무려 8만명 가량을 살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죽음의 위협에서 빠져나온 중국인들은 산중으로 도주해 항일말레이인민군(MPAJA)을 조직해 게릴라 전을 벌였다. 이들은 말레이공산당(MCP)의 근간이 되었다.

그럼에도 일본은 중국인의 협조를 필요로 했다. 그들에게 돈이 있었고 상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싱가포르 화교협회장을 림분켕(林文慶) 박사가 맡고 있었는데, 그는 화교들 사이에 명망이 있었다. 일본은 그에게 5,000만 싱가포르 달러의 후원금을 요구했다. 림은 마지못해 2,800만 달러를 조달하고, 나머지는 일본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주었다.

 

일본군 퇴각후 1945년 12월, 조호르주 바루에서 시가행진을 벌이는 항일게릴라(MPAJA) 부대 /위키피디아
일본군 퇴각후 1945년 12월, 조호르주 바루에서 시가행진을 벌이는 항일게릴라(MPAJA) 부대 /위키피디아

 

일본은 말레이와 보르네오에서 석유, 고무, 주석, 보크사이트 등 전략물자를 원했다. 브루나이에는 1900년대 초에 석유가 발견되어 미국의 금수조치로 인한 석유부족을 해결하는 공급처가 되었다.

고무와 주석은 연합국의 제재로 수출이 금지되는 바람에 생산지에서 많은 실업자가 쏟야져 나왔다. 일본은 이들을 농촌으로 보내 쌀 증산에 이용할 요량이었다. 하지만 농촌의 말레이인들은 도시와 고무농장에서 밀려오는 중국인인도인 이주민에 반발하면서 인종갈등을 격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반도의 주민들은 극심한 식량부족에 시달렸다. 반도의 식량자급율은 37%에 불과했는데, 그동안 부족분은 태국과 버마에서 수입해왔다. 태국과 버마가 전쟁터로 변하면서 수출여력을 상실했고, 말레이와 싱가포르 사람들은 기아와 질병에 노출되었다. 말레이인들은 구황식물로 고구마처럼 생긴 카사바를 얼마나 먹었던지, 그때를 카사바 시기라고 부른다.

일본군은 말레이족에게는 잘 대해주려 했다. 이슬람을 존중하고 기도와 신앙생활, 종교축제를 자유롭게 허용했다. 이마저 수포로 돌아갔다. 19437월 일본은 말레이반도 북부의 케다, 페를리스, 클라탄, 테렝가누 4개주를 이양했다. 태국이 일본군에 길을 터준데 대한 고마움의 표시였는데 반도의 말레이인에겐 나라가 반토막 나게 된 것이다. 게다가 할양된 주는 곡창지대여서 남은 주민들의 식량난을 가중시켰다.

인도인 사회에도 유화적인 태도를 보였다. 특히 인도의 반영운동을 자극하기 위해 해외 인도인들로 인도국민군(Indian National Army)을 조직했다. 일본군은 인도국민회의 의장을 지낸 수바스 찬드라 보스를 수장에 앉혀 지휘하게 했다. 이 군대는 한때 4만명에 이르렀고, 델리를 공격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1943~1945년 태국에 양도된 영토(빨간색 4개주) /위키피디아
1943~1945년 태국에 양도된 영토(빨간색 4개주) /위키피디아

 

영국은 중국인이 주축이 된 항일게릴라부대(MPAJA)를 지원했다. 게릴라들은 일본군이 전선에 투입되는 동안에 말레이반도 전역을 장악하게 되었다. 항일 파르티산은 마을로 내려와 일본에 부역한 말레이인들을 색출해 무자비하게 테러를 자행했다.

농촌의 말레이인들은 중국인 빨갱이들을 두려워했다. 말레이인들은 이브라힘 야콥을 중심으로 조국방위군(PETA)를 조직했다. 일본은 말레이족으로 구성된 의용군을 게릴라 소탕전에 투입했다. 결국 일본군은 말레이반도를 점령할 동안에 인종간 대결을 부추기는 결과를 초래했다.

19458월 일본이 패망한 후 말레이반도와 보르네오, 싱가포르는 심각한 인종 대립의 후유증에 시달리게 되었다.

 


<참고한 자료>

Wikipedia, History of Malaysia 

Wikipedia, Malayan campaign 

Wikipedia, Kesatuan Melayu Muda 

Wikipedia, Greater Indone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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